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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경황제]]는 [[효문황제]] 원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기원전 157년에 태위를 계승하여 기원전 141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사후에 그의 시호를 효경이라고 한 것이다. <<사기>><본기>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이 이 편은 상당히 이채롭다. 이 편은 반고가 지적한 대로 <<[[사기]]>> 전체 130편 중에서 목록만 있고 내용은 없는 10편 중 하나이다. 또한 <<[[한서]]>><경제기>에 의거해 재구성했다는 설도 있어 이 편에 대한 위작 시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효경본기>가 다른 편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밋밋한 문장으로 쓰였다는 점도 위작 시비의 쟁점이다. [[사마천]]은 단순히 사실의 기록만을 나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곳곳에 배어 있게 한 후 편 마지막에 자신의 노녕을 적는 사가인데, 유독 이 편에서만 사마천 특유의 격정이나 품평이 사라지고 그저 당시 경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역사적 상황을 건조하게 써 내려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를 역설적으로 '본기'의 서술 방식에 가장 부합된다는 측면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대담성을 보였던 사마천의 전적에 비추어 보면 이 역시 석연찮다. 따라서 이 편이 위작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편이 사마천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하여 여전히 <본기>에 수록되어 있다.
 
[[효경황제]]는 [[효문황제]] 원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기원전 157년에 태위를 계승하여 기원전 141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사후에 그의 시호를 효경이라고 한 것이다. <<사기>><본기>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이 이 편은 상당히 이채롭다. 이 편은 반고가 지적한 대로 <<[[사기]]>> 전체 130편 중에서 목록만 있고 내용은 없는 10편 중 하나이다. 또한 <<[[한서]]>><경제기>에 의거해 재구성했다는 설도 있어 이 편에 대한 위작 시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효경본기>가 다른 편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밋밋한 문장으로 쓰였다는 점도 위작 시비의 쟁점이다. [[사마천]]은 단순히 사실의 기록만을 나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곳곳에 배어 있게 한 후 편 마지막에 자신의 노녕을 적는 사가인데, 유독 이 편에서만 사마천 특유의 격정이나 품평이 사라지고 그저 당시 경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역사적 상황을 건조하게 써 내려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를 역설적으로 '본기'의 서술 방식에 가장 부합된다는 측면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대담성을 보였던 사마천의 전적에 비추어 보면 이 역시 석연찮다. 따라서 이 편이 위작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편이 사마천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하여 여전히 <본기>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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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마천]]
 
[[분류:사기]]
 
[[분류:사기]]

2016년 6월 21일 (화) 23:57 기준 최신판

효경황제효문황제 원년에 태자로 세워졌고 기원전 157년에 태위를 계승하여 기원전 141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사후에 그의 시호를 효경이라고 한 것이다. <<사기>><본기> 중에서 가장 짧은 분량이 이 편은 상당히 이채롭다. 이 편은 반고가 지적한 대로 <<사기>> 전체 130편 중에서 목록만 있고 내용은 없는 10편 중 하나이다. 또한 <<한서>><경제기>에 의거해 재구성했다는 설도 있어 이 편에 대한 위작 시비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효경본기>가 다른 편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밋밋한 문장으로 쓰였다는 점도 위작 시비의 쟁점이다. 사마천은 단순히 사실의 기록만을 나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곳곳에 배어 있게 한 후 편 마지막에 자신의 노녕을 적는 사가인데, 유독 이 편에서만 사마천 특유의 격정이나 품평이 사라지고 그저 당시 경제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역사적 상황을 건조하게 써 내려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를 역설적으로 '본기'의 서술 방식에 가장 부합된다는 측면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대담성을 보였던 사마천의 전적에 비추어 보면 이 역시 석연찮다. 따라서 이 편이 위작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편이 사마천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고, 하여 여전히 <본기>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