"홍위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홍위병 일지로 보는 문화대혁명)
(홍위병 일지로 보는 문화대혁명)
38번째 줄: 38번째 줄:
 
==홍위병 일지로 보는 문화대혁명==
 
==홍위병 일지로 보는 문화대혁명==
  
*'''1966. 5''' 칭화대 부속중에서 처음 결성 “造反有理”
+
*'''1966. 5''' 칭화대 부속중에서 처음 결성
  5월 25일, 칭화대 부속중학교 학생들이 베이징 대학의 대자보를 보기 위해 대거 ‘견학’에 나섰다. 〈해서파관〉 사태로 분노를 삭이던 학생들은 선배들의 격문을 직접 보자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칭화부중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탄생한 홍위병 조직으로, 이날이 홍위병의 탄생일이었다. 다른 학교에서도 마오쩌둥 주석을 지키고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자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
  5월 25일, 칭화대 부속중학교 학생들은 〈해서파관> 사태로 분노를 삭이다가 선배들의 격문을 직접 보게 된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칭화부중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탄생한 홍위병이다. 점차 다른 학교에서도 마오쩌둥 주석을 지키고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자는 조직이 만들어진다.
  
 
*'''1966. 6~7월초기''' 홍위병 주도
 
*'''1966. 6~7월초기''' 홍위병 주도

2019년 6월 26일 (수) 14:37 판

개요

문화대혁명 시기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지칭한다. 홍위병의 운동은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노홍위병 시기, 조반파 홍위병 시기, 반군과 옹군 파벌의 홍위병 시기, 홍위병의 하향 시기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조반파와 홍위병이 꼭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조반파는 조반에 참여했던 노동자, 농민, 의사, 교사, 간부, 학생, 심지어 기관 혹은 일부 군인들까지를 모두 포괄하지만, 홍위병은 그 중에서도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격에 따른 홍위병 구분

노홍위병

노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의 초기에 주로 활동했던 학생들을 말한다. (학생들을 주체로 삼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면 생산활동에 큰 난리가 날 것을 모택동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모택동의 신념과 관련있다. 『모택동 문사고적 독서평주집』에서 모택동이 "초당사걸집"을 읽고 나서 쓴 평주를 보면 "3.7론"을 내뱉고 싶은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3.7론"은 청년들이 노인보다 강함을 드러낸다.) 문혁의 '초기 50일' 동안, 류사오치 주도 하에 위로부터 내려온 공작조의 지시를 받아 결성되었다. '사구 타파'와 교사, 문화인을 탄압하고 비판하고 폭행하는 홍위병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이다. 소위 노홍위병이란, '홍오류'(집안 출신이 노동자, 중·하·빈농, 혁명 간부, 혁명 군인)의 자제들, 즉 "출신성분이 좋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주로 고위 간부나 군 간부의 자녀들이었고, 베이징의 홍위병연합행동위원회, 후난의 홍색정권 보위군 홍위병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이들은 주로 당권보다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부류(지식인, 지주 출신)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혈통론을 만들어서, 현재 정부 관료와 당 간부가 되어 있는 과거 혁명가였던 부모들의 혁명정신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을 접견했던 백만 홍위병도 기본적으로 이들이다. 초기에 활동해서 후일 조반파에게 비판받는 대상이 되었는데, 때문에 문혁의 '보수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는 '보황파'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들은 이후의 '조반파 홍위병'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노홍위병'으로 불린다.

노홍위병의 등장 및 역사

  • 1964~1965년 사이 북경 중점 중학교인 '4중','6중','8중'에서 고급 간부 자제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생들이 연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고, 중학교육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4청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468학조'라고 칭했다. 이들은 홍위병 운동의 예행연습으로 볼 수 있다.
  • 1965년 10월 28일 청화대학 부속중학 예비 651반의 간부 자제 낙소해가 '조반정신 만세'라는 제목의 소자보를 붙인다. 이는 문화대혁명 중의 첫 번째 홍위병 대자보의 기초가 된다.
  • 1966년 5월 29일 고급 간부 자제들이 원명원 옛터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학교 당 조직과 공작조의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조직하여 이를 '홍위병'이라 명명하고, 그 의미를 '홍색 강산을 보위하는 전사'라고 하기로 결정하였다.
  • 1966년 6월 2일 북경대학 부속중학의 일부 학생이 '홍기전투대'를 조직했다. '홍위병'과 '홍기전투대'는 문혁 중에 가장 먼저 조직된 두 개의 자발적인 홍위병 조직이다. 하지만 그들은 합법적 지위는 승인 받지 못했다.
  • 1966년 6월 24일 청화대학 부속중학 고급 간부 자제들은 수정주의 교육 노선을 비판하고 학생 자신의 조직을 세우겠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1957년 이후 당내에 당이 통제하지 못하는 어떠한 독립적 조직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정때문에 강하게 억압당했다.
  • 1966년 8월 21일 《홍기》 11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 혁명 조반정신 만세'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공개 발표되었다. 총 세 편으로 구성되어 '통상 3론'이라고 부른다. 이는 홍위병 조직의 첫 번째 공개적 출현이었고, 홍위병의 '조반'에 대한 외침과 홍위병에 대한 모택동의 공개적지지 소식이 전 중국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반파 홍위병

노홍위병조직을 필두로 하는 '보수파'와 투쟁하고 1967년 1월 '탈권'에 이르기까지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학생들을 말한다. 이들은 혈통 이론을 주장하는 노홍위병과는 다르게 대부분 부모가 빈농과 노동계급 출신으로서, 당 간부가 아닌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 농민가정 출신의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들을 흑오류(구지주 계급, 구부농 분자,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 우파 분자 등)라고 부르며 홍위병이 될 자격이 없는 출신 성분이 나쁜 부류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학생과 중고생들이 핵심이었고, 수도삼사, 북항홍기, 상하이 홍혁회, 후난 고사, 쓰촨 815, 후베이 삼신 등의 조직이 있다. 이들은 노홍위병과 달리 출신성분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며 그의 지시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문화대혁명의 계획을 실행하였다. 이들은 1966년 8월 8일에 당 중앙위원회 회의 끝에 통과된 문혁 16조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내 실권파"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또한 이와 밀접하게 관련하여 4구타파를 두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착취계급은 여전히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이용하고 있고, 이러한 구사상은 결국 마오쩌둥의 사상에 순응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장대한 집회를 개최한 이후 홍위병은 베이징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돌며 4구 타파 운동을 벌여 나갔다. 하지만 이들은 연장자들이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변해간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문혁소조는 노홍위병이 아닌 조반파 홍위병의 방식을 지지했다. (66년 10월 3일 천보다의 '붉은 깃발'이라는 당 기관지의 논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의 대중 노선을 둘러싼 천보다의 해석은 홍오류흑오류의 말의 의미 자체를 달라지게 하여 거의 모든 홍위병 조직이 갑자기 흑오류 출신들로 채워지게 되었고, 덜 혁명적으로 생각되던 출신 배경을 가진 학생들, 이른바 회오류(지식인과 도시민이 해당) 출신의 학생들이 조반파 홍위병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도 1967년 '2월 역류'가 시작되며 '반군'과 '옹군' 홍위병으로 분열하였다.

옹군파, 반군파 홍위병

조반파 홍위병들이 분열하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①문화대혁명 운동에 있어서 '노동자 조반파'의 세력이 강대해지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홍위병은 부차적인 위치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핵심적인 지위를 상실하게된 일부 '조반파 홍위병'의 수장들이 이에 항거하며 '노동자 조반파'와 대립하게 된다.
②군대가 개입했다. 중앙에서는 각 지역에 군을 개입시켜 "좌파"를 지원하게 했는데, 누가 "좌파"인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군은 여러 조반파조직 중에서 누가 "좌파"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했고, 이는 조반파 홍위병이 분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백승욱 교수는『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에서 "양 파는 출신성붕의 다소의 차이, 사회주의 17년의 역사에 대한 평가, 군대의 좌파지지에 대한 태도, 투쟁의 주요 대상, 운동의 방식,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평가 등에서 입장이 대립되었다."라고 하였다.[p.124]

옹군파 홍위병

이때 군에서는 주로 청년학생이 중심이었던 홍위병 조직들을 지원했고, 때문에 많은 조반파 홍위병들은 '옹군파 홍위병'이 되었다. 반면 학생들 중에서는 군이 지원하는 옹군파 조직이 아닌 노동자 조반파 중심의 조직에 끝까지 몸 담는 경우도 있었다.

반군파 홍위병

반군파 홍위병은 군대 자체에 반대하는 조반파라기보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지방 군구'에 반대하는 조반파였다. 이들은 후에 중앙의 명령을 받들어 조반파를 지지하는 '야전군부대'와 연맹한다. 이 단계에서는 상당한 숫자의 학생 홍위병들이 노동자 조반파 중심의 '반군파' 편에서 안정적인 정국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조반을 지지한다.

홍위병 하향시기

1968년 12월 마오쩌둥이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내려가 중·하·빈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지시한 후부터, 홍위병들은 거의 모두 농촌과 농장으로 동원되어 주요 정치투쟁에서 물러났다. 이들을 '지청'(농촌으로 내려간 지식청년)이라고 부른다.

홍위병 일지로 보는 문화대혁명

  • 1966. 5 칭화대 부속중에서 처음 결성
5월 25일, 칭화대 부속중학교 학생들은 〈해서파관> 사태로 분노를 삭이다가 선배들의 격문을 직접 보게 된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칭화부중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탄생한 홍위병이다. 점차 다른 학교에서도 마오쩌둥 주석을 지키고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자는 조직이 만들어진다.
  • 1966. 6~7월초기 홍위병 주도
6월 24일, 칭화대 부속중학교에는 홍위병 명의로 〈무산계급의 혁명 조반정신 만세〉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핵심은 “조반유리(造反有理)”였다. 반항이나 반발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으로, 수정주의와 반공산주의에 대항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대자보는 베이징 학생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칭화부중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에게 조반유리에 대해 편지를 보냈고, 며칠 뒤 마오쩌둥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바다.”라고 답장했다. 이 답장이 공개되면서 ‘홍위병’은 빛나는 이름이 됐다. 각 학교 학생들은 조직의 이름을 ‘홍위병’으로 통일했다. 조반유리는 홍위병, 나아가 문화대혁명의 구호가 되었다.
  • 1966. 8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백만 홍위병 참석, 보수파 & 조반파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 경축대회>
공산당 중앙위원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을 천명한 지 열흘 뒤인 8월 18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경축 군중대회’가 개최되었다. 《마오쩌둥 주석 어록》을 손에 들고 ‘홍위병’이라고 적힌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 100만 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 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쳤다. 한 여학생이 연단에 올라가 마오쩌둥의 왼쪽 팔에 홍위병 완장을 달아주었다. 이 장면을 본 100만 홍위병은 영웅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렸다.
  • 1966. 9 전국 홍위병 대교류 (66년 말까지 1200만명 베이징 방문)
 중국공산당은 지방의 학교에 통지를 보내 베이징에서 혁명을 보고 학습하도록 권고했다. 교통비와 여행 경비는 국가재정에서 보조했다. 버스와 기차는 초만원을 이루었다. 정원의 두세 배는 기본으로 실어서 선반 위, 통로, 좌석 아래, 화장실 어느 곳이고 사람으로 가득했다. 학생들은 창문을 깨고 올라탔으며 기차나 버스는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기 일쑤였다.
  • 1966. 10 ‘혈통론‘을 반혁명 노선으로 규정, 이후 조반파 주도
홍위병은 이윽고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기 시작했다. 보수파는 홍위병의 초기 활동을 주도한 학생들로, 대부분 당이나 정부 고급간부의 자녀였다. 이들은 반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부모가 다른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자 보수파가 되었다. 조반파에는 농민, 노동자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지식인과 문화 · 예술인뿐만 아니라 당의 간부 및 관료를 공격하는 데 서슴지 않았다. 분열된 홍위병은 서로 자기들이 더 혁명적이라고 주장했다. 갈등은 크고 작은 물리적 충돌을 낳았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이 집단으로 싸움을 벌였다.
  • 1967년 초 노동자 가담
  • 1968 홍위병 해산, 공선대(工人毛泽东思想宣传队) “노동자 계급이 모든 것을 지도한다, 유혈진압, 상산하향(上山下鄕), 계급대오 정리
1968년 7월 27일, 마오쩌둥은 홍위병 조직끼리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던 칭화 대학에 ‘마오쩌둥 사상 선전대’ 수천 명을 파견해 해결하려 했다. 양측의 싸움이 그치지 않자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맹렬히 저항하여 다섯 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를 빚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의 이름으로 보낸 선전대에게마저 홍위병이 무력으로 저항하자 충격을 받았다. 다음 날 그는 홍위병 지도자들을 불러 크게 나무라고 “홍위병의 임무는 끝났다. 이제는 노동자 계급이 지도한다.”라고 선언했다. 이 질책은 문서로 작성되어 전국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무시하고 8월 22일에는 베이징에 있는 영국 공관에 난입해 불을 질렀다. 자칫 인명 피해라도 발생하면 아무리 공산주의 국가라고 하더라도 외교적으로 심각한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 사건 이후 홍위병들의 무기 반납 조치와 함께 노동자들로 구성된 선전대를 1968년 8월 말에 전국 학교에 파견했다. 인민해방군이 이 선전대를 호위했다. 홍위병 사태에 인민해방군이 공식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었다. 무기 반납을 거부하는 홍위병 조직은 군대를 출동시켜 제압했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조치들이 계속되면서 홍위병 활동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급속히 위축되었다.
마오쩌둥이 당을 다시 장악함으로써 홍위병의 역할은 끝났다. 이제 문화대혁명은 당과 정부, 그리고 인민해방군이 진행할 것이었다. 그러면 1000만 명이 훨씬 넘는 홍위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학업을 중단한 홍위병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면 된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시작하면서 대학교 입학생 모집이 금지되어 1000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 도시의 공장에는 그들을 받아줄 일자리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정책이 농촌으로 내려가 일하는 ‘상산하향’ 운동이었다. 마오쩌둥은 홍위병들에게 레이펑이 그랬듯이 인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따라 1968년 겨울,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수백만 홍위병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지방에서 이들은 성가신 존재였고, 도시에서 자란 홍위병들에게 농촌 생활은 고달팠다. 한 용감한 홍위병이 공산주의 탈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썼으나, 무기징역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 농촌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도시로 되돌아오는 젊은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으면서 홍위병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결국 그들은 가해자면서도 피해자였다.

홍위병에 대한 평가

참고자료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천이난, 그린비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하권』, 전리군, 한울아카데미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백승욱, 그린비

『문화 대혁명: 중국인민의 역사 1962~1976(인민 3부작 3)』,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강의 (신해혁명부터 홍콩 반환까지)』, 조관희. 궁리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