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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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than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1일 (화) 19:36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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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원정은 수 왕조의 양제 양광에 의해 대업 8년(612년)~대업 10년(614년)동안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대외정책으로서의 원정을 말한다.


고구려 원정의 목적

대외적으로 수나라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북방에서 중국을 넘보는 돌궐과 토욕혼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여 영토의 확장을 이루어냈다. 그 때 한반도에서는 삼국이 중국의 분열을 이용하여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북방의 영토를 지배하긴 했지만 중국과 국경을 다투는 고구려의 존재는 수나라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수 양제는 고구려에 수차례 사신을 보내 조공과 입조할 것을 요구했으나 고구려의 영양왕은 이에 순순히 따르지 않았고 이에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고구려 원정의 경과

제 1차 고구려 원정

대업 7년(611년, 고구려 영양왕 22년) 2월 양제는 그가 좋아하는 강도(양주)에 머물고 있었는데 백관들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고 그 길로 고구려 원정에 친히 나서기 위해 용선을 타고 운하를 북상하여 영제거를 지나 하북의 탁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양제는 동원령을 내려 완전무장한 장병을 탁군으로 집결시켜 고구려 원정 준비에 착수하였다.
동원령이 내려지자 각 군의 병사들이 속속 탁군으로 집결하였다. 하남·회북에서 급조된 전차 5만 대도 줄을 이어 북쪽으로 향했다. 황하 연안의 여양과 낙구에 저장되었던 군량도 배로 운반되어 꼬리를 문 돛대의 그림자가 천여 리까지 이어졌다.
그 다음해인 대업 8년(612년) 1월 만반의 준비를 끝낸 양제는 마침내 출정명령을 내렸다. 이 원정군의 총사령관은 양제의 사위 우문사급(宇文士及)의 아버지 우문술(宇文述)이었고 양제도 친정키로 하였다. 원정군은 좌우 양 날개와 12군단으로 편성되어 총 병력 113만 8천 명이었다. 각 군단의 거리 20km, 매일 1개 군단씩 순서에 따라 출발하였는데 전군이 출발하는 데만 40일이 소요되었다. 113만의 대군은 일정간격을 유지하면서 장사의 행렬로 전진해 나갔다.
수나라 원정군은 요서로부터 요하를 건너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도저히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또한 요하의 도하 작전에서는 당시 공부 상서로 있었던 우문개가 설계한 부교를 사용하려 하였으나 한 길 남짓이 모자라 연결하지 못함으로써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한편 수로군은 산동 반도에서 황하를 건너 패수를 거슬러 올라가 육로군과 합류하여 평양성을 공략하기로 작전이 짜여져 있었다. 수륙 양로군이 합류하여 일거에 평양성을 공략하는 것이 작전이었으나 수로군의 총사령관 내호아(來護兒)는 단독으로 평양성을 함락시켜 공을 세우려는 공명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고구려의 평양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수나라 군사의 공격을 예상한 고구려는 외성 안에 있는 절들을 비워놓고 그 안에 복병을 배치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나라의 군사는 먼저 외성을 공략하였다. 궁전과 관청은 모두 내성에 있었으며 외성과 내성은 성벽으로 막혀 있어 고구려는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외성에 들어간 4만의 수나라 군사는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하였다.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 질서를 잃고 있는 그 순간에 고구려의 복병이 일시에 쏟아져 나와 공격을 감행하자 수나라 군사는 대패하여 전선을 정박시킨 선착장으로 후퇴하였으나 생존자는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내호아의 패전보고를 받은 양제는 화를 냈다. 요동성을 아무리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패전보고를 받은 양제는 총사령관 우문술 등 수뇌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함락시키지 못한 성은 그대로 두고 평양으로 직행하라." 요동성뿐만이 아니라 그 주변의 성들도 성문을 굳게 닫고 있어 수나라 군사들이 통과하기 어려웠다.
우문술, 우중문(于仲文), 유사룡(劉士龍) 등은 압록강을 건너 남하하였으나 오랜 요동벌의 지구전에서 장병들이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고구려군은 전투를 해오고는 곧바로 도망치는 작전으로 수나라 군사를 농락했다. 수나라 군사는 산발적인 전투를 벌여 하루 7차례를 모두 이겼으나 피로가 겹쳐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을 눈앞에 둔 때에는 이미 전쟁을 계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이 때 고구려의 대신 을지문덕이 사자를 보내어 “만약 수나라가 군사를 물리면 마땅히 고구려 왕을 받들어 모시고 행재소(수의 양제가 있는 요동)에 나가 조회하겠습니다.”라고 제의하였다. 이번 수나라의 원정은 고구려 왕이 입조를 거절함으로써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입조를 제의한 이상 수나라로선 전쟁을 중지할 구실이 되는 것이었다. 이에 우문술은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수나라가 철수하자 고구려 군은 말을 바꾸어 도처에서 퇴각하는 수나라 군사에게 공격을 가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살수의 대전에서는 수나라 군사가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급습을 당하여 전멸상태에 빠졌다. 이 싸움에서 수나라 군사는 30만 5천 명 가운데 겨우 2천 7백 명이 목숨을 보전하여 돌아갔고, 양제의 제 1차 고구려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총사령관 우문술은 함거에 실려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아들 우문사급이 양제의 딸 남양공주와 결혼한 사이였으므로 처형은 면하고 페서인이 되었다. 그 대신 장군 유사룡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였다.

제 2차 고구려 원정

양제는 제 1차 고구려 원정의 참패를 설욕하기 위하여 다음해인 대업 9년(613년) 재차 고구려 원정을 강행하였다. 우문술은 관작을 회복하고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부여한다는 뜻으로 재차 원정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양제도 친정에 나서 요동으로 향하였다.
2차 원정에서의 작전은 1차와는 달리 단숨에 평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도중 각 성을 각개 격파하는 작전이었다. 제 1차 원정 때 퇴각과정에서 각 성에서 출격하는 고구려 군에게 곤욕을 당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수나라의 원정군이 순조롭게 공격을 진행하여 고구려에 위협을 가하고 있을 무렵 본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군량의 수송을 담당했던 예부 상서(문교 장관) 양현감(揚玄感)이 수송을 고의적으로 지연시키며 전선에 타격을 주더니 마침내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하북, 산동, 하남 등지에서도 농민들의 반란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양제는 국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할 수 없이 원정군을 철수시킴으로써 사실상 고구려 원정은 중지되고 말았다.

제 3차 고구려 원정

양현감의 반란으로 제 2차 고구려 원정을 중지해야 했던 양제는 다음해인 대업 10년(614년)에 다시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수나라 도처에서 반란의 무리들이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양제의 오기는 고구려 원정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정군의 편성은 징병을 기피하여 도망친 장정들이 반란군에 가세함으로써 반란의 무리들을 도와주는 결과를 만들기도 했다.
사실 고구려 쪽에서도 해마다 수나라 군사에 대응하여 국력을 기울여 싸우다보니 피폐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양제가 제 3차 원정에 나서자 고구려에서는 사자를 보내어 화해할 것을 청하고 망명해 있던 곡사정을 송환하였다. 곡사정은 원래 수나라 병부 시랑(국방 차관)으로 제 2차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였으나 양현감의 반란 소식을 듣자 그 길로 고구려에 망명하였었다. 곡사정은 양현감과 내통한 혐의를 받고 있던 자였으므로 양제가 그를 몹시 중오하고 있었다. 그가 송환된다 하니 양제는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의 화해요청을 받아들였다.
3차 원정 당시 회군하는 도중 양공경(楊公卿)이라는 도적이 이끄는 8천 명의 무리에 습격을 당해 42마리의 명마를 날치기 당해 전력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의 화해 요청은 양제에게도 반가운 것이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끝내 수나라에 입조하지 않았다.


고구려 원정의 결과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으로 인해 국력이 소모되고 국고 또한 소진되었다. 또한 무리한 고구려 원정을 멈추지 않는 양제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수나라에는 대대적인 반란이 터졌다. 양제의 폭정과 무리한 토목공사, 곧바로 이어진 고구려 원정에까지 혹사당한 백성들은 기근과 수해가 겹치자 반란의 규모를 키워갔다. 그러나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정세에도 불구하고 양제는 여전히 강도에서 머물며 사치와 향락을 즐겼고, 618년 결국 우문화급에 의해 처형되면서 수나라는 3대 39년만에 멸망에 이르고 만다.


참고문헌

김희영,『이야기중국사 2』(청아출판사,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