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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위병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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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당대 한국의 신문사들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인간혁명에 대해서 기대감을 품었다. 부정적 평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모택동의 실험에 대해서 더욱 기다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중공지도자들의 권력투쟁, 인간성 파괴, 야만적 문명 말살, 정치적 반동, 강제된 개인숭배 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인간의 실험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운동이기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인 감이 있다. 이와 같은 리영희의 문화대혁명 인식은 당대 한국 언론의 문화대혁명 보도가 반공의식에 기초하여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대혁명을 강조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반공의식이라는 선입관을 최대한 버리고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영희는 당대 한국의 신문사들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인간혁명에 대해서 기대감을 품었다. 부정적 평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모택동의 실험에 대해서 더욱 기다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중공지도자들의 권력투쟁, 인간성 파괴, 야만적 문명 말살, 정치적 반동, 강제된 개인숭배 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인간의 실험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운동이기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인 감이 있다. 이와 같은 리영희의 문화대혁명 인식은 당대 한국 언론의 문화대혁명 보도가 반공의식에 기초하여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대혁명을 강조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반공의식이라는 선입관을 최대한 버리고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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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나의 중공연구는 그 체제변혁의 혁명논리와 중국공산당 이론의 실제 적용현상에 집중돼 있었어요. 혁명운동 그 자체가 내 관심사의 초점이었지, 후계자가 누구일 것이냐 등의 문제는 당면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물론 연구가 깊어지면서 당연히 모택동 뒤의 인적 요소도 관심의 대상이 됐지만,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았어. 그런 나의 중공연구에서 내가 남다른 애정과 노력을 모택동에게 쏟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 나는 중국 공산당이 지향하는 미래의 중국사회체제, 중국 인민의 새로운 가치관, 그것을 인민의 생활로 구현할 새로운 사회구조와 정치형태 등에 관한 모택동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실천적 행동양식에 공감했어요. - 리영희, 『리영희 저작집 11』
  
 
===타국의 평가===
 
===타국의 평가===

2019년 6월 26일 (수) 15:54 판

개요

문화대혁명 시기 사회운동에 참여했던 학생들을 지칭한다. 홍위병의 운동은 크게 4단계로 구분된다. 노홍위병 시기, 조반파 홍위병 시기, 반군과 옹군 파벌의 홍위병 시기, 홍위병의 하향 시기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조반파와 홍위병이 꼭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조반파는 조반에 참여했던 노동자, 농민, 의사, 교사, 간부, 학생, 심지어 기관 혹은 일부 군인들까지를 모두 포괄하지만, 홍위병은 그 중에서도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성격에 따른 홍위병 구분

노홍위병

노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의 초기에 주로 활동했던 학생들을 말한다. (학생들을 주체로 삼은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노동자와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되면 생산활동에 큰 난리가 날 것을 모택동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모택동의 신념과 관련있다. 『모택동 문사고적 독서평주집』에서 모택동이 "초당사걸집"을 읽고 나서 쓴 평주를 보면 "3.7론"을 내뱉고 싶은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서 "3.7론"은 청년들이 노인보다 강함을 드러낸다.) 문혁의 '초기 50일' 동안, 류사오치 주도 하에 위로부터 내려온 공작조의 지시를 받아 결성되었다. '사구 타파'와 교사, 문화인을 탄압하고 비판하고 폭행하는 홍위병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집단이다. 소위 노홍위병이란, '홍오류'(집안 출신이 노동자, 중·하·빈농, 혁명 간부, 혁명 군인)의 자제들, 즉 "출신성분이 좋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집단이었다. 주로 고위 간부나 군 간부의 자녀들이었고, 베이징의 홍위병연합행동위원회, 후난의 홍색정권 보위군 홍위병 등이 이 부류에 속했다. 이들은 주로 당권보다는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부류(지식인, 지주 출신)를 주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이들은 혈통론을 만들어서, 현재 정부 관료와 당 간부가 되어 있는 과거 혁명가였던 부모들의 혁명정신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마오쩌둥을 접견했던 백만 홍위병도 기본적으로 이들이다. 초기에 활동해서 후일 조반파에게 비판받는 대상이 되었는데, 때문에 문혁의 '보수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말로는 '보황파'라고도 불린다. 또한 이들은 이후의 '조반파 홍위병'과 구별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노홍위병'으로 불린다.

노홍위병의 등장 및 역사

  • 1964~1965년 사이 북경 중점 중학교인 '4중','6중','8중'에서 고급 간부 자제를 중심으로 한 일부 학생들이 연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고, 중학교육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며 4청운동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468학조'라고 칭했다. 이들은 홍위병 운동의 예행연습으로 볼 수 있다.
  • 1965년 10월 28일 청화대학 부속중학 예비 651반의 간부 자제 낙소해가 '조반정신 만세'라는 제목의 소자보를 붙인다. 이는 문화대혁명 중의 첫 번째 홍위병 대자보의 기초가 된다.
  • 1966년 5월 29일 고급 간부 자제들이 원명원 옛터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학교 당 조직과 공작조의 제약을 받지 않고 스스로 조직하여 이를 '홍위병'이라 명명하고, 그 의미를 '홍색 강산을 보위하는 전사'라고 하기로 결정하였다.
  • 1966년 6월 2일 북경대학 부속중학의 일부 학생이 '홍기전투대'를 조직했다. '홍위병'과 '홍기전투대'는 문혁 중에 가장 먼저 조직된 두 개의 자발적인 홍위병 조직이다. 하지만 그들은 합법적 지위는 승인 받지 못했다.
  • 1966년 6월 24일 청화대학 부속중학 고급 간부 자제들은 수정주의 교육 노선을 비판하고 학생 자신의 조직을 세우겠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1957년 이후 당내에 당이 통제하지 못하는 어떠한 독립적 조직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정때문에 강하게 억압당했다.
  • 1966년 8월 21일 《홍기》 11기에 '프롤레타리아계급 혁명 조반정신 만세'라는 제목의 대자보가 공개 발표되었다. 총 세 편으로 구성되어 '통상 3론'이라고 부른다. 이는 홍위병 조직의 첫 번째 공개적 출현이었고, 홍위병의 '조반'에 대한 외침과 홍위병에 대한 모택동의 공개적지지 소식이 전 중국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반파 홍위병

노홍위병조직을 필두로 하는 '보수파'와 투쟁하고 1967년 1월 '탈권'에 이르기까지 선구적인 역할을 했던 학생들을 말한다. 이들은 혈통 이론을 주장하는 노홍위병과는 다르게 대부분 부모가 빈농과 노동계급 출신으로서, 당 간부가 아닌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낮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 농민가정 출신의 학생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래서 이들을 흑오류(구지주 계급, 구부농 분자, 반혁명 분자, 악질 분자, 우파 분자 등)라고 부르며 홍위병이 될 자격이 없는 출신 성분이 나쁜 부류로 분류되었다. 이들은 주로 대학생과 중고생들이 핵심이었고, 수도삼사, 북항홍기, 상하이 홍혁회, 후난 고사, 쓰촨 815, 후베이 삼신 등의 조직이 있다. 이들은 노홍위병과 달리 출신성분을 중요시 여기지 않았다. 이들은 마오쩌둥을 신격화하며 그의 지시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문화대혁명의 계획을 실행하였다. 이들은 1966년 8월 8일에 당 중앙위원회 회의 끝에 통과된 문혁 16조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노선을 걷는 당내 실권파"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또한 이와 밀접하게 관련하여 4구타파를 두 번째 목적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착취계급은 여전히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관습을 이용하고 있고, 이러한 구사상은 결국 마오쩌둥의 사상에 순응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광장에서 장대한 집회를 개최한 이후 홍위병은 베이징을 비롯하여 여러 도시를 돌며 4구 타파 운동을 벌여 나갔다. 하지만 이들은 연장자들이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더 폭력적이고 무차별적으로 변해간다.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앙문혁소조는 노홍위병이 아닌 조반파 홍위병의 방식을 지지했다. (66년 10월 3일 천보다의 '붉은 깃발'이라는 당 기관지의 논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의 대중 노선을 둘러싼 천보다의 해석은 홍오류흑오류의 말의 의미 자체를 달라지게 하여 거의 모든 홍위병 조직이 갑자기 흑오류 출신들로 채워지게 되었고, 덜 혁명적으로 생각되던 출신 배경을 가진 학생들, 이른바 회오류(지식인과 도시민이 해당) 출신의 학생들이 조반파 홍위병이 되었다.
하지만, 이들도 1967년 '2월 역류'가 시작되며 '반군'과 '옹군' 홍위병으로 분열하였다.

옹군파, 반군파 홍위병

조반파 홍위병들이 분열하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다.
①문화대혁명 운동에 있어서 '노동자 조반파'의 세력이 강대해지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홍위병은 부차적인 위치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핵심적인 지위를 상실하게된 일부 '조반파 홍위병'의 수장들이 이에 항거하며 '노동자 조반파'와 대립하게 된다.
②군대가 개입했다. 중앙에서는 각 지역에 군을 개입시켜 "좌파"를 지원하게 했는데, 누가 "좌파"인지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있지 않았다. 때문에 군은 여러 조반파조직 중에서 누가 "좌파"인지를 스스로 결정해야했고, 이는 조반파 홍위병이 분열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백승욱 교수는『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에서 "양 파는 출신성붕의 다소의 차이, 사회주의 17년의 역사에 대한 평가, 군대의 좌파지지에 대한 태도, 투쟁의 주요 대상, 운동의 방식,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평가 등에서 입장이 대립되었다."라고 하였다.[p.124]

옹군파 홍위병

이때 군에서는 주로 청년학생이 중심이었던 홍위병 조직들을 지원했고, 때문에 많은 조반파 홍위병들은 '옹군파 홍위병'이 되었다. 반면 학생들 중에서는 군이 지원하는 옹군파 조직이 아닌 노동자 조반파 중심의 조직에 끝까지 몸 담는 경우도 있었다.

반군파 홍위병

반군파 홍위병은 군대 자체에 반대하는 조반파라기보다, 자신들을 억압하는 '지방 군구'에 반대하는 조반파였다. 이들은 후에 중앙의 명령을 받들어 조반파를 지지하는 '야전군부대'와 연맹한다. 이 단계에서는 상당한 숫자의 학생 홍위병들이 노동자 조반파 중심의 '반군파' 편에서 안정적인 정국에 반대하는 지속적인 조반을 지지한다.

홍위병 하향시기

1968년 12월 마오쩌둥이 "지식청년들은 농촌으로 내려가 중·하·빈농으로부터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지시한 후부터, 홍위병들은 거의 모두 농촌과 농장으로 동원되어 주요 정치투쟁에서 물러났다. 이들을 '지청'(농촌으로 내려간 지식청년)이라고 부른다.

홍위병 일지로 보는 문화대혁명

  • 1966. 5 칭화대 부속중에서 처음 결성
5월 25일, 칭화대 부속중학교 학생들은 〈해서파관> 사태로 분노를 삭이다가 선배들의 격문을 직접 보게 된다. 이들은 그 자리에서 ‘칭화부중 홍위병’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는 처음으로 탄생한 홍위병이다. 점차 다른 학교에서도 마오쩌둥 주석을 지키고 공산주의 혁명 정신을 계승하자는 조직이 만들어진다.
  • 1966. 6~7월초기 홍위병 주도
6월 24일, 칭화대 부속중학교에는 홍위병 명의로 수정주의와 반공산주의에 대항하겠다는 내용을 담은“조반유리(造反有理)”를 나타내는 대자보를 붙인다. 칭화부중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에게 조반유리에 대해 편지를 보냈고, 며칠 뒤 마오쩌둥은 “열렬한 지지를 보내는 바다.”라고 답장한다. 이 답장이 공개되면서 ‘홍위병’을 각 학교 학생들은 조직의 이름으로 통일한다. 조반유리는 홍위병, 나아가 문화대혁명의 구호가 되었다.
  • 1966. 8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백만 홍위병 참석
공산당 중앙위원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을 천명한 뒤 8월 18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경축 군중대회’가 개최된다. 《마오쩌둥 주석 어록》을 손에 들고 ‘홍위병’이라고 적힌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 100만 명이 참석했고, “문화대혁명 만세”, “마오 주석 만세 만세 만만세!”를 외치며 100만 홍위병은 마오쩌둥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사실에 감격한다.
  • 1966. 9 전국 홍위병 대교류
중국공산당은 지방의 학교에 통지를 보내 베이징에서 혁명을 보고 학습하도록 권고하며, 교통비와 여행 경비는 국가재정에서 보조한다. 베이징을 향해 행진하는 홍위병들의 행렬은 대륙을 휩쓴다. 《마오쩌둥 주석 어록》을 들고 “조반유리”, “마오쩌둥 주석 만세”를 외치며 걷는 홍위병은 공식적으로 11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 1966. 10 ‘혈통론‘을 반혁명 노선으로 규정, 이후 조반파 주도
홍위병은 ‘보수파’와 ‘조반파’로 나뉘기 시작한다. 보수파는 홍위병의 초기 활동을 주도한 학생들로, 대부분 당이나 정부 고급간부의 자녀이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부모가 다른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자 보수파가 된다. 조반파에는 농민, 노동자 출신이 많았기에, 지식인과 문화, 예술인뿐만 아니라 당의 간부 및 관료를 공격을 서슴지 않는다. 분열된 홍위병은 서로 자기들이 더 혁명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이후 마오쩌둥은 조반파의 손을 들어준다.
  • 1968 홍위병 해산, 공선대(工人毛泽东思想宣传队) “노동자 계급이 모든 것을 지도한다", 유혈진압
마오쩌둥은 홍위병 조직끼리 주도권 싸움이 그치지 않자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이 과정에서 홍위병들이 맹렬히 저항하여 다섯 명이 사망하고 700여 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를 빚게 된다. 그러나 홍위병들은 마오쩌둥의 지시를 무시하고 8월 22일에는 베이징에 있는 영국 공관에 난입해, 마오쩌둥은 이 사건 이후 홍위병들의 무기 반납 조치와 함께 노동자들로 구성된 선전대를 1968년 8월 말에 전국 학교에 파견한다. 홍위병 사태에 인민해방군이 공식적으로 개입하는 순간이다. 무기 반납을 거부하는 홍위병 조직은 군대를 출동시켜 제압했고, 마오쩌둥이 당을 다시 장악함으로써 홍위병의 역할은 끝이 난다.

상산하향(上山下鄕), 계급대오 정리

문화대혁명을 시작하면서 대학교 입학생 모집이 금지되어 1000만 명이 넘는 고등학교 졸업생이 진로를 정하지 못했고, 도시의 공장에는 그들을 받아줄 일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온 정책이 농촌으로 내려가 일하는 ‘상산하향’ 운동이다. 이에 따라 1968년 겨울,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수백만 홍위병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다. 농촌에서 쫓겨나거나 스스로 도시로 되돌아오는 젊은이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으면서 홍위병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그들은 가해자면서도 피해자인 것이다.


내가 저지른 짓을 떠올리면 스스로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럽다. 그 수치스러움은 남몰래 개인적인 야망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꼬마 혁명가 노릇을 하면서 나는 온갖 잔인한 파괴 활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당시 나는 “적에 대한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잔인하지 않다.”는 가르침을 그대로 따랐지만, 돌이켜보면 스스로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이는 내 일생에 영원히 치유하지 못할 상처로 남을 것이다.

 
— <홍위병 : 잘못 태어난 마오쩌둥의 아이들>을 쓴 션판의 고백

홍위병에 대한 평가

우리나라

반공의식을 토대로 한 문화대혁명 당시 보도

1966년과 1968년까지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국 언론의 신문보도내용들을 보면 당대 한국 언론들은 중국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죽의 장막에 가려진 중국의 문화대혁명 소식을 접할 수 없었기에 다수의 외신보도에 의존하여 문화대혁명을 보도하였다. 정보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에 대해서 연신 보도한 것은 당시 적성국으로 인식했던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함께 중국의 혼란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 언론들은 정확하지 않은 추측성 보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보도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이 정치적 투쟁과 과격한 군중운동이 있었던 것은 맞으나 한국에서는 실제 이상으로 더욱 과장되어 보도된 측면이 존재하였다. 이러한 자극적인 기사를 통해서 한국인은 문화대혁명에 대하여 중국 공산당 정권 지도자들의 극심한 권력투쟁과 홍위병들로 대표되는 파괴적 행위라는 부정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한번 이렇게 형성된 문화대혁명 인식은 이후 중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하여 분석하는데 있어 한국인에게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였고 이후 중국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그들의 문화대혁명 인식을 대입하였던 것이다.

중공은 금년9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의원연맹(IPU)총회에 한국대표가 참석하는 것을 동의한 소련지도층의 조치를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3일 북경방송이 보도했다. 중공당 국방부 직할부대 및 기관지 인민일보는 소련의 이 같은 결정을 가리켜 소련인민과 월맹인민에 대한 소련수정주의지도층의 또 하나의 큰 배신이라고 규정하였다. - 경향신문,「중공, 소련을 맹비난」
중공은 명백히 초조하다. 요즘.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아래 철없는 청소년을 수십만씩 동원해서 모든 외국인에 욕설을 퍼붓고 다니는 이유. 그리고 모택동을 제 2의 스탈린으로 신격화해서 전 중국을 공포분위기로 뒤덮고 있는 것은 바로 거듭된 실패를 음폐하자는데 있는 까닭이었다. 모택동은 전지전능한 신인데, 어찌 대외전략에 연달아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가. 이런 회의를 중국인민의 입에서 나올 수 없게 7억의 입을 틀어막자는데 문화대혁명 소동의 큰 요인의 하나가 있다. 외부로 뻗어간다는 것은 어차피 틀렸다. 북평정권은 세계의 일체 오염세력에서 중국인민을 격리시켜, 중국대륙을 모택동사상의 고도로 만들어 시간을 벌어 후일을 기하자는 쇄국주의의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동아일보,「횡설수설」 

리영희의 평가

  • 리영희: 경성공립공업학교와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했다. 그후 잠시 고등학교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을 맞아 연락장교로서 7년간의 군복무(육군 소령으로 예편)를 마쳤다. 1957년부터 1971년까지 15년 동안 〈합동통신사〉와 〈조선일보사〉에서 일한 다음 1972년부터 1995년까지 한양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리영희는 당대 한국의 신문사들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모택동의 인간혁명에 대해서 기대감을 품었다. 부정적 평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이 모택동의 실험에 대해서 더욱 기다려야 함을 강조하였다. 중공지도자들의 권력투쟁, 인간성 파괴, 야만적 문명 말살, 정치적 반동, 강제된 개인숭배 등으로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너무나도 큰 인간의 실험이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대운동이기에 역사적으로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에는 아직도 시기상조인 감이 있다. 이와 같은 리영희의 문화대혁명 인식은 당대 한국 언론의 문화대혁명 보도가 반공의식에 기초하여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문화대혁명을 강조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반공의식이라는 선입관을 최대한 버리고 접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나의 중공연구는 그 체제변혁의 혁명논리와 중국공산당 이론의 실제 적용현상에 집중돼 있었어요. 혁명운동 그 자체가 내 관심사의 초점이었지, 후계자가 누구일 것이냐 등의 문제는 당면 관심사가 아니었어요. 물론 연구가 깊어지면서 당연히 모택동 뒤의 인적 요소도 관심의 대상이 됐지만, 적어도 초기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았어. 그런 나의 중공연구에서 내가 남다른 애정과 노력을 모택동에게 쏟았던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지. 나는 중국 공산당이 지향하는 미래의 중국사회체제, 중국 인민의 새로운 가치관, 그것을 인민의 생활로 구현할 새로운 사회구조와 정치형태 등에 관한 모택동의 사상과 철학, 그리고 실천적 행동양식에 공감했어요. - 리영희, 『리영희 저작집 11』

타국의 평가

문혁을 ‘탈권투쟁’이라 규정하고 이를 실행한 마오쩌둥과 쟝칭 일파는 ‘헬리콥터’ 식으로 최고권력의 위치에 부상하기는 했으나, 최후에는 어쩔 수 없이 의기양양한 린뱌오 일파의 대두를 용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무수한 동료를 잃은 ‘실권파’ 및 지식인, 문화인들의 공포와 비분은 말할 것도 없다. 후에 정확히 밝혀진 공식 통계에서는 70여만 명이 박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 대개가 이 부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대중 특히 청소년의 경우 열광적으로 마오쩌둥을 찬미하고 그에게 이용당했으나 남은 결과는 정치에 대한 불신과 상호 불신, 증오, 공포, 부모나 친구의 죽음에 의한 비탄뿐이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의 불만과 불신, 그리고 불안이 문혁을 종결시키지 못하고, ‘동란’을 5년이 아니라 10년으로까지 끌고 간 정치경제적 요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히메다 미츠요시(姬田光義) 외, 『중국근현대사』

참고자료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천이난, 그린비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모리스 마이스너, 이산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 하권』, 전리군, 한울아카데미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 백승욱, 그린비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 백승욱, 살림출판사

『문화 대혁명: 중국인민의 역사 1962~1976(인민 3부작 3)』,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강의 (신해혁명부터 홍콩 반환까지)』, 조관희, 궁리출판

냉전시기 한국 언론의 문화대혁명 인식, 서종욱,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당대 한국의 '문화대혁명' 인식, 박지영, 강원대학교 교육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