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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의 정치적 배경)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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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남자의 탄생==
 
==회남자의 탄생==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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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황제 중심으로 천하를 일원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의 제후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권익과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지방 분권주의가 서로 충돌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제후들은 끝까지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남자』를 저술한 회남왕 유안이나 그의 아버지 유장 역시 그 희생자들이었다. 『회남자』는 바로 한 제국 초기에 나타난 이런 정치적 갈등 구조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제국의 성립과 그 특성====
 
====한 제국의 성립과 그 특성====
 
진시황 사망 이후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기점으로 진 제국 각지에서 반란 세력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들 세력은 이후 두 가지 큰 세력으로 양분되었는데, 바로 항우와 유방 세력이다. 항우와 유방의 세력 대결 끝에 유방이 승리했고 한(漢) 제국이 수립되었다. 한대 초기 지방 행정 조직은 진 왕조 시절의 중앙 집권제와 주 왕조 시절의 지방 분권제가 합쳐진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였다. 때문에 한 제국은 중앙에는 황제 중심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에는 황제의 직할제인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지방 제후의 자치국인 왕국(王國)과 후국(侯國)을 설치했다. 그 결과 한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103개의 군(郡)과 국(國)이 수립되었다. 따라서 한 제국은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 분권주의가 공존하는 불안한 지방-중앙의 공존 체제로 출발했다.
 
진시황 사망 이후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기점으로 진 제국 각지에서 반란 세력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들 세력은 이후 두 가지 큰 세력으로 양분되었는데, 바로 항우와 유방 세력이다. 항우와 유방의 세력 대결 끝에 유방이 승리했고 한(漢) 제국이 수립되었다. 한대 초기 지방 행정 조직은 진 왕조 시절의 중앙 집권제와 주 왕조 시절의 지방 분권제가 합쳐진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였다. 때문에 한 제국은 중앙에는 황제 중심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에는 황제의 직할제인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지방 제후의 자치국인 왕국(王國)과 후국(侯國)을 설치했다. 그 결과 한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103개의 군(郡)과 국(國)이 수립되었다. 따라서 한 제국은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 분권주의가 공존하는 불안한 지방-중앙의 공존 체제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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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제후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오왕(吳王) 유비(劉濞)다. 오왕 유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철을 바탕으로 경제적 바탕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민심과 천하의 인재들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나라의 역량은 중앙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경제(景帝)는 조착(晁錯)이 건의한 '삭번책(削藩策)'을 시행했다. 삭번책은 제후 왕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제후국의 영지 일부를 몰수하여 중앙정부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경제(景帝)는 각종 죄목을 들어 초왕 무의 동해군, 조왕 수의 상산군, 교서왕 앙의 여섯 현을 박탈했다. 영지를 삭탈당한 제후들은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아직 삭탈당하지 않은 제후들 또한 중앙정부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이에 오왕 유비는 주변의 여러 제후국들과 반란을 모의했고,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吳)를 중심으로 교서(膠西), 조(趙), 초(楚), 제남(濟南), 치천(淄川), 교동(膠東)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라고 한다. <br> 하지만 이 반란 또한 군사전략이 뛰어난 주아부(周亞夫)를 경제(景帝)가 총사령관으로 발탁하여 진압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란 10개월 만에 완전히 무너진 후 중앙은 집권화 작업을 신속히 진행했다. 중앙은 "제후는 제후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규정한 후 중앙에서 파견한 상(相)이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했다. 또 수많은 제후국의 영지를 중앙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제후국들을 분할하기 위해 여러 제후를 분봉(分封)했다. 영지가 극도로 작은 제후들은 더이상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강하지 않았고,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제후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오왕(吳王) 유비(劉濞)다. 오왕 유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철을 바탕으로 경제적 바탕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민심과 천하의 인재들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나라의 역량은 중앙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경제(景帝)는 조착(晁錯)이 건의한 '삭번책(削藩策)'을 시행했다. 삭번책은 제후 왕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제후국의 영지 일부를 몰수하여 중앙정부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경제(景帝)는 각종 죄목을 들어 초왕 무의 동해군, 조왕 수의 상산군, 교서왕 앙의 여섯 현을 박탈했다. 영지를 삭탈당한 제후들은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아직 삭탈당하지 않은 제후들 또한 중앙정부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이에 오왕 유비는 주변의 여러 제후국들과 반란을 모의했고,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吳)를 중심으로 교서(膠西), 조(趙), 초(楚), 제남(濟南), 치천(淄川), 교동(膠東)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라고 한다. <br> 하지만 이 반란 또한 군사전략이 뛰어난 주아부(周亞夫)를 경제(景帝)가 총사령관으로 발탁하여 진압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란 10개월 만에 완전히 무너진 후 중앙은 집권화 작업을 신속히 진행했다. 중앙은 "제후는 제후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규정한 후 중앙에서 파견한 상(相)이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했다. 또 수많은 제후국의 영지를 중앙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제후국들을 분할하기 위해 여러 제후를 분봉(分封)했다. 영지가 극도로 작은 제후들은 더이상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강하지 않았고,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회남자』의 정치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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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나라 초기에 나타난 이 상황은 황제 중심으로 천하를 일원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의 제후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권익과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지방 분권주의가 서로 충돌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제후들은 끝까지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남자』를 저술한 회남왕 유안이나 그의 아버지 유장 역시 그 희생자들이었다. 『회남자』는 바로 한 제국 초기에 나타난 이런 정치적 갈등 구조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회남자』의 사상적 배경: '黃老學'====
 
====『회남자』의 사상적 배경: '黃老學'====
 
한편, 전국 시대 말부터 '황로학(黃老學)'이라는 독특한 사상이 유행했다. 황로학은 전국 중기 제나라의 직하학궁에서 발원하여 전국 말기를 거쳐 서한 시대 전기에 크게 유행했고, 동한 이후에는 도교의 형태로 변모하여 발전했다. 황로학에서 '황'은 황제(黃帝)를, '노'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따라서 황로학은 이름을 통해 보면 황제와 노자를 배우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br>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이며 중국 민족의 시조로 여겨진다. 황제는 상고 시대에 또다른 강력한 제왕이었던 치우(蚩尤)를 제압하고 중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황제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노자(老子)는 춘추 시대 말에 생존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했던 사상가이다. 어찌보면 정반대의 것을 상징하는 '黃'과 '老'가 각각 정치 사상과 철학 사상으로서 하나로 결합한 것이 바로 '황로학'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전국 시대 말부터 '황로학(黃老學)'이라는 독특한 사상이 유행했다. 황로학은 전국 중기 제나라의 직하학궁에서 발원하여 전국 말기를 거쳐 서한 시대 전기에 크게 유행했고, 동한 이후에는 도교의 형태로 변모하여 발전했다. 황로학에서 '황'은 황제(黃帝)를, '노'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따라서 황로학은 이름을 통해 보면 황제와 노자를 배우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br>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이며 중국 민족의 시조로 여겨진다. 황제는 상고 시대에 또다른 강력한 제왕이었던 치우(蚩尤)를 제압하고 중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황제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노자(老子)는 춘추 시대 말에 생존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했던 사상가이다. 어찌보면 정반대의 것을 상징하는 '黃'과 '老'가 각각 정치 사상과 철학 사상으로서 하나로 결합한 것이 바로 '황로학'이라 할 수 있다.

2019년 12월 23일 (월) 20:10 판

개요

기원전 139년 회남왕 유안은 장안의 황실에 입조하여 그의 조카뻘되는 한 무제(武帝)를 알현하며 『내서(內書)』 21편을 황제에게 헌상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회남자』가 바로 이 『내서』 21편이다.
『회남자』는 한대(漢代) 초기에 유행한 다양한 사상과 문화 그리고 학문들을 종합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일종의 '백과전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회남자』에는 황로학이라는 사상적 요소와 천문학·지리학·군사학·의학·종교학 등 다양한 요소들이 녹아 있다.

회남자의 탄생

정치적 상황과 사상적 배경

한대 초기의 정치적 상황은 황제 중심으로 천하를 일원화하려는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의 제후들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권익과 자치권을 확보하려는 지방 분권주의가 서로 충돌한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제후들은 끝까지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결국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회남자』를 저술한 회남왕 유안이나 그의 아버지 유장 역시 그 희생자들이었다. 『회남자』는 바로 한 제국 초기에 나타난 이런 정치적 갈등 구조 속에서 탄생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제국의 성립과 그 특성

진시황 사망 이후 진승과 오광의 반란을 기점으로 진 제국 각지에서 반란 세력들이 우후죽순 등장했다. 이들 세력은 이후 두 가지 큰 세력으로 양분되었는데, 바로 항우와 유방 세력이다. 항우와 유방의 세력 대결 끝에 유방이 승리했고 한(漢) 제국이 수립되었다. 한대 초기 지방 행정 조직은 진 왕조 시절의 중앙 집권제와 주 왕조 시절의 지방 분권제가 합쳐진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였다. 때문에 한 제국은 중앙에는 황제 중심의 체제가 확립되었고, 지방에는 황제의 직할제인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고 이와 동시에 지방 제후의 자치국인 왕국(王國)과 후국(侯國)을 설치했다. 그 결과 한대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103개의 군(郡)과 국(國)이 수립되었다. 따라서 한 제국은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 분권주의가 공존하는 불안한 지방-중앙의 공존 체제로 출발했다.

이성 제후(異姓諸侯)

이성 제후(異姓諸侯)란 유방과 직접적 혈연 관계가 없는 성씨가 다른 제후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 제국 초기에 지방 제후로 봉해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성 제후(異姓諸侯)들이었다. 예를 들면 202년 유방이 황제로 즉위하며 봉한 제후 일곱 명은 초왕(楚王) 한신(韓信), 한왕(韓王) 신(信), 회남왕(淮南王) 영포, 양왕(梁王) 팽월(彭越), 장사왕(長沙王) 오예(吳芮), 연왕(燕王) 장도(臧荼), ), 조왕(趙王) 장오(張敖) 등이었는데 모두 유방과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제후로 봉해졌는가? 그 이유는 이들이 유방과 항우의 대결 과정에서 뛰어난 전쟁 수행 능력을 발휘해 유방을 도운 전쟁 영웅들이자 개국 공신들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특히 초왕 한신은 능력이 탁월하고 세력이 커 유방이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이들 제후국들은 각국의 왕이 전적으로 통치하였다. 관료 임명에서 오늘날의 총리급 직책인 상국(相國)만 중앙정부에서 파견할 뿐, 제후국이 독자적 관료제도와 임명권을 갖고 있었다. 또 징세와 부역 동원을 포함한 재정권도 장악하였다. 따라서 중앙정부 입장에서 지방의 이성 제후국(異姓諸侯國)들은 불안 요소나 다름 없었다.

이성 제후의 제거와 결과

처음 반란을 일으킨 제후는 연왕 장도였다. 원래 연왕은 옛 연나라 땅에 반란을 일으키고 항우에 의해 연왕으로 봉해진 제후였으나 초한전쟁 기간에 부득이하게 유방을 도와 항우를 공격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때문에 연왕 장도는 평민 출신 유방을 가볍게 여기고 멸시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유방이 황제에 등극하자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참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장도의 반란군은 한 제국의 군대 앞에 맥없이 무너지고 장도는 포로로 잡혔다.
이밖에도 지방정부의 반란은 잇달아 발생했고, 이에 따라 제후를 제거하는 일은 빈번해졌다. 심지어 실제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는데도 중앙정부의 정략적 의도에 따라 지방 제후를 제거하기도 했다. 연왕 장도를 시작으로 초왕 한신, 조왕 장오, 회남왕 영포와 양왕 팽월이 차례로 제거되었다. 심지어 연왕 장도를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봉했던 연왕 노관(盧綰)마저 제거되었다. 즉, 강남의 장사왕 오예(吳芮)를 제외하면 이성 제후(異姓諸侯)들은 대부분 제거되었다. 그 결과 한 고조 6년부터 12년까지 7년 동안 모두 7명의 이성 제후들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한 왕실과 같은 성씨인 유씨 제후, 즉 동성 제후(同姓諸侯)들을 봉했다. 중앙과 지방의 불안한 공존 체제는 중앙정부가 이성 제후들을 제거하고 동성 제후들을 그 자리에 앉혀서 중앙 집권을 확고히 하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동성 제후국의 성장과 중앙의 대응

이성 제후가 제거된 직후 한 고조는 중앙 집권을 확고히하였다. 한 초기에 임명된 동성 제후들은 대부분 나이가 어린 유씨들이었고, 이에 따라 중앙에서 승상과 태위를 파견하여 이들을 보좌하고 감독케 했다. 한편 지방 제후국의 모든 법령은 중앙정부를 따르게 하고 지방 제후는 중앙정부에서 발급하는 호부(虎符:군사지휘권)가 없으면 군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이에 따라 한 초기 동성 제후국들은 사실상 제후국이 아니라 일개 군현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후 나이가 어렸던 유씨 제후들은 성년이 되고 제후국의 기반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때문에 문제·경제 때에 이르면 지방 제후국의 경제 및 군사적 역량이 크게 증대하여 중앙정부에 대항하기도 했다. 일부 제후국에서는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내쫓고 법령을 마음대로 고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재차 위협을 느낀 중앙정부는 각 제후국을 여러 지역으로 분할함으로써 지방정부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방안은 가의(賈誼)가 건의한 안건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제후들을 많이 세워 힘을 줄이는" 것이었다. 제후 한 사람의 영지를 모든 자손에게 골고루 나눠주게 하여 개별 제후국들의 규모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문제(文帝)는 가의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러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이에 따라 한 고조 말년에는 9개에 불과했던 동성 제후국이 문제(文帝) 말년에는 17개까지 늘어났다.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

중앙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방 제후의 세력은 점점 강성해졌다. 대표적인 것이 오왕(吳王) 유비(劉濞)다. 오왕 유비는 자국에서 생산되는 소금과 철을 바탕으로 경제적 바탕을 강화시킬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민심과 천하의 인재들을 동시에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오나라의 역량은 중앙정부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경제(景帝)는 조착(晁錯)이 건의한 '삭번책(削藩策)'을 시행했다. 삭번책은 제후 왕이 조금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제후국의 영지 일부를 몰수하여 중앙정부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경제(景帝)는 각종 죄목을 들어 초왕 무의 동해군, 조왕 수의 상산군, 교서왕 앙의 여섯 현을 박탈했다. 영지를 삭탈당한 제후들은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아직 삭탈당하지 않은 제후들 또한 중앙정부를 의심하고 불신하게 되었다. 이에 오왕 유비는 주변의 여러 제후국들과 반란을 모의했고, 경제 3년(기원전 154년) 오(吳)를 중심으로 교서(膠西), 조(趙), 초(楚), 제남(濟南), 치천(淄川), 교동(膠東)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난'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반란 또한 군사전략이 뛰어난 주아부(周亞夫)를 경제(景帝)가 총사령관으로 발탁하여 진압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란 10개월 만에 완전히 무너진 후 중앙은 집권화 작업을 신속히 진행했다. 중앙은 "제후는 제후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규정한 후 중앙에서 파견한 상(相)이 제후국을 다스리도록 했다. 또 수많은 제후국의 영지를 중앙으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제후국들을 분할하기 위해 여러 제후를 분봉(分封)했다. 영지가 극도로 작은 제후들은 더이상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강하지 않았고,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회남자』의 사상적 배경: '黃老學'

한편, 전국 시대 말부터 '황로학(黃老學)'이라는 독특한 사상이 유행했다. 황로학은 전국 중기 제나라의 직하학궁에서 발원하여 전국 말기를 거쳐 서한 시대 전기에 크게 유행했고, 동한 이후에는 도교의 형태로 변모하여 발전했다. 황로학에서 '황'은 황제(黃帝)를, '노'는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따라서 황로학은 이름을 통해 보면 황제와 노자를 배우는 학문이라 할 수 있다.
황제(黃帝)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이며 중국 민족의 시조로 여겨진다. 황제는 상고 시대에 또다른 강력한 제왕이었던 치우(蚩尤)를 제압하고 중원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황제는 강력한 정치 지도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노자(老子)는 춘추 시대 말에 생존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했던 사상가이다. 어찌보면 정반대의 것을 상징하는 '黃'과 '老'가 각각 정치 사상과 철학 사상으로서 하나로 결합한 것이 바로 '황로학'이라 할 수 있다.

저자, 회남왕 유안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저술 동기와 명칭

회남자의 사상세계

기론(氣論)

천인감응

무위(無爲)

회남자에 대한 평가

부정적 평가

긍정적 평가

황로학

학술적 가치

모종감 "회남자를 읽지 않으면 한대 도가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노자지귀(老子指歸)』, 『태현(太玄)』, 『논형』 등의 출현과 위진 현학의 사상적 연원을 이해할 길이 없다"

1. 한대 문화 사상 이해 다양한 정보 우주 생성론 천인상감론(천인감응론) 천문 지리 의학 병법 교욱 역사 정치 신화 등 광범위한 지식
2. 선진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 한대 이전 유행한 온갖 사상들이 수용되어 있음 도가, 유가, 법가 음양가 묵가 명가 등 제자백가 총망라, 체계적 정리(도사론道事論) 회남자 「요략」편
3. 고대 문헌들에 대한 자료적 가치 풍부 선진 시대의 문헌 인용 800여 곳. 장자, 여씨춘추, 노자, 한비자, 역경, 시경, 주서, 한비자, 시자, 여씨춘추 등 총망라. 고문의 비교 검증시 굉장히 요긴하다.
4. 선진 도가에서 위진 현학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 및 도가에서 도교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