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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방은 모두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되었던 中共의 文化大革命을 주도했고 文革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던 文革派의 주도세력들이다. 이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지 1개월만인 1976년 10월 화궈펑에 의해 체포되었다. 中共 당국은 이들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등 면밀한 예비조사를 한 후, 1980년 11월 6일 이들을 정식 기소했다. 4인방의 죄상은 정부전복 및 국가분열 음모, 무장반란책동, 반혁명집단 조직지도, 반혁명선전선동 및 무고 등 모두 48개 죄목에 달했다. 중공 당국은 이 재판을 위해 江華 최고인민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35명의 특별재판부를 구성, 12월 20일부터 거의 매일처럼 피고들에 대한 심리를 계속했다. 사인방은 민간법정인 제1법정에서 심리가 진행되었으며, 12월 29일 특별법정은 장칭에게 사형을 구형함으로써 피고들에 대한 사실심리를 종결했다.
 
4인방은 모두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되었던 中共의 文化大革命을 주도했고 文革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던 文革派의 주도세력들이다. 이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지 1개월만인 1976년 10월 화궈펑에 의해 체포되었다. 中共 당국은 이들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등 면밀한 예비조사를 한 후, 1980년 11월 6일 이들을 정식 기소했다. 4인방의 죄상은 정부전복 및 국가분열 음모, 무장반란책동, 반혁명집단 조직지도, 반혁명선전선동 및 무고 등 모두 48개 죄목에 달했다. 중공 당국은 이 재판을 위해 江華 최고인민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35명의 특별재판부를 구성, 12월 20일부터 거의 매일처럼 피고들에 대한 심리를 계속했다. 사인방은 민간법정인 제1법정에서 심리가 진행되었으며, 12월 29일 특별법정은 장칭에게 사형을 구형함으로써 피고들에 대한 사실심리를 종결했다.
<br>전국에서 선발된 800여 명의 인민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재판광경은 TV우주중계를 통해 중공전역과 전세계로 방영되었으나 외국기자들의 참관은 금지되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왕훙원(王洪文), 야오원위안(姚文元) 및 대부분의 피고들은 기소장에 나타난 자신들의 범죄를 모두 시인하고 관용을 호소했으나 장칭은 자신이 文革 기간 동안 행한 모든 행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장춘챠오(張春橋)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중공의 언론은 '린뱌오·장칭반혁명집단'의 죄상을 비난하여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일제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北京과 上海 등지에서 장칭 등의 처형을 주장하는 인민데모가 속출했다. 이즈음 화궈펑은 12월 27일을 마지막으로 실각되었다. 이후 1월 25일 선고공판이 제정되었다. 江華 특별재판장은 장칭<ref>1983년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가택에 연금되었으나, 1991년 집에서 자살하여 생을 마감하였다.</ref>과 장춘차오<ref>1983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1998년 신병치료를 위해 교도소를 나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사망했다.</ref>에게 2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왕훙원<ref>1986년 이후 병으로입원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ref>은 무기징역, 야오원위안<ref>1996년 10월 만기 출소하였으며, 2005년 12월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ref>은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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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전국에서 선발된 800여 명의 인민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재판광경은 TV우주중계를 통해 중공전역과 전세계로 방영되었으나 외국기자들의 참관은 금지되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왕훙원(王洪文), 야오원위안(姚文元) 및 대부분의 피고들은 기소장에 나타난 자신들의 범죄를 모두 시인하고 관용을 호소했으나 장칭은 자신이 文革 기간 동안 행한 모든 행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장춘챠오(張春橋)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중공의 언론은 '린뱌오·장칭반혁명집단'의 죄상을 비난하여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일제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北京과 上海 등지에서 장칭 등의 처형을 주장하는 인민데모가 속출했다. 이즈음 화궈펑은 12월 27일을 마지막으로 실각되었다. 이후 1월 25일 선고공판이 제정되었다. 江華 특별재판장은 장칭<ref>1983년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가택에 연금되었으나, 1991년 집에서 자살하여 생을 마감하였다.</ref>과 장춘차오<ref>1983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1998년 신병치료를 위해 교도소를 나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사망했다.</ref>에게 2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왕훙원<ref>1986년 이후 병으로입원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ref>은 무기징역, 야오원위안<ref>1996년 10월 만기 출소하였으며, 2005년 12월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ref>은 징역 20년을 선고했다.<ref>중공 4인방 재판과 내부적 갈등, 박영철, 1981.</ref>
  
 
====진리 투쟁 논쟁(제1차 사상해방 논쟁)====
 
====진리 투쟁 논쟁(제1차 사상해방 논쟁)====

2019년 6월 6일 (목) 23:02 판

화궈펑(華國鋒)

출생 1921년 2월 16일
산서성(山西省) 자오청(交城县)
사망 2008년 8월 20일(87세)
경력 국무원 총리(2대) 1974년 2월 2일 ~ 1980년 8월 20일,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2대) 1974년 4월 7일 ~ 1981년 6월 28일
직업 군인, 정치가

요약

1976년 마오쩌둥 사후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된 화궈펑(華國鋒)은 짧은 통치 기간으로 인하여 과도기적 지도자로 불렸다.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가지고 있던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뿐만 아니라 국무원 총리까지 겸직하였기 때문에 공식적 직위로 보았을 때는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상 어느 누구보다도 강력한 지도자였다. 더구나 당시에는 중국에서 지도자의 종신제가 유지되었다. 화궈펑은 이러한 이점을 활용하여 마오쩌둥 사후 발생한 문화대혁명 4인방과의 권력투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였으며, 마오쩌둥의 후계자라는 점을 활용하여 지지세력을 확보하기도 했다. 화궈펑은 자신이 문혁 시기 급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이 지명한 계승자라는 점에서 문혁의 수혜자이자 계승자였으나 동시에 사인방의 감금을 통해 문혁을 끝낸 문혁의 종결자였다.[1] 그렇기에 화궈펑은 이후 ‘마오쩌둥의 결정과 지시가 모두 옳다’는 이른바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을 내세워 문화대혁명을 옹호하며 덩샤오핑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은 문화대혁명 이후 해방된 간부, 군 원로 및 지방의 군 실력자 등 복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직접적인 대결은 필연적 결과였다. 덩샤오핑은 이에 대해 실사구시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들의 일련의 대립은 '진리투쟁토론'이라고 불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궈펑은 무리한 신약진정책을 추진하였고 투자 대비 최악의 결과를 낳은 1978년의 경제 실적에 따라 전면적인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대로 덩샤오핑은 실사구시에 입각한 현대화 과제를 제기하며 지지세력을 확산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1980년 제11기 3중전회를 기점으로 화궈펑은 1980년 국무원 총리직, 1981년에는 당 중앙 주석직과 중앙군사위 주석직에서 사임하였다.[2] 총리직은 자오쯔양, 당 주석직은 후야오방,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덩샤오핑이 각각 승계하였다. 화궈펑은 이후 1992년 중국 공산당 대표, 중국 공산당 중앙당학교 교장, 중국 공산당 군사위원회 주석을 역임하는 등 당에서 활동을 이어갔지만, 이전과 같은 위치를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생애

집권 이전

건국 이전

화궈펑은 산서성 교성현 출신이며 1920년생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에 혁명에 참가하여 산서성 綏遠의 中共黨 根據地인 晋綏에서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많은 군사작전에 참여하여 무장공작대와 민병조직을 통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중공당의 정규군을 도왔다. 뤄양(呂梁)의 싸움이나 타이위안(太原)의 싸움에도 참가했으며, 연대의 정치위원을 역임해 胡宗南이 되었고 閭錫山의 군대와도 싸웠다. 화궈펑은 교성현 당위원회를 주재하면서 한편으로는 지방의 행정관리에도 손을 댔다. 1947년 10월 중공당은 中共土地法大綱을 공포하여 화북과 진수에서 토지개혁 운동을 전개하고 그 뒤 당 조직 재건을 획책했다. 또한 교성현에서 토지개혁 운동을 지도하고 몰수한 지주의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함과 동시에 교성현 당 조직의 재건을 추진해 나갔다.

공산당 생활

1949년 여름, 그는 華北老解放區南下工作團에 참가하여 호남성으로 갔다. 초대 湘陰縣 唐書記 겸 人民武裝部 政治委員을 역임했다. 또 당시 연대의 정치위원이라는 직책도 맡았다고 생각된다. 湘陰縣은 洞庭湖地區, 즉 浜湖區에 속해 있다. 浜湖區는 호남성의 토지개혁 중심지구로 지정되었다.中共黨 호남성위원회 政策硏究室에서는 상은현 和豊鄕을 浜湖區의 모델로 해서 농촌의 토지 소유 관계를 조사했는데, 그에 따른 모든 조사보고서는 화궈펑의 협력을 근간으로 해서 정리되었다. 이것이 湖南省에 있어서의 그의 현지조사 활동의 시초였다. 상음현에서의 2년간 화궈펑은 토지개혁을 진행하였는데, ‘계급의 적을 제거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지주들에게 통렬한 타격을 가했다. 1951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화궈펑은 湘漂縣 黨서기로 있었던 2년여 동안 湖南의 ‘농업합작화운동’은 아직 ‘相助組’의 단계였다. 화궈펑은 相助組에 전력을 기울임과 동시에 ‘반혁명제거운동’, ‘계급의 적은 제거한다’는 中共黨의 정책을 철저히 행하여 周小舟(1953년부터 湖南省의 黨서기로 근무)에게 인정을 받아 누구보다도 빨리 지방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다. 그는 1954년 초부터 1963년까지 12년간 湘潭地區委員會 서기로 있었는데 1957년까지는 專任이었고 그후로는 겸임이었다.


湘潭地區는 湖南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북부의 몇 개 縣은 洞庭湖 평야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 湖南省의 중요한 농산지였다. 湘陰縣 이남도 농업이 주된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에 ‘農業合作化運動’의 추진이 가장 긴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되었다. 화궈펑이 黨專任 서기로서 黨위원회를 주재한 3년동안(1954~1956)은 중공의 농업합작화운동의 격변기었다. 1953년은 중공이 제1차 5개년계획을 시작하는 해로써 과도기의 총노선을 농업합작화운동에 집약시켰으며 그중에서도 농업의 사회주의적 改造의 실현을 모토로 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中共黨 中央委가 ‘농업생산합작사의 발전에 관한 결의’를 발표했고 다음 해에는 相助組를 병합하여 초급농업합작사를 조직했다.


1955년 2월 화궈펑은 湘陰縣 洞庭園에 湘潭地區委員會 工作組를 파견하여 湖南省에서 최초로 고급 농업생산합작사를 설립시켰다. 1956년까지에는 고급 농업합작사에는 아직 실험단계로써 숫자상으로는 적은 편이었다. 화궈펑은 타지방 간부들처럼 초급 농업합작사의 설립에 역점을 두었고 그 설립 템포는 상당히 빨랐다. 1953년 湘潭地區에는 75개의 농업생산합작사밖에 없었지만 1954년 겨울부터 1955년 초에 걸쳐 4,500개社 이상으로 확대되었고 55년 가을에는 이미 6,400으로 늘어났다. 1955년 마오쩌둥을 중심으로 편집된 ‘중공농촌에서의 사회주의 提高’라는 논문집 3권이 출판되었다. 이 책에는 湖南省 관계의 조사보고 6편이 수록되었는데 그 가운데 4편은 湘潭地區 간부들이 쓴 것이며, 또 하나는 中共黨 中央書記處 湖南工作組에 의해 쓰여진 湘潭地區와 長沙縣 및 寧鄕縣에 관한 조사보고서였다. 6편의 조사보고서 가운데 湘潭縣에 관한 것이 5편이나 차지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湘潭地區의 간부들이 쓴 4편의 조사보고 가운데 3편은 화궈펑에 의해 정리되었던 것이며, 이들 보고서에는 한결같이 마오쩌둥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중국 농촌에서의 사회주의 提高’가 정식으로 출판되기 이전에 중앙당 발행잡지 <學習>은 1955년 12월호에 농업합작화 특집으로 마오쩌둥의 ‘농업합작에 관한 諸문제’ 및 中央黨의 관계자료와 3편의 地區黨 書記 조사보고를 수록했다. 이 3편의 조사보고는 中共黨 山東省 膠州地張釣 및 화궈펑이었다. 화궈펑의 조사보고는 ‘농촌 각계층의 동향을 충분히 연구하자’라는 題下에 농촌합작화운동으로 貧農들의 곤란한 현실을 타개하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中農에 의지하여 農業合作社를 설립하는 방법을 비판함과 아울러 일부 간부들의 ‘자본주의적 타락 경향’을 비난했다. 이때부터 마오쩌둥이 3인의 地區委 書記를 농촌합작화운동의 모범적 인물로 삼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1957년부터 화궈펑은 湖南省의 黨과 정부기관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루산회의(1959년 9월)까지는 湖南省黨委員會 書記 후보, 湖南省文敎辨公室 主任 및 과학공작위원회 副主任을 역임하여 湖南省의 문화교육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文敎辨公室은 문화국·교육청·위생청 및 제육운동위원회를 총괄하고 있었던 관계로 화궈펑의 역량은 위의 각 부문에 미치고 있었다. 화궈펑이 호남성의 省 레벨의 기관에 부임한 것은 바로 마오쩌둥이 '반우파운동', 즉 지식인에 대한 대규모적인 숙청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때였다. 화궈펑은 중앙당의 정책을 철저히 실행하여 湖南師節學院·湖南醫學院·中南鑛山治金學院 및 文藝科學 부문에서 적극적으로 '반우파운동'을 전개했다.[3]

마오쩌둥의 후계자

湘潭縣 韶出沖은 마오쩌둥의 고향이었던 만큼 위와 같은 화궈펑의 성공적인 업적은 마오쩌둥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화궈펑이 출세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화궈펑이 마오쩌둥을 직접 만난 것은 1959년 6월 마오쩌둥의 첫 고향방문 때였는데, 당시 그는 샤오산이 속한 샹탄현 제1서기였다. 마오쩌둥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는 <마오쩌둥의 사생>에서 화궈펑과의 첫 대면장면을 기록해 놓았다.

… 샹탄현 당 지방위원회 제1서기인 화궈펑이 주석 일행을 맞이했다. 내가 18년 후에 마오의 후계자가 될 그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상탄에서 화궈펑과 이야기하며 잠시 쉬었다. 그러나 그는 샤오산에는 동행하지 않았다. 마오는 샤오산의 농부들이 그가 근처에 있으면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했던 것이다.

 
— 서명선, 후난 마오로드

화궈펑 본인이나 마오쩌둥은 물론 누구도 그가 마오쩌둥 사후 마오의 정치적 위상을 이어받게 될 후계자가 되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당시 화궈펑의 나이는 38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이 화궈펑을 본격적으로 중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권력기반을 잃을 수도 있었던 1962년 ‘7천인대회’ 직후였다. 이 회의에서 화궈펑은 “1958~1960년의 위대한 과업수행 이후 인민들은 야위었고 가축도 야위었으며 심지어는 땅조차 메말라 버렸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위대한 과업을 시행할 수 없다. 농촌 지역이 이러한 어려움을 이기고자 한다면 사회주의의 길로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며, 호별 농업경작제와 농지청부제도는 과감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엔 모두를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다.” 라면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에 대한 지지입장을 표명했다. 마오쩌둥은 이때부터 “화궈펑은 정직한 사람이다. 국가의 다른 많은 지도자보다 훌륭한 사람이지!”라며 챙기기 시작했다. 7천인대회 직후 후난성 당서기였던 저우샤오저우와 주변 세력들이 숙청되자 화궈펑은 후난성 당위원회 상무서기로 승격했다. 마오의 직접 지시에 따른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그의 업무는 후난성의 행정업무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다. 화궈펑은 샤오산의 마오쩌둥 기념관 건설을 총지휘했고, 샤오산 지역의 철도와 수로 공정 등 대형건설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추진, 마오의 환심을 샀다. 문화대혁명 기간인 1968년 후난성 혁명위원회가 출범하자 제2부주임이 되었고, 1969년 당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문혁 이후 1969년 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0년 후난 성 제1서기가 되었다.[4]
화궈펑에게 후계자로서의 본격적인 기회가 주어진 것은 린뱌오 사건으로 인한 것이었다. 문혁 이후 마오쩌둥의 새로운 후계자가 된 린뱌오가 쿠데타 음모를 꾸미다 실패한 후 소련으로 망명하다 몽골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사건으로, 중국에서 공식 발표한 린뱌오 사건은 마오쩌둥의 후계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다. 린뱌오 사건 후 한편으로는 문혁 시기 숙청되었던 덩샤오핑 등 원로 간부들을 복귀시켰을 뿐만 아니라 왕홍원, 화궈펑, 우더 등 젊은 간부들을 예비 후계자군으로 선발하여 시험을 하였다. 마오쩌둥은 1973년 중국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 이후 왕홍원을, 그리고 1975년에는 덩샤오핑을 각각 자신의 후계자로 시험하였지만 전자는 능력문제로 후자는 노선문제로 탈락하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마오쩌둥에게 선택된 것이 화궈펑이었다. 저우언라이 총리의 추도회가 끝난 지 6일이 지난 1976년 1월 21일, 마오쩌둥은 조카인 마오위안신(毛遠新)에게 저우언라이 후임으로 장춘차오와 화궈펑 중에서 누가 더 나을 것인지를 물었다. 조카는 장춘차오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화궈펑에 대해서는 충실하고 정이 두터우며 매우 성실하다고 조언했다. 이에 마오쩌둥도 "화궈펑이 멋은 없지만 소박하고 진실된 데다 묵직하다."는 말로 조카의 평판에 동의하면서 화궈펑을 선택했다. 이에 화궈펑은 베이징으로 상경, 국무원 공작조 부조장, 조장을 맡아 린뱌오 사건을 처리했다. 그는 1972년 공안부장으로 승진, 중국의 공안과 정부망을 총괄하는 역할을 했고, 1973년 중앙정치국 위원이 되면서 공안부장을 겸했고, 1975년에는 국무원 부총리로 고속출세의 길을 달렸다. 저우언라이 사망 후인 1976년 2월 국무원 총리가 되었으며 천안문 사건 직후인 1976년 4월 당의 제1부주석이 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2인자이자 마오쩌둥의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5]

집권과 실각

1976년 9월 9일 중국의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마오쩌둥의 유지를 이어받은 후계자 화궈펑은 장칭(江靑) 등 4인방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장칭은 상하이 등을 중심으로 민병대 조직을 준비시키는 등 양 세력 간의 일촉즉발의 권력 쟁탈전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권력갈등은 10월 6일 화궈펑과 예졘잉(葉劍英), 왕동싱(汪东兴)등이 궁정쿠데타인 화이런탕(懷仁堂)사변을 통하여 문화대혁명의 주도세력인 사인방을 구금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동시에 그날 밤 예졘잉의 집에서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화궈펑이 당 주석과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함으로써 화궈펑으로의 승계가 완료되었다. 화궈펑은 1977년 8월 제11차 전국대표회의에서 당 총서기 자리에 오르면서 "계급투쟁이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한 요소를 구성하고 있으며, 최초의 문화대혁명은 종식되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 혁명을 지속시켜야 한다."라는 말을 통해 10년 동안 지속된 문화대혁명의 종결을 공식 선언하는 동시에 자신이 毛思想·毛路線의 계승자임을 강조했다.[6][7]

4인방 숙청

4인방은 모두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되었던 中共의 文化大革命을 주도했고 文革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던 文革派의 주도세력들이다. 이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지 1개월만인 1976년 10월 화궈펑에 의해 체포되었다. 中共 당국은 이들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는 등 면밀한 예비조사를 한 후, 1980년 11월 6일 이들을 정식 기소했다. 4인방의 죄상은 정부전복 및 국가분열 음모, 무장반란책동, 반혁명집단 조직지도, 반혁명선전선동 및 무고 등 모두 48개 죄목에 달했다. 중공 당국은 이 재판을 위해 江華 최고인민법원장을 재판장으로 하는 35명의 특별재판부를 구성, 12월 20일부터 거의 매일처럼 피고들에 대한 심리를 계속했다. 사인방은 민간법정인 제1법정에서 심리가 진행되었으며, 12월 29일 특별법정은 장칭에게 사형을 구형함으로써 피고들에 대한 사실심리를 종결했다.
전국에서 선발된 800여 명의 인민대표가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재판광경은 TV우주중계를 통해 중공전역과 전세계로 방영되었으나 외국기자들의 참관은 금지되었다. 심리가 진행되는 동안 왕훙원(王洪文), 야오원위안(姚文元) 및 대부분의 피고들은 기소장에 나타난 자신들의 범죄를 모두 시인하고 관용을 호소했으나 장칭은 자신이 文革 기간 동안 행한 모든 행동은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장춘챠오(張春橋)는 시종일관 침묵을 지켰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중공의 언론은 '린뱌오·장칭반혁명집단'의 죄상을 비난하여 이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일제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北京과 上海 등지에서 장칭 등의 처형을 주장하는 인민데모가 속출했다. 이즈음 화궈펑은 12월 27일을 마지막으로 실각되었다. 이후 1월 25일 선고공판이 제정되었다. 江華 특별재판장은 장칭[8]과 장춘차오[9]에게 2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왕훙원[10]은 무기징역, 야오원위안[11]은 징역 20년을 선고했다.[12]

진리 투쟁 논쟁(제1차 사상해방 논쟁)

'진리표준' 문제를 두고 발생했던 논쟁을 진리투쟁논쟁 혹은 제1차 사상해방 논쟁이라고 한다.


마오쩌둥 사후 개화된 중공당 11중전회(1977.8)에서 수립된 화궈펑·예졘잉·덩샤오핑 체제는 四個現代化計劃 추구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이데올로기와 권력을 포함하는 정치·경제적 문제에 있어서는 분열되었고 이는 화궈펑파와 덩샤오핑파의 대립으로 집약되었다. 이들은 각기 표방하는 이념·정책노선에 따라 각각 범시파(凡是派)[13]와 개혁파(改革派)[14]라 지칭된다.[15]

범시파와 개혁파.PNG


이후 덩샤오핑 노선 지지자들이 1978년 5월 이후 신문과 잡지 등을 통해 진리의 표준 문제에 대한 논쟁을 잇따라 실으면서 화궈펑의 양개범시론(兩個凡是論)[16]에 대한 집중 포화가 시작됐다. 1978년 5월 11일 난징대학 교수인 후푸빙(胡福明)이 기초한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實踐是檢證眞理的唯一標準)'이라는 논문이 중앙당교의 내부 간행물에 실렸고, 이를 계기로 전국에 진리기준 논쟁이 확산되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덩샤오핑도 이 논쟁에 뛰어들어 힘을 보탰다. 덩샤오핑은 "마오쩌둥도 1977년 5월에 스스로 과오를 범했다고 시인하면서 '한 사람이 일생 중 30% 과오를 저지르고 70%는 옳았으면 괜찮은 편'이라고 말했다."며 교조적으로 양개범시에 매달린 화궈펑 노선을 정면 비판했다. 그는 이어서 1978년 6월에는 전군 정치 공작회의에서 "실사구시야 말로 실제에서 출발해 이론과 실천이 부합해야 하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어떻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라고 부르겠느냐"고 역설하며 실천이 곧 진리검증의 기준이라는 주장에 다시 한 번 무게를 실어주었다.[17] 당 내외 정세는 여론의 지지를 받은 덩샤오핑의 우세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18]
이후 중공은 국가전도에 관한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새로운 全會 개최 필요성을 느꼈고, 이를 위해 사전 중앙공작회의가 열렸다. 이 공작회의는 바로 11기 3중전회의 기초를 다진 중요한 회의가 되었다.[19] 12월 13일, 중앙공작회의 폐막식에서 덩사오핑이 당 중앙을 대표해서 <사상해방, 두뇌사고, 실사구시, 일치단결해서 앞을 바라보자(解放思想, 開動腦筋, 實事求是, 團結一致向前看)>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20] 최종적으로 이 논쟁은 1978년 11차 전국대표대회 3중전회에서 화궈펑을 비롯한 범시파들의 실각과 함께 종료되었다.


결과적으로 '진리표준' 논쟁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끄는 신호탄이 되었고, 이후 덩샤오핑은 여러 연설에서 "이 평론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한다."고 강조하며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이끌었다. '양개범시'를 가장 먼저 반대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논쟁이 많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1977년 북경 서산에서 덩샤오핑이 가장 먼저 반대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1989년 11월 6일,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 주석과의 대화에서 이에 대해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3중전회 이전의 중앙공작회의에서는 '양개범시'에 대한 변론이 전개되었다. 3중전회 이전의 당내에서는 '양개범시'에 대한 의견이 있었는데, 1977년 2월 서산에서 '양개범시'의 주장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였고,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고 마오쩌둥사상도 아니라고 여겼다.

 
— 공봉진, 중국 '사상해방(思想解放)' 논쟁에 관한 연구

이는 1980년 11월 19일, 호요방이 중앙정치국회의석상에서 "1977년 2월 덩샤오핑 동지는 많은 동지의 주장을 공개적으로 찬성하였다. '양개범시'가 옳지 않다고 지적하였으며, 이것은 광범위하게 전해졌다. 우리 당의 사상해방의 선도가 되었다. 사상해방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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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각

화궈펑의 실각은 1980년 11월부터 12월까지 9차에 걸쳐 개최된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결정되었지만, 화궈펑의 실각 문제가 최초로 제기된 것은 1980년 8월의 정치국확대 회의였다. 1980년 정치국확대 회의는 「당과 국가 영도제도의 개혁」이라는 정치개혁에 대한 덩샤오핑의 저명한 연설이 행해진 회의이기도 하다. 덩샤오핑은 이 연설에서 화궈펑이 더 이상 국무총리를 겸직하지 않고 리센니엔, 천윈, 쉬샹첸, 완전 등은 부총리를 겸직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덩샤오핑의 연설은 직접적으로는 정치개혁의 일환으로 과도한 겸직을 막기 위한 것과 관련되지만 사실상 이때부터 화궈펑의 실각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22] 1978년 12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3차 전체회의)는 형식적으로 화궈펑이 회의를 주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덩샤오핑을 비롯한 개혁세력들이 사실상 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후였기에 사실상 덩샤오핑의 정치적 승리를 단언해주는 회의였다고 볼 수 있다.[23] 이때 실무파는 '양개범시론' 방침을 비판하면서도 진리표준 문제에 관한 토론을 높이 평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4인방'에 대한 비판운동이 끝났음을 확정하였고, '계급투쟁을 강령으로 한다(以階級鬪爭爲綱)', '무산계급전정하의 계속혁명(無産階級專政下繼續革命)'과 같은 구호 사용을 중지시킴으로써 마오쩌둥의 좌경노선과 결별할 것을 명확히 하고 당과 국가의 중심 공작을 근대화 건설로 옮겨간다고 천명했다.[24] 이러한 11차 3중전회는 '중국의 운명을 바꾼 회의'로 기록되었다. 즉, 개혁개방의 출발점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계획경제시기와 시장경제도입시기를 구분짓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당의 업무와 중심을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조기완성으로 전환시켰다. 또한 핵심측근인 천윈(陳雲)을 중공중앙부주석, 정치국위원 및 상무위원에, 덩잉차오(鄧穎超), 후야오방(胡耀邦), 왕진(王震)을 정치국위원으로 보강하였으며, 펑더화이를 복권하였다.[25]

평가:실각의 원인

중국 공산당의 공식 입장

중국공산당은 화궈펑이 마르크스 주의에 위배되는 양개범시를 견지하고 개인 숭배를 하였으며, 경제 문제에서 좌경적 구호를 제기하여 국가 경제의 손실과 곤란을 초래하였으며[26], 중앙의 주석으로서 필요한 정치 능력과 조직 능력이 부족하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각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화궈펑 승계의 모순

화궈펑 승계 정당성의 두 가지 원천의 모순으로 인해 화궈펑이 실각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화궈펑의 승계는 마오쩌둥이 선택한 결과였다. 다시 말해서 절대 권력자 마오쩌둥의 권위가 화궈펑 승계 정당성의 제일의 원천이었다. 그와 동시에 화궈펑은 사인방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승계를 완성했다. 그런데 사인방은 문혁의 주도자였으며 문혁은 마오쩌둥의 필생의 사업이었다. 화궈펑은 자신이 문혁 시기 급성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이 지명한 계승자라는 점에서 문혁의 수혜자이자 계승자였으나 동시에 사인방의 감금을 통해 문혁을 끝낸 문혁의 종결자였다. 마오쩌둥의 계승자로서 자신의 정당성의 원천인 마오쩌둥을 옹호해야 했으며 그것을 위하여 ‘양개범시’를 주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문혁의 종결자로서 문혁을, 따라서 그것의 최종적인 책임자인 마오쩌둥을 부정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모리스 마이스너의 표현대로 마오주의의 유산은 화궈펑에게는 그것을 유지하고도 존속할 수 없고 그것을 버리고도 존속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던 것이다.[27] 그 결과가 문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전제로서 ‘양개범시’를 부정하는 진리표준토론이었다. 진리표준토론의 결과 중앙공작회의와 11기 3중전회의에서 화궈펑 자신이 자아비판을 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권력 기반의 중요한 축의 하나였던 문혁 기간 중에 성장한 소위 ‘양개범시’를 주창한 범시파들이 실각하였던 것이다.

능력의 한계 및 도전세력의 존재

화궈펑은 개인적 능력에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도전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실각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강한 도전 세력이란 문혁 중에 실각되거나 숙청당한 원로 간부들을 칭한다. 덩샤오핑이 복권될 경우 화궈펑의 권력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신이 덩샤오핑의 복권을 막았다고 한 왕동싱의 말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소위 문혁 피해자 원로 간부세력들은 화궈펑 체제에 대한 강력한 잠재적인 도전 세력이었다. 그들은 혁명과 국가 건설 과정에서 화궈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경력을 쌓았으며 넓은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문제는 문혁의 종결자로서 화궈펑이 이들의 복권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화궈펑 체제를 형성했던 권력 기반은 크게 두 축으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하나는 화궈펑과 같이 문혁 시기에 승진한 문혁 수혜자 세력이었다. 이들은 문혁 이전에는 대체로 중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성급간부였지만 문혁 시기 최고지도부에 진입한 세력이다. 이들이 대체로 ‘양개범시’를 옹호한 범시파라고 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진리표준의 결과 실각이 시작되었다. 다른 한 세력은 예젠잉, 린센니엔 등을 위시한 원로 간부 세력이었다. 이들은 예젠잉의 자아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 "자신이 봉건적인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화궈펑에 대해 제갈량이 후주를 섬기듯 했다". 마오쩌둥에 대한 충성을 그가 지명한 후계자에게 지속한 경우였다. 그런데 이들은 한편으로는 화궈펑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혁 피해자 세력과는 혁명 시기 생사를 같이 한 동료였다는 점에서 그들과 적극적으로 대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외려 복권을 응원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화궈펑 체제의 한 축이기는 했지만 화궈펑의 잠재적 도전자들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할 필요성도 의지도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력의 중심이 11기 3중전회 이후 점차 문혁 피해자 원로 간부 세력으로 이전해 가며 화궈펑 체제는 점진적으로 붕괴해 갔던 것이다.

참고자료

서적

1. 중국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리더십, 이승익, 2011.
2. 후난 마오로드, 서명선, 2015.

논문

1. 모호한 전환점, 안치영, 2008.
2. 중공의 정치현실과 화국봉 노선, 황현봉, 1977.
3. 중국공산당의 범시파와 개혁파의 노선비교, 전병곤, 1990.
4. 중국공산당 3중전회(全會) 성격 고찰 -11기 3중전회(全會) 이후 집단지도체제 교체기의 3중전회(全會)를 중심으로-, 최경식, 2015.
5. 중국 '사상해방' 논쟁에 관한 연구, 공봉진, 2009.
6. 중국 화궈펑과 소련 흐루시초프를 보자, 이동훈, 2012.
7. 화국봉의 숨겨진 이력, 정망, 1997.
8. 화궈펑 체제의 승계와 실각을 통해 본 김정은 체제의 딜레마, 안치영, 2012.

각주

  1. 화궈펑 체제의 승계와 실각을 통해 본 김정은 체제의 딜레마, 안치영, 2012.
  2. 중국 화궈펑과 소련 흐루시초프를 보자, 이동훈, 2012.
  3. 화국봉의 숨겨진 이력, 정망, 1997.
  4. 후난 마오로드, 서명선, 2015.
  5. 앞의 논문, 안치영, 2012.
  6. 1977년 2월 7일자 인민일보·홍기·해방군보 등의 사설 <學好文件抓住綱>에서 마오쩌둥노선을 따를 것을 강조하며 마오쩌둥의 이념과 노선의 추구를 표방하기도 했다.
  7. 앞의 논문, 서명선, 2015.
  8. 1983년 무기형으로 감형되어 가택에 연금되었으나, 1991년 집에서 자살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9. 1983년 무기형으로 감형되었고, 1998년 신병치료를 위해 교도소를 나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사망했다.
  10. 1986년 이후 병으로입원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11. 1996년 10월 만기 출소하였으며, 2005년 12월 지병인 당뇨병으로 사망하였다.
  12. 중공 4인방 재판과 내부적 갈등, 박영철, 1981.
  13. 범시란 화궈펑의 범시, 즉 “凡是毛主席作出的決策, 我們都堅決維謢, 凡是毛主席的指示, 我們都始終不淪地尊循”라는 연설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를 따르는 노선집단을 ‘범시파’라 한다.
  14. 개혁파는 ‘실천이 진리검증의 유일한 기준’임을 주장하여 실천파라고도 하며, 개혁을 주도하는 노선집단을 일컫는다.
  15. 중국공산당의 범시파와 개혁파의 노선비교, 전병곤, 1990.
  16. 마오쩌둥이 내린 결정은 모두 옳으며, 마오쩌둥의 지시는 변함없이 따른다는 화궈펑의 국정 운영 방침을 일컫는다. 화궈펑은 혁명을 계승하는 동시에 경제도 건설하려는 모순된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기 위해 이러한 노선을 내세웠지만, 서로 상치되는 두 가지 정책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17. 덩샤오핑은 일찍이 소위 흑묘백묘론을 선언한 바 있으며, 이러한 덩샤오핑의 실천적 관점은 사실에서 진리를 구한다는 ‘實事求是’와 모든 것은 실제에서 출발한다(一切從實際出發) 등을 자주 강조하였고 마침내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다(實踐是檢驗眞理的唯一標準)’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18. 중국 최고 정치지도자들의 리더십, 이승익, 2011.
  19. 주요 토론 내용 : 1. 역사적으로 남겨진 문제에 관한 토론 : “薄一波 등 61명의 반도집단”안에 대한 平反, 2. 진리표준에 관한 문제 : 이 문제는 “眞理標準”파와 “兩個凡是”파 사이에 갈등이 날카로워 본격적인 토론을 미루다가 ‘천안문사건’에 대한 교정이 이루어진 뒤 비로소 토론되기 시작. 처음에는 “兩個凡是”파가 우세했으나 회의가 진행되면서 “眞理標準”파가 득세, 회의가 끝날 무렵에는 “兩個凡是”파 주요 인물들 모두가 자신의 오류를 자아비판.
  20. 중국공산당 3중전회(全會) 성격 고찰 -11기 3중전회(全會) 이후 집단지도체제 교체기의 3중전회(全會)를 중심으로-, 최경식, 2015.
  21. 중국 '사상해방(思想解放)' 논쟁에 관한 연구, 공봉진, 2009.
  22. 앞의 논문, 안치영, 2012.
  23. 앞의 논문, 이승익, 2011.
  24. 덩샤오핑은 그해 12월 <인민일보>에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오직 중국 공산당의 지도하에 전개되어야 한다."며 대중적인 계급투쟁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25. 앞의 논문, 공봉진, 2009.
  26. 당시 중국경제는 화궈펑이 무리하게 자본집약적 공업정책을 추진한 결과 중화학공업 분야는 비대해진 반면 농업과 경공업 분야는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심각한 산업 불균형이 빚어지고 있었다.
  27. Maurice Meisner, The Deng Xiaoping Era : An Inquiry into the Fate of Chinese Socialism, 1978-1993, Hill and Wang,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