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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 이래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중요한 공통점은 조화와 안정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전쟁의 전문가인 병가(兵家)마저도 어떻게 하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를 추구할 정도로 이들에게는 반전(反戰), 평화사상이 내재해 있었다. 더욱이 <묵자>의 경우, 토(討)와 전(戰)을 구별하여 명분없는 전쟁과 불의의 토벌을 경계하며 전쟁을 방지할 목적으로 수비의 논리를 강조하였으며 '비공(非攻)'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사실상 전쟁을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전쟁의 종식을 위한 천하통일을 주장하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통일은 획일적인 통일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전국시대 이래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중요한 공통점은 조화와 안정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전쟁의 전문가인 병가(兵家)마저도 어떻게 하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를 추구할 정도로 이들에게는 반전(反戰), 평화사상이 내재해 있었다. 더욱이 <묵자>의 경우, 토(討)와 전(戰)을 구별하여 명분없는 전쟁과 불의의 토벌을 경계하며 전쟁을 방지할 목적으로 수비의 논리를 강조하였으며 '비공(非攻)'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사실상 전쟁을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전쟁의 종식을 위한 천하통일을 주장하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통일은 획일적인 통일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공천하(公天下)'의 실현===
 
==='공천하(公天下)'의 실현===
이들이 희구하던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자(王者)의 출현이 기대되었고 이에 따라 무한한 권력을 군주에게 부여하려는 입장이 대두하였다.그러나 천하통일에 대한 열망의 이면에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사회,경제 질서에는 '공천하(公天下)' 이상이 내재되어 있었다.이를 위해서는 권력의 집중을 반대하고 천하는 황제의 사물(私物)이 아니라 전체적인 공공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여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견제하는 제도적 조치 또한 강구되었다.이는 즉 현명하고 덕(德0을 갖춘 황제가 즉위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도를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특히 정치의 요체를 위민(爲民)과 민본(民本)으로 파악하여 '공천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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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희구하던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자(王者)의 출현이 기대되었고 이에 따라 무한한 권력을 군주에게 부여하려는 입장이 대두하였다.그러나 천하통일에 대한 열망의 이면에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사회,경제 질서에는 '공천하(公天下)' 이상이 내재되어 있었다.이를 위해서는 권력의 집중을 반대하고 천하는 황제의 사물(私物)이 아니라 전체적인 공공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여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견제하는 제도적 조치 또한 강구되었다.이는 즉 현명하고 덕(德)을 갖춘 황제가 즉위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도를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특히 정치의 요체를 위민(爲民)과 민본(民本)으로 파악하여 '공천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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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참고문헌==
중국역사 이근명 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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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이근명 편역

2016년 6월 21일 (화) 11:45 기준 최신판

제자백가의 사상

공통적 특색

춘추전국 시대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인 변화는 기존의 질서와 권위를 와해 시켰으며 그에 따른 새로운 사상의 표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춘추전국 시대의 경제적 발전은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그 수용능력을 가능하게 하였고, 교통의 발달을 통해 상,주 시대 관중(關中)문화에서 전국시대에 이르러는 지역적 관념이 확대되어 새로운 경제권과 문화권이 형성되었다. 또한 구지배층의 몰락으로새로운 관료층이 형성됨으로써 각 제후국을 중심으로 능력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는 시대가 열렸다. 더욱이 춘추시대 중기에 이르러서는 간독(簡牘)의 보급, 문자의 통이 등을 통해 학문의 발달, 지식의 개방, 언론의 자유가 가능해지는 시대가 도래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출현 한 것이 바로 제자백가의 사상이다. 이들은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한 견해를 제시했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관심사항은 바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제후국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안전화와 더불어 분리되었던 중국을 '통일국가'로 만드는 방법을 모색했다. 따라서 제가(諸家)의 주장에는 상이한 측면 이외에 공통적으로 지향했던 사상적인 특색을 볼 수 있다.

현실적 문제에 집중


우선 제자백가의 사상은 정치,윤리 등의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즉 당시의 사상은 구체적인 정치기술이라는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요소들을 많이 갖추어 있었다. 더욱이 관료제의 정비에 따른 관리의 필요에 의하여 철학으로서의 학문보다는 정치기술로서의 학문으로 발전되었다. 이는 공자나 묵자의 학문에 대한 관심 자체가 관리가 되는 데에 있는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실적 관심은 사물의 객관화하고 지식과 기능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왔다. 종래 신(神)에 의존적이었던 사상에서 인간중심적인 사상으로 전화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인간중심의 합리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중심적인 사상은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의 의지를 강조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 없다.

조화와 안정 추구

전국시대 이래의 시대상황을 반영한 중요한 공통점은 조화와 안정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전쟁의 전문가인 병가(兵家)마저도 어떻게 하면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이길 수 있을까를 추구할 정도로 이들에게는 반전(反戰), 평화사상이 내재해 있었다. 더욱이 <묵자>의 경우, 토(討)와 전(戰)을 구별하여 명분없는 전쟁과 불의의 토벌을 경계하며 전쟁을 방지할 목적으로 수비의 논리를 강조하였으며 '비공(非攻)'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는 사실상 전쟁을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전쟁의 종식을 위한 천하통일을 주장하는 것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통일은 획일적인 통일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공천하(公天下)'의 실현

이들이 희구하던 천하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자(王者)의 출현이 기대되었고 이에 따라 무한한 권력을 군주에게 부여하려는 입장이 대두하였다.그러나 천하통일에 대한 열망의 이면에 그들이 추구하던 이상적인 사회,경제 질서에는 '공천하(公天下)' 이상이 내재되어 있었다.이를 위해서는 권력의 집중을 반대하고 천하는 황제의 사물(私物)이 아니라 전체적인 공공성을 지니는 것으로 파악하여 군주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견제하는 제도적 조치 또한 강구되었다.이는 즉 현명하고 덕(德)을 갖춘 황제가 즉위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고 재상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도를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특히 정치의 요체를 위민(爲民)과 민본(民本)으로 파악하여 '공천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참고문헌

<중국역사> 이근명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