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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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원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2월 16일 (금) 21:22 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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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26년 3월 12일, 펑위샹의 국민군과 봉계군벌의 전쟁시기에 일본 군함이 봉군(봉계군벌)의 군함을 엄폐하여 천진 항구에 들여와 국민군을 포격하였고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민국은 반격하여 일본 군함을 항구 밖으로 쫓아냈다. 일본은 영국 미국 등 8개국과 연합하여 16일에 돤치루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날려 항구의 국방시설 철수를 요구하였다. 3월 18일, 베이징 군중 오천 여명은 리다자오(李大钊)를 중심으로 천안문에 모여 8국의 통첩 거절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돤치루이가 정권을 잡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 현장에서는 47명이 사망하였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건 발단

군벌의 난립과 국민들의 반제 열망

1924년 5월 31일, 소련은 베이양 군벌 정부와 <중소해결현안대강협정(中苏解决悬案大纲协定)>을 맺고, 제정 러시아 시대에 중국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 조약을 폐기, 치외법권과 영군재판권 취소, 상무외의 모든 중동철로의 특권 등을 취소하기로 협정했다. 중소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기타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북경반제대연맹>과 같은 조직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24년의 북경정변으로 직계 군벌이 물러난 뒤 국민군과 봉계 군벌의 추대를 받은 돤치루이가 집권하고 쑨원이 북상하면서 국민회의운동이 활성화하는 분위기에서 반제의 정서는 한층 강화되었다. 쑨원이 죽으면서 국민회의운동은 주춤하였으나 국민당의 반제에 대한 의지 표명은 확고한 상황에서 상해에서 ‘5·30 참안’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북경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반대와 반제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돤치루이(段祺瑞) 집정부에 대한 반대가 뒤얽혀 이후 중국의 주권이 관련된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격렬한 반제 군중 집회 및 시위가 뒤를 이었다.

5.30 운동까지만 해도 집정부 측에서 볼 때 일단 반제운동의 기세를 억누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반제운동이 계기적으로 반집정부운동으로 변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집정부측에서 ‘학풍정돈’의 명령을 내린 것은 이러한 북경 분위기와 변화에 대한 위구심의 표현이었다. 물론 학생을 비롯하여 북경 여론계가 반제와 반집정부적인 정서를 집회, 시위로 표출할 수 있었던 데는 국민군이 북경의 치안을 장악하고 군중의 반 돤치루이 정서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1925년 후반기의 잦은 시위는 북경 학계 일각의 우려를 자아내어 구학과 구국의 논쟁을 야기하기도 하였거니와 이러한 논쟁이 격렬하였다는 사실 자체와 또 당시 『京報』 등 신문지상의 보도로부터 1925년 후반기의 북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음을 읽어낼 수 있다. 특히 동북에서 궈쑹링(郭松齡)이 국민군과 호응하여 반 장쭤린(張作霖) 군대를 일으키고, 일본이 장쭤린을 돕는다는 구실로 동북에 군대를 파견하여 궈쑹링의 반 장쭤린 정변이 실패하자 국민군 장악 하에 있던 북경에서는 반일, 반 장쭤린 시위가 격렬해졌다.

대고구 사건

바로 이와 같이 북경에서 국민군을 애국적인 국대로 파악하는 반면 봉계 군벌을 친일적 군벌부대로 파악하여 반일, 반봉계, 나아가 반집정부적인 집회, 시위가 활발해진 상태에서 대고구(大沽口) 사건이 발생하였다. 1926년 3월 9일 국민군은 교전당사자인 봉계 군벌이 외국 선박을 이용하여 병력과 군수품을 나르는 일을 막기 위해 수뢰를 부설하고 대고구를 봉쇄하였다. 그러자 10일에 영수(領袖)공사(네덜란드 공사)와 영국 공사가 대고구 봉쇄는 신축조약의 규정에 의해 보장된 외국 선박의 대고구 해도에 대한 자유로운 통행권을 저해하는 것이니 원상회복을 해달라고 항의하였다. 국민군은 외국 선박이 교전 당사자인 봉계 군벌을 도우려는 것이 아닌지 확인하고 나서 해로를 열겠다고 하여 봉쇄가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12일에 (봉계 군벌을 돕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일본 구축함 2척이 대고구로 들어오다가 국민군과의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져 양측에 사상자 생기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것이 바로 '3.18 참안'의 도화선이 된 대고구사건이다.

대고구사건을 둘러싸고 국민군, 국민당(광둥외교대표단), 학생, 시민 등과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입장은 판이하게 달랐다. 전자는 일본이 대고구를 포격한 것은 일본이 봉계 군벌을 도와 중국의 내전을 장기화하려는 의도로 파악하였다. 게다가 일본을 비롯한 신축조약 관련 8개국이 국민군의 대고구 봉쇄를 조약상의 권리 침해로 파악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격분하였다. 중소교섭 타결 후 일체의 불평등 조약을 폐지하자는 취지에서 반제운동을 해운 북경 각계에서는 신축조약이야말로 치욕적인 불평등 조약의 전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들은 자연히 신축조약 자체를 폐기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집정부를 향하여 정부가 강경하게 맞대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3월 13일 태화전 앞에서 국민대회가 열려 대고구사건에 대하여 항의를 표하였다. 전국학생 연합회의 통전(通電)에 이들이 대고구 포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가 명확히 나타나 있다. 통전에서는 일본이 만주에 군대를 보내 궈쑹링군을 패하게 만든 것에 대한 유감이 표명되고 봉계 군벌이 천진을 공격하고 있는 때에 일본이 억지로 대고구로 들어오려 하다가 국민군의 검사를 받지도 않고 포격을 가한 것은 매국적인 봉계 군벌을 도와 내란을 연장시켜 중국을 침략하려는 음모의 표현이라고 하였다. 이는 불평등한 조약에 근거하여 영국이 (5.30 사건 때) 광동을 봉쇄한 것과 마찬가지이면서 한술 더 뜬 짓이라고 하여 5.30 운동 이래로 한층 강렬해진 불평등조약 폐지에의 염원을 드러내었다. 또 13일의 대회에서는 천진, 대고 일대 일본 군함의 철수, 허가 없이 일본 군함이 다니지 못하게 할 것, 일본 군경의 즉각적인 퇴출, 중국 정부와 국민에게 일본이 사과하고 중국주재 일본공사를 경질할 것, 포격사건 당사자 징벌과 봉계 군벌을 다시는 원조하지 않을 것, 포격으로 입은 손실을 배상할 것 등을 요구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요구가 들어지지 않는다면 국민은 국교단절, 일본공사 축출을 단행할 것이며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하여 분노의 정도를 고스란히 드러내었다.

8개국의 최후통첩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신축조약 관련 당사국인 8개국의 입장은 중국측의 격렬한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강경일변도였다. 이미 대고구사건 전에도 국민군의 대고구봉쇄가 신축조약상의 규정을 위반하였다는 점을강조하여 항의한 바 있었던 열강은 이제 8개국이 연합하여 중국 외교부에 3월 16일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국제통상 상의 일반 협약에 들어있는 권리 및 신축조약에서 정한 바 수도와 해안 간의 자유로운 교통이라는 특수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대고와 천진 간의 전투행위를 정지할 것, 수뢰 등 장애물을 제거할 것, 해관 관리 외에 아무도 외국선박을 검사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의 요구였다. 즉, 국민군이 봉계 군벌 원조의 혐의를 두고 있던 일본의 선박에 대해 어떤 조처도 취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통첩에서는 3월 18일 정오까지 만족할 만한 보장이 없다면 각국 해군당국이 필요한 수단을 취하여 천진의 해로를 열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실제로 17일에 일본, 영국 등의 군함 20여척이 대고구에 운집하여 단순한 엄포가 아님을 과시하였다.

군중의 분노와 청원

이와 같은 열강의 태도와 최후통첩은 북경 각계의 분노에 불을 지르는 격이었다. 3월 17일 오후 3시 여사대 등 학교와 국민당 북경시당부, 광둥외교대표단 등의 단체 대표가 북경대학 제3원에서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열강의 최후통첩을 반박할 것, 일본 함선이 봉계 군벌의 함선을 대동하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 8국 공사를 수도로부터 축출할 것, 국민군에게 (내전이 아니라) 불평등조약 폐지를 위해 (열강과) 싸우도록 요구할 것 등을 결의하고 다음날인 3월 18일에 천안문에서 열강의 통첩에 반대하는 국민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당장 대표들을 두 조로 나누어 외교부와 국무원에 강경하게 대처하도록 청원을 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최후통첩에 서명한 각국 공사들을 수도 밖으로 축출할 것', '일본 함선이 봉계 군벌의 함선을 대동하고 대고구로 들어오는 데 반대한다'는 기치를 들고 국무원에 간 조가 돤치루이 집정, 자더야오(賈德耀)총리 회견을 요구했으나 호위대의 폭력적인 방어로 오히려 대표 일부가 부상당하는 일이 생겼다. 중상자가 5명이고 여학생도 끼어 있었다. 열강의 통첩과 북경을 비롯한 전국적인 반제의 여론 사이에 낀 집정부의 선택이 결국 17일의 국무원 앞에서의 유혈사태로 나타났으니 이는 다음날 있게 될 국민대회의 분위기를 반제와 동시에 반집정부로 몰아가게 만들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사건 전개

이와 같이 격앙된 분위기에서 3월 18일 오전 10시경부터 예정했던 대로 천안문광장에서 8개국의 최후통첩에 대한 반대집회가 열렸다. 북경학생총회와 국민당 북경시당부, 광둥외교대표단, 여사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과 총공회 등 각 학교 단체마다 대오를 짜거나 전차를 이용하여 참가한 사람들이 삼천 여 명이었다. '8국 최후통첩 반대 국민대회', '8국 최후통첩 반대 대시위'라고 크게 쓴 백기 두 장이 걸리고 또 전날 국무원에서 호위대의 칼에 찔려 부상당한 대표의 피묻은 옷이 내걸려 군중의 분위기가 격앙되었다.

집회를 마친 군중은 청원시위에 나섰다. 동장안가로부터 국무원으로 향한 시위대가 이천여 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들은 국무원에 가서 5명을 대표로 뽑아 국무총리의 회견을 요구하였으나 총리가 부재중이라는 답변만 들었다. 흥분한 시위대는 '제국주의 타도', '8국 공사 퇴출', '돤치루이 타도' 등을 부르짖었고 국민혁명가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군중과 호위대 사이에 말싸움이 벌어졌고 호위대가 공중에 몇 발 쏜 뒤 군중이 달아나지 않자 그대로 군중을 향해 총구를 돌리고 발사하기 시작했다. 군중이 일시에 도망치기 시작했으나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빠져나갈 수가 없는 상황에 탄환이 비오듯 쏟아져 삽시간에 유혈이 낭자한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철사자호동은 교통이 차단되고 총소리에 놀란 상점들은 문을 닫는 등 참변이 연출되었다.

결과

3.18 사건으로 국무원 앞에서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죽거나 병원으로 옮겨져 죽은 사람의 수는 47명이고 그 중 여학생이 4명, 50여세 된 부인 1명, 임신부 1명을 포함하여 모두 6명의 여성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감스럽게도 50여세 된 부인과 임신부에 대해서는 인적 사항이 알려진 바 없다. 4명의 여학생 그 중에서도 여사대 학생회 회장이었던 류허전(劉和珍)과 여사대 학생 양더췬(楊德群)이 비교적 널리 알려졌고 연경대학 여학생 웨이스이(魏士毅)에 대해서도 추모의 글을 통해 어느 정도 알려졌으나 민국대학의 여학생인 양쥐이(楊菊逸)에 대해서는 역시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후 돤치루이 정부는 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을 '폭도들'이라고 정의 내리며 그 지도자 리다자오, 루쉰 등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루쉰의 평가

자신의 학생들이 군벌들에 의해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을 접한 루쉰은 충격과 실의에 휩싸였다. 이 사건에 대한 루쉰의 태도는 《화개집 속편》 <꽃 없는 장미1(無花的薔微之二)>에서 잘 나타난다.

"중화민국 15년 3월 18일에 돤치루이 정부는 위병을 시켜 보총과 대도를 써서 국무원 문 앞을 포위하고 
맨손으로 외교적인 도움을 청원하던 수백 여 명의 청년 남녀를 학살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명령을 내려 '폭도'라고 모함했다!
이와 같이 잔학하고 흉악한 행위는 금수에게서도 보지 못했을뿐더러 인류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중략)… 중국은 호랑이와 늑대가 마음대로 뜯어 먹게 그냥 놔두고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다만 몇 명의 학생뿐으로 그들은 원래 마음 편히 공부해야 하지만 시국이 그들을 편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만약 당국의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마땅히 스스로 반성하고 자책하여 양심을 좀 발휘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을 학살하고 말았다!"

루쉰은 이 편을 마무리 지으며 '3월 18일, 민국 이래 가장 어두운 날에 쓰다'라고 마무리 지으며 이 날의 심정을 그대로 토로했다. 3월 25일에는 여사대에서 류허전 등을 위한 추도회를 열었는데, 추도식에 참석한 루쉰에게 한 학생이 류허전을 추모하는 글을 써줄 것을 요구하였고, 며칠 지나지 않아 루쉰은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記念劉和珍君)>이라는 글을 썼다.

"나는 실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다만 내가 사는 곳이 결코 인간세상이 아니라고 느낄 뿐이다. 
청년들 40여 명의 피가 내 주위에 차고 넘쳐서 숨도 쉬지 못하고 눈도 뜰 수 없는데, 무슨 할 말이 남아 있겠는가? 글을 지어 애도하는 것도 비통이 멎은 다음 일일 것이다."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3월 29일부터 루쉰은 야마모토 병원, 독일 병원, 프랑스 병원 등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류허전 군을 기념하며>, 《들풀》의 후반부 작품,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을 창작하였다.

"아, 너그럽고 캄캄한 어머니 대지여, 그대의 품에서 그녀의 넋이 고이 잠들게 해주소서!"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에서는 앞의 두 작품과는 달리 비교적 평화로운 논조를 보이고 있는데, 첸리췬은 이는 3.18 참사를 비롯한 외재적인 혼란(纷扰)이 내심적 혼란으로 전화하여 여기에서 일종의 생명의 욕구로 전환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첸리췬은 루쉰이 자아생명의 깊은 내면에서 광명의 역량을 찾아내서 외부에서 내면으로 점점 들어오는 암흑에 저항하고자 했던 것이 《아침 꽃, 저녁에 줍다》를 창작하게 된 가장 기본적인 동인이라고 주장한다.

참고문헌

  • 왕스징, 『루쉰전』, 2007, 다섯수레. pp295-305
  • 루쉰,『루쉰전집4 화개집, 화개집 속편』「꽃이 없는 장미(2)」, 2014, 그린비. pp331-335
  • 윤혜영 (1998). 국민혁명기 북경의 여성운동. 중국근현대사연구, 6, 1-19.
  • 김하림 (2012). 루쉰의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花夕拾)』 해석에 관하여. 중국현대문학, (60),29-52.
  • 바이두 백과사전 '三·一八惨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