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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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비롯한 군부세력은 4월혁명 직후부터 정권탈취를 모의하여 몇 차례 연기 끝에 5월 16일 미명에 군사정변을 감행하였다. 박정희 소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김종필 예비역 중령을 중심으로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이 가담한 군부세력은 이날 새벽 3시경 한강 어귀에 진입하여 약간의 총격전 끝에 예정보다 약 1시간 늦게 서울 입성에 성공했다.

군부세력은 중앙청을 비롯하여 서울중앙방송국 등 목표지점을 일제히 점거하고, 5시 첫 방송을 통해 거사의 명분을 공표하는 한편 6개항의 혁명공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9시에는 군사혁명위원회 포고령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오후 7시를 기해 장면 정부를 인수한다고 밝혔다.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지 8개월, 4.19혁명이 발발한지 13개월 만에 군사정변이 일어나 민주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5.16군사정변은 군정 2년과 제3,4공화국에 이어 그 후계 군부세력들이 세운 제5,6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장장 31년에 걸친 군사통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군사정변이 일어났을 때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도망치고, 대통령 윤보선은 매그루더 주한 미8군 사령관의 쿠데타군 진압 승인 요구를 거절하였다. 기타 민주당 정부와 국회의 쟁쟁한 투사들도 숨을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기회주의 속성을 내보였다. 언론인‧지식인들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미국은 당초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장면의 합법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내고, 매그루더 장군의 반란군 저지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반란군이 ‘반공’을 내건 것이 확실해지면서 태도를 바꾸었다. 여기에는 장면의 잠적과 윤보선의 쿠데타 수용 발언으로 민주당 정부를 더 이상 지지할 명분이 사라진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5월 18일, 장면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와 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와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 이양을 의결하고, 윤보선이 이를 재가하면서 군사정변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미 국무성에서는 한국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자가 반공친미적임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인정하였다. 이로써 5.16군사정변은 성공하였다.

군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바꾸고 6월 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하여 최고권력기구로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삼권을 장악하고 군정을 실시했다. 광복 16년 만에 미군정에 이어 두 번째 맞는 군정이었다. 직속기관으로 중앙정보부를 설치하고 산하기관의 혁명재판소와 혁명검찰부를 통해 용공분자 색출을 표방하며 혁신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는 한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간부들을 구속했다. 조용수에게 반국가죄를 걸어 처형하였다.

정권의 장악이 확실해지면서 쿠데타 세력 간에는 권력쟁탈전이 벌어져 최고회의 의장이자 육군참모총장인 장도영 세력이 반혁명 쿠데타를 기도했다는 이유로 제거되고, 박정희가 전권을 장악하여 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군정기간 동안 적발된 이른바 반혁명 사건이 13건에 달하고, 군부는 박정희 세력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