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호 16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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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劉淵)이 황제를 칭한 뒤 약 130년 동안 많은 정권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는데, 이 흥망의 시기가 바로 5호 16국 시대이다. 5호(五胡)는 흉노(匈奴), (羯), 선비(鮮卑), (氐), (羌) 이렇게 다섯 민족을 가리킨다. 호(胡)라는 용어는 한족의 입장에서 이민족을 가리키기 때문에 차별적인 의미로 여겨져 당시에는 사용을 금했다고 한다. (羯)은 흉노의 한 갈래이고, (氐)와 (羌)은 티베트계 민족이다.

흉노(匈奴)

남흉노군이 천자구원에 나선 무렵 선우(單于)어부라(於夫羅 150~194)는 병상에 있다가 곧 죽었다. 그리고 동생인 호주천이 선우(單于)가 되었다. 어부라의 아들 표는 흉노의 좌현왕이 되엇다. 후한의 실권을 장악한 조조는 새로운 흉노 대책을 세웠는데, 수많은 부를 정리해서 지역마다 좌, 우, 남, 북, 중의 5부로 나누었다. 부의 수장을 수(帥)라고 불렀는데 위나라 말기에는 도위(都尉)로 바꾸었다. 그러나 어떤 부든 사마라는 관직에는 한인을 앉혀 그들을 감독하게 했다. 태원을 근거지로 한 좌부가 가장 규모가 커서 1만여의 낙을 지배했다. 가장 작은 부는 3천 남짓의 남을 통솔하는 남부였다. 흉노는 한나라와 형제의 인연을 맺은 탓에 흉노 사람이 자시의 이름을 한인식으로 칭할 때는 대개 유씨를 썼다. 유연(劉淵)은 성뿐만 아니라 보통 한인 이상으로 한나라 문화에 교양이 있었다.

뛰어난 지도자 유연(劉淵)

이 새외민족들에게도 공통점이 존재했는데 그 중 하나는 강력한 지도력을 필요로 했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생활을 하기 때문에 서로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을 하나로 단결시킬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했는데, 유연(劉淵)이 이 역할을 잘 해내었다. 유연(劉淵)의 뛰어난 통솔력으로 흉노는 순식간에 강성해졌다. 동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인 족(羯族)까지 유연의 산하에 들어올 정도였다. 선비의 경우에도 초기엔 후한에 의해 이용당할 정도로 약했으나, 단석괴라는 뛰어난 통솔자가 나타나면서 점차 강력해졌다.

흉노에 뿌리내린 한족의 윤리 관념

민족 간의 혼합은 윤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의 황제 유연(劉淵)이 죽자 그의 태자 유총은 아버지의 정실부인이었던 미모의 선씨와 육체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아버지가 죽은 뒤 자신의 생모 이외에 아버지의 처첩을 취하는 흉노의 관습이기도 했다. 하지만 흉노 명문의 딸인 선씨는 수치심과 우울증으로 자살해 버렸다. 이것은 한족의 윤리 관념이 흉노 사이에 뿌리내렸다는 것을 말해준다.

갈족(羯族)

족(羯族)의 지도자는 석륵(石勒)이라는 인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갈족의 작은 부락의 수장이었다. 하지만 매우 가난해서 석륵은 14세 때 낙양으로 물건을 팔러 갔을 정도였다. 병주(幷州)에 기근이 들었을 때 동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는데, 석륵은 북부도위인 유감(劉監)에게 붙잡혀 팔려 갈 뻔하다가 겨우 탈출했다. 이런 일로 새외민족은 한족에게 증오심을 품었다.

올바른 정치의 모범 석륵(石勒)

이 시대에는 문무의 재능이 뛰어난 인물도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금세 타락했다. 유연(劉淵)에게 천리구(千里駒)라고 격찬 받았던 유요도 제위에 오른 뒤부터 임금에게 아첨하는 신하와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며 지냈다. 간언했다가 참수된 자가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황제에게 조언하지 않았다. 반면에 문맹이었다는 석륵의 정치는 훌륭했다. 구품관인법에 기초해 관리를 등용했는데 군자영(君子營)의 존재가 특히 유명하다. 군자영이란 한족 출신의 학식 있는 경험자를 모은 이른바 비서집단인데, 석륵은 군자영 사람들에게 정치 조언을 받았다. 후조(後趙)의 영토는 하북, 산서, 산동, 그리고 한남 일부여서 당시에는 한과 호가 뒤섞여서 살고 있었다. 석륵은 각 민족이 각자의 관습을 지키는 것을 존중했다. 백성의 소송이나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문신제주(門臣祭酒)와 문생주서(門生主書)라는 직무가 있었는데, 전자에는 흉노족, 후자에는 한족을 임명했다. 그리고 한족이 흉노를 호인(胡人)이라고 부르는 것을 금했다. 호는 흉노를 이민족으로 구별 짓는 차별용어였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국인(國人)’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했다. 또 한편으로는 국인, 즉 흉노가 한족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 없도록 주의했는데, 민족문제에 매우 마음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대한 지도자 석륵의 잔인무도한 조카 석호(石虎)

이렇게 올바른 정치를 펴고 있던 석륵후조(後趙)에도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석륵의 조카인 석호(石虎)였다. 그는 웅포다사(雄暴多詐)로 일컫는 무인이었다. 용맹한 것에 그치지 않고 매우 잔인했다. 성을 함락하면 선악을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버렸다. 석륵이 살아 있을 때부터 후종서는 태자파와 석호파가 대립했다. 태자는 석홍(石弘)이라는 인물로 석호와 달리 인효온공(仁孝溫恭)이라고 형용될 만큼 온순했다. 석호는 어찌나 잔인했던지 석호의 권위를 빼앗고 서둘러 태자를 정치에 참여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석호는 뛰어나리만큼 용감무쌍했다. 서쪽의 전조(前趙), 남쪽의 동진(東晉), 북쪽에는 선비족이 군사활동을 벌이고 있어 석호는 후조(後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장(武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