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무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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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금상본기>제12를 지었다."라고 하여 이 편의 제목을 '효무본기'라고 하지 않고 '지금의 황상'이란 의미의 '금상'이란 용어를 썼다. 이 편에서 다루는 인물은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는 한나라 무제이다. 사마천에게 궁형의 고통을 안겨 준 무제는 고조흉노와 굴욕적 화친을 맺은 지 60여 년이 지난 후 강력한 국력을 대외에 과시하였다. 나라의 국력이 팽창한 것은 기원전 141년부터 87년 까지 50여년 간 지속 되었던 무제의 치세 덕분이었다. 무제는 정치적, 영토적으로 중국을 하나로 통일한 사람으로, 다른 어떤 중국의 제왕보다도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제후국들이 천자의 관할 아래 있는 것을 이상적 세계로 생각했다. 물론 이러한 이상은 이미 주나라 때의 "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고, 온 천하는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라는 관념에서 나왔다. 사마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 무제는 자신에게 궁형이라는 치욕을 안긴 인물이지만 사마천은 사적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한 역사적 관점으로 한 무제를 서술했다. 사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편에서 드러난 사마천의 필법을 차지하고서도 사가들은 이 편에 대해 많은 의혹과 모순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에게 시호 '효무'를 사용한다든지, 문장이 처음 예순 글자를 제외하면 <봉선서>와 완전히 일치한다든지 하는 점 등에서도 의심을 품을 수 있다. 사마천이 무제 폄하 작업의 일환으로 <혹리열전>에서 무제 때 혹리가 가장 많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 무수히 많은 공적을 이룬 황제임에도 그저 무제 자신의 개인 영달만을 위해 노력하는 필부만도 못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점 등에서도 그렇다. 이렇듯 이 편은 <<사기>>전체에서 없어진 한 편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이 글 일부분을 한 원제성제 때의 박사였던 저소손이 보충한 것이라는 가설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이 편 말고도 <<사기>>의 다른 편들, 이를테면 <평준서>,<봉선서>,<위기무안후열전>,<위장군표기열전>,<혹리열전> 등을 함께 읽어 보아야 무제의 정치상 잘잘못과 그에 대한 사마천의 평가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한서>><무제기>와 함께 읽어보는 것도 한나라 무제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