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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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서갱유(焚書坑儒)의 의의

제감도설에 실린 분서갱유 상상도

분서갱유는 진시황이 사상통제의 일환으로 농서를 제외한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焚書) 수백명의 유생을 생매장한(坑儒) 사건을 가리킨다. 이때 불태운 서적들은 현대와 다르게 대부분 대나무로 만들었으며 그 시기에 기록 수단이었던 죽간이었다. 이는 언론이나 문화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분서(焚書)

의의

진나라는 군현제도를 채용했으나 유학자 가운데는 주나라의 봉건제도를 찬양하고 황제의 정치를 비방하는 자가 있었는데, 황제는 이설을 탄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213년 박사관 소장의 서적과 의 · 약 · 복서· 농업 서적 이외의 민간 소장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웠다.

배경

분서는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베푼 연회에서 주청신과 순우월의 갈등이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건이다. 사마천의 「사기 – 진시황본기」에서는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주청신(周靑臣)의 시황제 찬양
시황제가 함양궁에서 주연을 베푸니 박사 70여명이 나와 축수(祝壽)를 올렸다. 복야(僕射) 주청신이 나아가 찬양하기를, “이전에는 진(秦) 땅은 사방 천리에 불과했으나, 폐하의 신명(神明)에 의지하여 천하를 평정하고 만이(蠻夷)를 몰아내니, 해와 달이 비추는 곳이라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후국을 군현으로 삼으시니, 사람마다 안락함을 누리고 전쟁의 근심이 사라져, 그 공적을 만세에까지 전하게 되었습니다. 상고(上古) 이래의 군주들도 폐하의 위엄과 덕망에는 미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자, 시황제가 기뻐하였다.[1]

순우월(淳于越)의 비판
이에 제(齊)나라 사람인 박사 순우월이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은(殷), 주(周)의 왕조가 천여 년 간 지속되면서 자제와 공신들을 봉하여 왕실을 보위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제 폐하께서 천하를 소유하셨지만 자제분들께서는 오히려 평민으로 계시는데, 만약 전상(田常)이나 진(晉)의 육경(六卿)같은 신하들이 갑자기 나타나면 황제를 보필할 자가 없으니 어떻게 구원할 수가 있겠습니까? 고인을 본받지 않고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는 일은 이제껏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지금 주청신이 면전에서 아부하여 폐하의 과실을 가중시키려고 하니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가 아닙니다.”라고 하자, 시황제는 대신들에게 이 의견을 논의하도록 하였다. 비록 그의 의견이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에 기인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진나라의 신제도인 군현제를 비판하는 순우월의 발언에는 봉건제도로 돌아가자는 주장과 함께 유가사상이 담겨있었다. 이는 진나라의 통치이념인 법가사상과 충돌되는 것이었다.

이사(李斯)의 진언
이에 진의 승상 이사(李斯)는 순우월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오제(五帝)의 다스림이 서로 중복되지 않았고, 하(夏), 상(商), 주(周) 삼대(三代)가 서로 이어받지 않고 각자의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린 것은 서로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시대가 변하여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대업을 창시하여 만세의 공덕을 세웠으니, 진실로 어리석은 유생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순우월이 말한 것은 삼대(三代)의 일이니 어찌 본받을 만한 것이겠습니까? 전에는 제후들이 서로 다투었으므로 높은 관직과 후한 봉록으로 유사(遊士)들은 초치하였습니다.
이제 천하가 안정되어 법령이 통일되었고, 백성들은 집안에서 농공(農工)에 힘쓰고, 선비들은 법력과 형법을 학습하고 있거늘, 지금 모든 유생들은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을 배워 당세(當世)를 비난하며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승상인 신 이사가 황공하게도 아뢰옵니다. 그러므로 제후들이 서로 군사를 일으키고, 하는 말마다 모두 옛것을 말하며 지금을 비난하고, 허망한 마을 늘어놓아 실질적인 것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마다 자기가 개인적으로 배운 것을 찬양하여 조정에서 건립한 제도를 비난했던 것입니다. 이제 황제께서 천하를 통일하시어 흑백을 가리고 모든 것이 지존(至尊) 한분에 의해서 결정되도록 하셨거늘, 개인적으로 학습하여 함께 조정의 법령과 교화를 비난하고, 법령을 들으면 각자 자기의 학문으로써 그 법령을 의론하며, 조정에 들어와서는 마음속으로 비난하고 조정을 나와서는 길거리에서 의논하며, 군주에게 자신을 과시하여 명예를 구하고 기발한 주장을 내세워서 자신을 높이려고 하며, 백성들을 거느리어 위에서는 황제의 위세가 떨어지고 아래에서는 붕당(朋黨)이 형성될 것이오니, 그것을 금지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아래와 같이 <분서(焚書)>를 진언했다.

"신이 청하옵건대 사관에서 명하여 진(秦)의 전적이 아닌 것은 모두 태워버리고, 박사관(博士官)에서 주관하는 서적을 제외하고서 천하에 감히 수장되어 있는 『시(詩)』, 『서(書)』 및 제자백가의 저작들을 지방관에게 보내어 모두 태우게 하며, 감히 두 사람이 『시(詩)』, 『서(書)』를 이야기하는 자는 저잣거리에서 사형시켜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며, 옛것으로 지금을 비난하는 자는 모두 멸족시키고, 이 같은 자들을 보고서도 검거하지 않는 관리는 같은 죄로 다스리소서. 명명이 내려진 지 30일이 되어도 서적을 태우지 않는 자는 경형(黥刑)을 내리어 성단형(城旦刑)에 처하십시오. 다만 불태워 제거하지 않을 서적은 의약, 점복, 종수(種樹)에 관계된 서적뿐이며, 만약 법령을 배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관리를 스승으로 삼게 하옵소서.”[2]

이에 진시황이 영을 내려서 “그렇게 하라”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때 실제로 소각된 서적 대부분은 6국의 역사서들이었으며, 제자백가 서적은 그 다음이었고, 유가 경전을 살아남아 박사부의 관리를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학자들의 분로를 샀고, 최악의 <문화 참사>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었다. [3]

갱유(坑儒)

의의

진시황은 서적을 모두 태운 뒤에 진나라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 460여 명을 구덩이에 생매장했다. 그러나 이 갱유에 대해선 사실로 밝혀지지 않았으며 후세 유학자가 꾸며낸 것으로 추측하는 설이 있다.

배경

방사(方士)의 유언비어와 진사황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염원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자신의 호칭을 진왕(秦王)에서 황제(皇帝)로 격상시키고, 태산(泰山)에 올라 제사를 지내며,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는 등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에 기원전 219년, 제나라 사람 서복(徐福)이 진시황에게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

“해중(海中)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 이름은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라고 한다. 선인(仙人)이 여기에 있다. 청컨대, 재계(齋戒)하여 동남녀(童男女)와 함께 그것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약을 말한다. 이에 진시황은 동남녀(童男女) 3천여 명과 보물로 선단을 꾸려 장생불사의 선약을 구해 올 것을 명했으나 서복은 오랫동안 찾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은 함양 내의 방사들을 시켜 불로불사의 약을 찾도록 한다. 진시황은 연(燕)나라 사람 노생(盧生)에게 선문고(羨門高)라는 선인을 찾아가게 하였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선인이 나타나지 않자 노생은 진시황에게 아래와 같은 변명을 한다.

“신들이 영지(靈芝), 선약(仙藥), 신선을 찾아다녔으나 매번 만나지 못했는데, 마치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소견으로는 황제께서 때때로 미행(微行)하시어 악귀를 물리치시고, 악귀가 물리쳐지면 진인(眞人)이 올 것입니다. 황제께서 머무르시는 장소를 신하들이 알게 되면, 신선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받게 될 것입니다. 진인은 물에 들어가도 젖지 않으며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운기(雲氣)를 타고 다니며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지금 황제께서 천하를 다스리시나 아직은 안정을 이루지 못하셨으니, 원하옵건대 황제께서 거처하는 궁궐을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신다면 아마 불사(不死)의 약을 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4]

이에 진시황은 함양 부근 200리 안의 궁관(宮關) 207곳을 구름다리와 용도(用道)로 서로 연결시키고 휘장, 종고(鍾鼓), 미인들로 그곳을 채웠으며, 모두 등기된 부서에 따르게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자신이 행차하여 머무를 경우에는 그 거처를 말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이는 그가 얼마나 불로장생의 염원이 간절하였는지를 보여준다.

후생(侯生)과 노생의 비방
이와 같은 진시황의 폭압적인 정치에 후생과 노생은 모의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고는 바로 도망쳐버렸다.

“진시황의 사람됨은 천성이 고집이 세고 사나워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며, 제후 출신으로서 천하를 통일하여 마음먹은 대로 일을 행하고, 옛날부터 지금까지 자기보다 나은 자가 없다고 여기고 있소. 그리고 전문적으로 옥리를 임용하였으니 옥리는 모두 황제의 친애와 총애를 받고 있거늘, 박사는 비록 70여명이지만 숫자를 충족시켰을 뿐 중용하지는 않았으며, 승상과 대신들은 모두 이미 결정된 일들을 명령받으니 황제에 의해서 모든 일이 처리되고 있소.
황제는 형벌과 살육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세우기를 좋아하니 천하가 죄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봉록만을 유지하려고 할 뿐이며 감히 충성을 다하려고 하지 않소. 황제는 자신의 허물을 듣지 않고 날마다 교만해지며, 아랫사람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속이고 기만하며 황제의 비위를 맞추고 있소.
진의 법률에는 두 가지 이상의 방술(方術)을 겸할 수 없게 하였으며, 만약 그 방술에 영험이 없으면 즉시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소. 그러나 성상(星象)과 운기(雲氣)를 관측하는 자가 300명에 이르고 모두 뛰어난 선비들이지만 두려워하고 기피하여 감히 황제의 허물을 직언하지 못하고 있으며, 천하의 일이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두 황제에 의해서 결정되니 황제가 읽어야 할 문서의 중량을 저울질해야 할 지경이며 밤낮으로 정량이 있어서 그 정량에 이르지 못하면 휴식을 할 수가 없소. 권세를 탐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니 그를 위해서 선약을 구해주어서는 안 될 것이오.”

내용

이 소식을 들은 진시황은 매우 분노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내가 노생 등을 존중하여 그들에게 많은 것을 하사하였으나 이제는 나를 비방하면서 나의 부덕(不德)을 가중시키고 있으며, 내가 사람을 시켜서 함양에 있는 이런 자들을 조사해보니 어떤 자는 요망한 말로써 백성들을 혼란시키고 있었다.”

이에 어사(御史)를 시켜서 노생 등을 체포하도록 하고 비방에 동조한 자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노생과 후생은 끝내 체포하지 못하였으나, 조사과정에서 진시황이 친히 법령으로 금지한 것을 범한 자들 460명을 잡아들였다. 여기에는 후생과 노생을 아는 자, 그들과 비슷한 방술을 구사하는 자, 비방에 관련된 유학자들이 포함되어있었다. 진시황은 이들 460명을 사형 죄로 판결하여 모두 함양에 생매장하도록 하였다.[5]

부소(扶蘇)의 간언

이러한 진시황의 정치에 대해 그의 장자(長子) 부소(扶蘇)는 아래와 같이 간언하였다.

“이제 막 천하가 평정되었으나 먼 지방의 백성들은 귀속되지 않았으며 유생들은 모두 『시(詩)』, 『서(書)』를 암송하며 공자를 본받고 있는데, 지금 황제께서 법을 엄하게 하여 그들을 얽어매시니, 소자는 천하가 불안해질까 두렵습니다. 황제께서는 이런 사실을 살펴주소서.”[6]

진시황은 이에 매우 노하여 부소를 북쪽으로 상군(上郡)에 파견해버렸다.

분서갱유에 대한 평가

분서갱유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문화탄압사건으로, 진나라 이전의 문화가 소실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법가로 사상을 통일하는 와중에 유가사상과 유학자의 피해가 생기자, 진나라는 오히려 지식인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폭압적인 정치는 진나라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7]

참고

서복의 행방

기원전 210년 진시황이 다시 낭야를 순시할 때 서복은 자기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두려워하여, 바다에 커다란 상어가 있어 불사약을 찾는 것을 방해한다고 거짓말을 두러대면서, 반드시 활을 잘 쏘는 궁수를 파견하여야만 이를 퇴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진시황은 또 서복에게 동남녀(童男女) 3천 명과 오곡의 종자와 많은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바다에 나가도록 하였다.[8]

서복에 관한 전승

이로써 서복이 정말로 출발을 했는지는 「사기」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서복이 배를 타고 봉래도까지 갔다는 전승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서복이 표류하게 되자 잔 하나를 바다에 넣었는데 잔이 둥둥 떠서 길을 인도했고, 이에 서복 일행은 잔을 따라 봉래도에 상륙했다고 한다.[9]

그 봉래도는 일본이라는 설이 있으며, 일본 중부 긴키 지방의 와카야마현 근처에 있는 신구(新宮)시와 구마노(熊野)시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또한 사가(佐賀)현에는 서복의 상륙을 기리는 기념비가 있다.[10]그 외에도 서복이 왔다는 전승을 가진 지역은 열 손가락으로도 모두 꼽을 수 없다고 한다.

  1.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역. 까치(1994)
  2.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역. 까치(1994)
  3. 홍문숙·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청아출판사(2013)
  4.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역. 까치(1994)
  5.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역. 까치(1994)
  6.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역. 까치(1994)
  7. 홍문숙·홍정숙. 「중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청아출판사(2013)
  8.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역. 까치(1994)
  9. 진순신.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박현석. 살림(1990)
  10. 진순신.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 박현석. 살림(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