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放活微观,管制宏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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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bring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2월 7일 (수) 14:2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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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경제에 대한 규제의 완화와 거시경제에 대한 규제의 강화

관중은 백성을 네 분류로 나눠 놓음으로써 자신의 의지와 통치이념을 체현하였다. 이 노련한 정치가는 다년간의 상인 경험을 통해 공업과 상업이 농업보다 이윤 획득에 더 좋다는 것과, 상품경제의 진흥이 국력을 증강시키는 최적의 길이라는 것을 일찍이 발견하였다. 그는 제나라에서 산업과 세금, 가격 등과 관련된 여러 영역을 종합하여 개혁하였다. 그가 행한 개혁들을 현재의 용어로 말한다면 "미시경제에 대한 규제를 풀고, 거시적 관점은 국가가 제어한다." 가 될 수 있겠다.

소위 "미시적 관점에 규제를 푼다"는 것은 쉽게말해, 내적으로는 내수 상품경제를 자극하여 성장시키고 바깥쪽으로는 관세를 낮추어 "물이 골짜기로 고이듯如水归壑" 여러 상품들을 시장에 모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단는 말이다.

제나라의 위치는 해안가였고, 어업과 염업이 발달했었다. 관중은 어업과 염업의 경우 자유롭게 수출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세관에 등록을 하면 세금을 면제시켜주어 다른 제후국들이 제나라와의 교역을 장려하였다. 기타 수출 상품들 또한 단일세 제도를 실시하여 세관에서 한번 세금을 매긴 상품들은 시장에서 두번 세금을 매기지 않았다.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 였다.

관중은 제나라에서 사업을 하려 오는 상인들에게 문을 더욱더 크게 열었고 그들을 극진히 환영하였다. 빈수레를 끌고 온 상인든 등에 짐을 이고 다니는 행상인이든 세금을 일절 걷지 않았으며 제나라로 들어오는 상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그는 제환공에게 외국 상인들이 머무를 수 있는 상인 전문 객잔의 설립을 건의하였는데 이 객잔은 30리마다 하나씩 설치되었다. 이 객잔은 하나의 수레를 가지고 온 사람에게는 본인의 식사를 제공하였고고, 세 개의 수레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말의 사료를 5개의 수레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는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을 붙여주었다. 이때부터 천하의 상인들은 마치 물이 흘러가듯 제나라로 흘러들어 갔다.

시장을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 관중은 국가가 운영하는 집창촌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도인 린쯔에 7개의 공창을 만들었고, 한개의 공창에 100명의 여자를 두어 총 700명의 여자를 관리하였다. 관중은 이렇게 외국에서 많은 상인들을 끌여들였고 그들로부터 많은 세금을 받아들였다. 노반이 목공업에서 가지는 위치처럼 관중은 후세의 성매매업의 창시자로 경배된다.

이러한 자유무역 정책의 뒷받침 아래, 제나라 상업의 발전과 넘치는 활력은 <전국책-제책>에서 볼수 있는데, 그곳에는 제나라 수도인 린쯔에서 한때 크게 성행한 번화의 광경이 묘사되어있다. "린쯔는 매우 부유하고 풍요로워 그 백성들은 비파를 키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촉을 두들기며 즐긴다. 닭싸움과 개의 경주를 즐기며 윷놀이와 공차기를 즐기지 않는 이가 없다. 임치의 길은 수레들이 지나가다가 서로 바퀴가 부딪히고 사람들은 어깨가 부딫힐 정도로 붐빈다. 옷소매를 들며 장막이되고, 사람들이 흘리는 땀은 비가 오는 것 같으며, 가정은 번창하고 부유하며, 사기가 올라있다. " 통계에 따르면, 당시 린쯔의 거주인구는 30만명을 넘었던 것으로 보이며, 동시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자 가장 번화하고 부유한 도시였다. 비슷한 시기 아테네 성의 인구는 5만도 안되었다.

그리고 "거시적 관점을 관리하고 운영한다"는 것은 정부의 경제에 대한 거시적 관리를 강조하는 말로 그 방법은 재정, 세수, 가격 세 방면에 대한 정부가 개입이었다.

농경시기 국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상품은 단연코 먹을 식량이었다. 예로부터 존재해온 여러 교역 중에서 식량은 총 상품의 80%를 차지하였으니, 관중 또한 식량에 관한 정책을 아주 중히 여겼다. 그는 농경관련 세금에 대해 다른 군주들이 터무니없이 세금을 걷거나, 무턱대고 낮추거나 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什税一소득의 10%를 국가에 내는" 정책을 표준으로 계획을 세웠다. 세금은 2년에 한번씩 걷었는데 풍년인 해는 매년 15%를, 수확이 일반적인 경우에는 10%, 그리고 낮은 등급의 해는 5%를 걷었다. 만약 그 해가 흉년이면 세금을 면제하였다. 이렇게 탄력적인 세금제도의 운영은 맹자가 말한 "什税一"보다 더 융퉁성 있고, 현실적이다. 이외에도, 관중은 예비식량 비축 제도를 실시하였는데, 국가가 곡식들을 대량으로 미리 사두어 시장에서의 곡식 가격의 변동을 통제할 수 있었으며 곡식 공급의 과잉이나 미달의 균형을 맞추는 효과를 얻었다. 관중은 어떠한 개인이라도 식량의 가격을 쥐락펴락 할 수 있도록하지 않았고 식량이 부족한 해에 식량을 사재기하여 백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였다. 또한 식량 가격의 변동은 무슨일이 있어도 국가에 의해 통제되도록 하였다. 농사를 짓던 시대에 그의 이 견해는 눈여겨 볼 만 하다.

관중을 또한 가격을 지렛대 처럼 이용하여 경제를 조절하고 국가의 수입을 올리는 데 선수였다. 예를 들어 국가가 대량의 면포를 가지고 있으면 굳이 면포에 세금을 부과할 필요가 없이 그 원재료인 삼베(麻)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을 하였는데, 이렇게 한다면 삼베의 가격이 세금 부과로 인해 10배가 될 경우 면포의 가격은 삼베 가격의 상승 때문에 자연스레 50배가 되어버린다. 국가는 이미 많은 양의 면포를 통제하고 있기 때문에 면포를 판다면 많은 돈을 벌 수가 있었다. 같은 원리로 국가가 다량의 견직물을 통제하고 있을 땐 명주실에 세금을 매겨 견직물의 가격을 10배로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타국과의 무역을 할 때 그는 각 국가마다 서로 다른 상황을 고려하여 상품의 가격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외국 상품의 질이 제나라의 것보다 좋다면 본국에의 판매가격을 높혀 질 좋은 외국 상품의 유입을 통제하기도 하였다. 수출을 촉진하고 싶을 땐 수출 가격을 낮추어 상품의 수출을 활성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