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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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호(西湖) 소개

杭州 西湖浙江省 杭州市의 서쪽에 위치해있으며, 호수와 산이 서로 어우러진 수려한 경치와 수많은 명승고적이 있는 곳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유명하며 ‘지상의 천당’이라고 칭송 받는다. ‘西湖’라는 이 명칭은 최초로 唐代에 사용하기시작하였으며, 당대 이전에는 武林水, 明圣湖, 金牛湖, 龙川, 钱源, 钱塘湖, 上湖 등으로 불렸다. 2011년 6월 24일 杭州 西湖는 정식으로《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명칭의 유래

西湖의 내력을 살펴보면 여기에는 아름다운 신화, 전설, 민간 고사들이 매우 많다. 그 중에 西湖의 명칭과 관련된 이런 이야기도 전해내려 온다. 아주 먼 옛날에 하늘의 玉龙과 金凤이 은하 옆의 선도(전설 속에 나오는 신선이 거처하는 섬)에서 백옥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이 함께 수 십 년 동안 옥을 다듬었더니 백옥은 곧 반짝반짝 빛나는 명주로 변하였다.
이 명주의 빛이 비치는 곳은 나무가 항상 푸르고 꽃이 만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西王母에게 명주가 발각되고 말았다. 西王母는 곧 신군(神軍)과 신병(神兵)을 파견하여 명주를 빼앗아버렸다.
玉龙과 金凤은 곧바로 따라가 명주를 되찾으려고 했지만 西王母는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서로 명주를 쟁탈하려는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西王母의 손에 힘이 풀려 명주가 인간세상으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 명주는 잔물결이 반짝이는 西湖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 玉龙과 金凤도 명주를 따라 인간세상으로 내려온 뒤 玉龙山(곧 玉皇山)과 凤凰山이 되어 영원히 西湖를 수호하였다고 한다.


서호 십경(西湖十景)

平湖秋月- 平湖에서 바라보는 가을 날 보름달의 운치

平湖秋月 [1]

平湖秋月 풍경구는 白堤의 서쪽 끝과 孤山의 남쪽 기슭에 위치해있으며, 外西湖와 인접해 있다. 西湖十景 중 하나지만, 남송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平湖秋月은 정확한 위치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남송 시기부터 원명 두 왕조에 이르기까지 문인들이 이 경치에 대해 읊은 시들을 보면 대부분 늦은 밤 호수에 배를 띄우고 배 안에서 달을 감상하며 쓴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남송 때 孙锐가 쓴 시 중 ‘달빛 차가운 밤에 강물이 얼어붙어 흐르지 않으니, 노 젓는 노래 가락은 어느 곳에 배 띄워야 들리려나.’라는 구절과 명대 洪瞻祖가 쓴 시 가운데 ‘가을날 뱃사람이 파도가 넘실대는 호수 가운데 있으니, 속세에서의 화려한 생활은 아무것도 아니어라.’라는 구절을 들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명나라 万历(중국 명나라 神宗의 연호) 연간의 西湖十景 목각판화 가운데 《平湖秋月》이라는 작품도 여전히 여행객들이 배 안에서 머리를 들고 달을 바라보는 것을 작품 의 주제로 삼고 있다.

平湖秋月은 西湖에서 달 구경을 하기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원래 이곳은 孤山 望湖亭으로 불렸다. 어느 8월 15일 중추절, 绍兴의 재자(才子) 徐文长은 杭州에 있었다. 그는 天竺 岣嵝산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며 달을 감상했다. 그는 몇 잔의 홧술을 마시고서, 약간 취해 눈이 풀렸다. 그는 갑자기 시우(诗友)들이 西湖의 孤山 望湖亭가 달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 달빛을 따라 천천히 孤山 望湖亭을 향해 걸어갔다.

徐文长은 길을 걸으며 한편으로 西湖의 달빛을 감상하고 한편으로는 달을 노래하는 시를 읊느라 이미 望湖亭에 도달했는지도 몰랐다. 望湖亭은 호수에 인접한 건축물로서, 外湖의 모든 풍경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望湖亭에 도착했을 무렵, 하늘에 걸려있는 밝은 달, 시원한 바람, 푸른 물은 마치 달나라 궁전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저절로 시를 짓고자 하는 흥이 일어났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때, 홀연히 望湖亭 안에서부터 시를 읊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정자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고, 붉은 초가 높이 비치는 탁자 위에는 수박·붉은 마름·월병 등 각양각색의 제철과일과 안주가 있었다. 보아하니, 문인들과 선비들이 이 곳에서 술을 마시고 달을 감상하면서 시를 지으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 했다. 徐文长은 이 떠들썩한 장면을 구경하고자 아무 생각없이 걸어 들어갔다.

과연 西泠 시문학 단체에 속한 문인과 선비들이 望湖亭 안에서 술을 마시며 달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신바람이 나서 술을 마시려고 하던 차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정적에 휩싸였다. 주최자는 徐文长이 단정한 문인의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비록 옷은 소박하게 입었으나, 자태가 우아하며 고상하였기 때문에 그를 소홀히 대접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바로 일어나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하며 말했다. “오늘은 중추절입니다. 우리들은 西泠시문학 단체의 회원들인데, 특별히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달을 감상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읊고 있었습니다. 그대도 혹시 관심이 있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어 한 수 가르쳐 주시지오.” 그는 말을 마치며 사방에 걸린 서화를 가리켰다.

徐文长이 천천히 정자를 한 바퀴 돌아 벽에 걸린 시화를 쭉 훑어보니, 그것이 모두 평범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최자는 그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면서도, 떠나려고도하지 않은 것을 보고, 일부러 그를 난처하게 하려 말했다. “귀하가 고상하면서 예의가 바른 것을 보니, 그대는 틀림없는 대가입니다. 오늘 그대를 이리 만난 것을 지극히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시 한 수와 그림 한 점으로 저희의 무지함을 일깨우고, 이 모임에 빛을 더해주기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피식’거리며 냉소를 몇 번 지었다.

徐文长은 시화를 다 보고 난 뒤, 원래는 정자에 잠시 머물다가 가려고 하였으나, 그들의 교만한 태도와, 비웃음을 보고 속으로 ‘좋다. 마침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을 그려낼 지필묵이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 사람들과 한바탕 놀며. 한 번 재미있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양하지 않고 긴 책상 앞에 와서 새하얀 선지를 깔고, 양털 붓을 쥐고 먹물을 짙게 묻혔다. ‘휙휙’ 몇 번 붓을 놀리자 하늘에는 둥근 달이 나타났고, 또 몇 번 ‘휙휙’ 붓을 놀리자 물속에도 둥근 달이 비쳤다. 그 다음에 또 몇 번 ‘휙휙’ 붓을 놀리자 먼 곳의 산색이 흐릿하게 드러나고 가까운 호수의 정자가 뚜렷이 나타났다. 그림속 호수 위에는 일엽편주가 있었고, 한 늙은 어부가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西泠 시사의 선비들이 모두 이를 둘러싸고 구경했다. 그들은 徐文长이 눈 깜짝할 사이에‘平湖秋月’을 그려내는 것을 보았다. 그가 수묵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고 글씨를 써내려가는 폼은 예사롭지 않아 모두를 놀랐다. 주최인은 徐文长이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을 보고, 그의 글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그림 위에 이 그림에 어울리는 시 한 수를 써주길 청했다. 徐文长도 사양하지 않고 붓을 들어 “천상에 한 바퀴의 둥근 달, 수중에 둥근 한 바퀴의 달.”이라고 두 구절을 썼다. 그러자 주최자는“‘천상에 한 바퀴의 둥근 달, 수중에 둥근 한 바퀴의 달’이라니,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비웃었다. 선비들은 자신들이 비평하는 중에도 徐文长이 묵묵하게 다시 붓을 들어 두 구를 써내려 가는 것을 보았다. 徐文长 이 계속 써 내려간 두 구는 다음과 같다. “한 색의 호수 빛은 만 경의 가을이고, 천당과 인간 세계 모두 하나의 둥근 달이다.”

선비들 모두가 놀랐다. 그들은 다음에 이어 쓸 만한 좋은 글귀가 없을거라 여겼을 뿐만 아니라, 徐文长이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써 낼 줄도 몰랐다. 4구를 연결하여 한 번 읽어보니, 진실로 신비감이 넘치는 글이었고, 그 속에 사물 묘사와 감정 표현이 잘 섞여 드러나 있었다. 이 시를 읽고서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 정말로 아름다운 구절입니다. 귀하가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저희들이 실례했습니다.”

徐文长은 이를 듣고, 모두를 향해 미소를 지은 뒤, 다시 붓을 들어 “평평한 호수 한 색으로 온통 가을빛이고, 호수의 빛은 아득하고 물은 멀리 흐르네. 가을 달 둥글어 세상이 작아 보이고, 달빛은 사계절 가운데 가을이 최고다.”라는 시 한수를 지었다. 선비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이 시가 남다르게 지어졌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매 구절의 첫 글자가 특별히 커서, 이 첫 글자들만 이어서 읽어보니,‘平湖秋月’ 네 글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소위 말하는 ‘머리말 감추기’ 시 형식이었다. 모두들 박수를 치며 徐文长을 절찬했다. 그들은 徐文长에게 이름을 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짓다가 달빛을 밟으며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断桥残雪 - 다리에 쌓인 눈이 중간부터 녹기 시작하여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이보이는 풍경

断桥残雪 [2]

断桥残雪은 西湖에서 유명한 풍경으로 눈 내린 겨울, 멀리서 다리를 쳐다보면 호수 표면에 다리가 드러날 듯 말 듯 하여 断桥라 부른다. 이는 西湖十景 중 하나에 속한다.

断桥는 杭州시 西湖 白堤의 동단에 위치하며, 宝石山을 등지고 있다. 또한 杭州城을 마주보고 있으며, 外湖와 北里湖의 분수 지점이다. 断桥는 비교적 높게 위치하여 시야가 넓어 겨울에 西湖의 설경을 감상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이다. 눈이 멎고 날이 개기 시작할 때 宝石山 위에 서서 멀리 남쪽을 바라보면, 온 西湖가 눈에 하얗게 뒤덮여 있고, 白堤에는 눈 쌓인 버드나무와 서리 맞은 복숭아나무가 늘어서 있다. 断桥의 돌다리 위는 햇빛에 직접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눈이 녹아 반짝이는 다리 난간이 드러난다. 그러나 다리의 양쪽 끝은 햇빛에 노출되지 않아 여전히 새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다. 희미하게 돌다리가 보일 듯 말 듯 드러나고, 다리 배수로 안의 흰 부분은 하얗게 빛이 나기 때문에 다리 표면의 암갈색과 대비 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끊어진 듯 만듯하여 断桥라는 이름을 얻었다.

“断桥残雪”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당대 张祜의《题杭州孤山寺》라는 작품인데, 그 작품에는 “누대는 푸른 산처럼 솟았고, 오솔길 하나 호수 가운데로 이어졌네. 비 내리지 않아도 산은 늘 촉촉하고, 구름 없어도 물은 절로 그늘졌구나. 断桥의 거친 이끼 껄끄럽고, 빈 뜰에 떨어진 꽃 수북하네. 다만 서창의 달 떠올리는데, 종소리 북쪽 숲에서 들려오네.”라고 적혀있다.

시 속의 “断桥의 거친 이끼 껄끄럽고”라는 구절에서 断桥가 원래 이끼가 뒤섞여 얼룩덜룩한 색을 지닌 오래 된 돌다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디 이끼가 끼어있던 다리에 아직 눈이 막 녹기 시작했을 때의 모습이 마치 전쟁 뒤의 황량해진 폐허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렇게 断桥残雪이라는 西湖의 독특한 풍경을 품고 있는 것이다 .

柳浪闻莺 - 버드나무에서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

柳浪闻莺 [3]

柳浪闻莺은 근 40여 년 동안 끊임없이 개발과 건설을 겪었다. 과거 제왕만이 향유했던 御花园(황제가 노니는 화원)은 보통 사람들의 낙원으로 변모되었다. 새파란 버드나무와 부드럽게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가 여전히 공원경관의 기조를 이루고 있고, 호수를 따라 천미터에 달하는 둑과 도로를 따라 수양버들 및 狮柳·醉柳·浣沙柳등 특색 있는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다. 御花园 ‘闻莺馆’을 피해 멀지 않은 곳에 ‘百鸟天堂’이라는 초대형 새장을 설치해 놓았는데, 꽃이 만발한 춘삼월이면 버드나무가 한들거리고 앵무새 소리가 청아한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놓았다.
'闻莺馆’ 동쪽에는 잔디밭과 빽빽한 숲으로 구성된 友谊园 풍경구가 있어서 일본벚꽃을 옮겨 심어 놓았고, 북쪽에는 돌을 깔아 단을 쌓아 놓았는데, 그가운데 ‘중일 평화 기념비’가 우뚝 서있다. 闻莺馆 서쪽에는 柳浪闻莺을 중건할 때 호수를 메워 만든 큰 잔디밭이 있는데, 이 곳의 풀빛은 서호의 푸른 파도와 푸른 산과 멀리멀리 함께 이어져 있다. 대 잔디밭의 북쪽에는 강희제 御題 ‘柳浪闻莺’ 정자비를 옮겨 세워두었다. 남쪽에 있는 높고 큰 교목 숲은 잔디밭, 버드나무 해안 및 호수와 산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치를 만들어 냄과 동시에 고유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경치를 구성하고 있다.

공원 북부에 있던 钱王사당은 강남 개인 정원의 스타일과 구조 가진 정원으로 개축되었으며 聚景园의 옛 명칭을 원용했다. 정원 내에 정자와 누대와 다락과 집, 석가산과 샘과 못, 작은 다리와 흐르는 물, 낮은 담과 투각 도안으로 장식된 창문, 진귀한 화초는, 각각 자신의 특색을 뽐내면서도 한 대 어울려 멋진 풍경을 이루고 있다. 정원전체의 구불구불한 오솔길은 깊숙한 곳에 이어져 있어 또 다른 세상인 듯 착각하게 만든다. 공원의 동남쪽은 사람들이 정원에서 노닐며 문화 오락 활동을 즐길 수 있는 하는 장소가 되어, 노천 무대가 건설되었다. 이리하여 杭州 시민과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아침에 단련을 하고 한가롭게 휴일을 보내거나 명절과 축제를 지내기에 좋은 장소가 되었다. 매년 여름과 가을이면, 이곳에서 더위를 잊게 하게 하는 夜花园과, 노래와 춤, 희곡, 영화 등이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다채롭게 펼쳐진다. 부정기적으로 거행되는 각양각색의 꽃전시회와 연등회, 민속공연 등은 사람들을 끌어당긴다.

南屏晚钟 - 南屏山의 저녁 종소리

南屏晚钟 [4]

南屏晚钟은 아마 西湖十景 가운데 가장 일찍 세상에 나온 풍경구일 것이다. 북송 말 매우 유명한 화가 张择端은 일찍이《南屏晚钟图》를 그렸다. 이 그림이 그의《清明上河图》만큼 미술계에서 이름을 날리지는 못했으나 오히려 명대《天水冰山录》에는 기록되어 있다. 南屏山은 길게 이어져 西湖의 남쪽 연안에까지 늘어져있다. 산의 높이는 100m를 넘지않으나 산의 형세는 그 길이가 천여 미터 넘게 확장되어 있다.

산 위에는 괴석이 아름답게 솟아있고, 푸른 나무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맑은 날이면 산에 가득한 안개가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서로 대조되어 그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비가 오고 안개가 낀 날이면 운무가 이리저리 끼어 있는 산의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는 모습 같아 보인다. 후주(954년)시기 오월의 钱弘叔은 南屏山 산자락에 慧日永明院을 지었다. 이후 이 사찰은 灵隐寺와 함께 西湖 남북에 우뚝 솟은 양대 불교 도장 가운데 하나인 净慈寺가 되었다.

南屏山 산자락의 또 다른 유명한 불교 사찰은 兴教寺로 북송시기(972년)에 짓기 시작하였다. 兴教寺는 일찍이 불교 天台宗 山家派의 근거지였다. 净慈寺와 兴教寺는 부근의 크고작은 사찰과 함께 灵隐과 天竺의 뒤를 잇는 西湖 위의 또 다른 불교 사찰 군락을 형성하였다. 저녁에 울리는 북과 새벽에 치는 종, 범패와 불상, 향 연기와 촛불의 빛으로 인해 南屏山은 이 때부터 ‘佛国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南屏晚钟만의 정취를 형성하였다.

南屏山 일대의 산마루는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굴이 많으며, 게다가 산봉우리가 장벽처럼 서 있기 때문에 절에서 밤에 종이 울릴 때마다 종소리가 진동하여 산 위까지 울려퍼진다. 암석, 동굴 등은 소리가 다가오면 음파의 진동을 더욱 빠르게 하여 진폭을 급속히 증대시킨 후 공진을 형성한다. 이런 과정은 산 전체가 스피커 역할을 하게 만들어 음파를 증폭시킨다. 이렇게 종소리는 똑같은 주파수로 西湖의 상공까지 날아가서 곧바로 西湖의 연안까지 도착하게 된다. 이 소리는 맞은편의 화성암으로 구성되어 있는 葛岭에 부딪혀 메아리로 돌아온다.

苏堤春晓- 苏堤에서 보는 안개 낀 봄날 아침의 풍경

苏堤春晓 [5]

苏堤는 남쪽 南屏山에서 시작되어 북쪽 栖霞岭 아래까지 이르며, 전체 길이는 3km이다. 苏堤는 북송 문학가이자 서예가인 苏东坡가 杭州의 행정관장으로 재직할 당시西湖를 준설 할 때 나온 흙을 이용하여 건축한 것이다. 후세 사람들은 苏东坡가 西湖를 통치한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이것을 苏堤라 명명했다. 긴 제방은 南山과 北山을 연결하여 西湖에 곱고 아름다운 경관을 더해주었다. 남송 시기 苏堤春晓는 西湖十景에 가장 먼저 들어가게 되었고, 원대에는 또한 ‘六桥烟柳’라 칭해지며 钱塘十景으로 선정되었다. 이는 苏堤春晓가 사람들이 매우 좋아하는 풍경임을 알 수 있게 한다.

겨울이 지나면 苏堤는 마치 느릿느릿 오는 봄을 알리는 사절처럼 버드나무가 강 언덕에 끼어있고, 산뜻한 복숭아나무는 반짝거린다. 또한 호수의 물결은 마치 거울처럼 아름다운 자태를 비추고 있어 매우 아름답다. 아침햇살에 비친 이슬과 달이 서산으로 질 때 서서히 바람이 불어와 버드나무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 할 수 있으며, 둑 위에 서서 이 풍경을 바라보면 넋을 잃기 쉽다.

苏堤의 길게 뻗은 제방에 여섯 개의 다리가 있어서 여행들이 유유히 산책하며 주위의 많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관광 코스가 되었다. 둑과 다리 위를 걸으면 호수와 산의 경치가 마치 그림처럼 전개되어있어, 매우 아름답다. 苏堤 위의 여섯 개의 아치형 다리는 남쪽부터 북쪽의 순으로 映波, 锁澜, 望山, 压堤, 东浦, 跨虹이다. 映波桥는 花港公园과 인접해있고, 비가 쏟아지듯 가득히 드리운 버드나무가 있으며, 안개가 자욱하게 낀 수면은 출렁이며 흔들린다. 锁澜桥 가까이는 小瀛洲가 보이고 멀리는 保叔塔가 보이며 가까운 곳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고 먼 곳은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다. 望山桥 위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丁家山의 푸른 이끼가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双峰插云의 우뚝한 모양이 눈에 들어온다. 压堤桥는 대개 苏堤 남북의 황금 분할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날 호수의 배가 동서로 드나드는 입구였다. 苏堤春晓의 景碑亭은 다리의 남쪽에 있다. 东浦桥는 束浦桥의 와전이라는 추측이 있기도 한 이곳은 호수 위에서 일출을 구경하는 좋은 장소 중 하나이다. 跨虹桥에서는 비 온 후 드넓은 하늘에 뜬 무지개를 볼 수 있으며, 호수와 산은 햇살을 받아 선경에 들어온 것 같다.

雷峰夕照 - 雷锋에서 바라보는 저녁노을의 풍경

雷峰夕照 [6]

雷峰塔은 원래 雷锋山 위에 지어졌으며, 西湖 남안의 南屏山 日慧峰 아래의 净慈寺 앞에 위치해 있었다. 雷锋은 南屏山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산인데, 물가에서 갑자기 우뚝 솟아올랐으며, 수목도 울창하였다. 산꼭대기에는 원래 오월시기에 지은 雷锋塔이 있었고, 이 탑은 일찍이 西湖의 대표적인 풍경 구역이었다. 이 탑은 北山의 保俶塔과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서로 호응하였다. 雷锋塔이 아직 무너지기 전에 西湖 위에는 두 개의 탑이 비쳐서 남쪽과 북쪽이 서로 대비되는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었다. 1924년 雷锋塔이 무너진 뒤에 西湖十景 중 하나인 ‘雷锋夕照’도 유명무실해 졌을 뿐만 아니라, ‘南山의 경치도 모두 '허상’이 되었고, 심지어 산의 이름조차도 雷锋夕照에서 雷锋이 사라진 夕照山이 되어버렸다.

花港观鱼 - 花港에서 노니는 붉은 잉어를 감상하다.

花港观鱼 [7]

花港观鱼 공원은 苏堤의 남쪽 끝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西里湖와 小南湖 사이의 반도 위에 있다. 남송 시기에 내시 允升이 일찍이 이곳에서 멀지 않은 花家山 아래에 오두막집을 지어 개인 화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화원의 꽃과 나무는 울창하면서도 잘 정돈 되어 있으며, 물을 연못에다 끌어와 오색의 물고기를 키우기도 하였다. 이런 정원의 아름다운 풍경때문에 점점 많은 여행객들이 자주 찾아와 이곳의 풍경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당시에는 卢园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이 花家山 근처에 있어 花港이라고 다시 고쳐 불렀다. 궁정화가가 西湖十景의 연화를 그릴 때 이 풍경을 그 속에 담았다.
청대 康熙 38년 (1699), 玄烨황제는 가마를 타고 西湖에 이르러 관례에 따라 花港观鱼라는 제호를 써서 호수 옆에 석비를 세웠다. 이후 乾隆황제가 강남에 와서 西湖를 방문했을 때 다시 시를 지은 뒤 그 제목을 비석의 뒷면에다 새겼는데, 시 중에는 ‘花家山 아래에 꽃이 흐르는 항구 가 있고, 꽃이 물고기 몸에 붙으니 물고기가 꽃을 먹는구나.’라는 구절이 있다.(이 석비에 새겨진 건륭제의 친필은 고기 어(魚)의 아래 네 점이 불 화(火)를 의미한다고 하여 점 하나를 빼고 세 점으로 삼수(三水)를 표시하는 缺筆이라는 한자 유희를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三潭印月 - 호수에 비친 달이 마치 세 개처럼 보이는 풍경

三潭印月 [8]

소위 三潭이라고 하면 3개의 석탑과 그 주위의 수역을 말한다. 이 석탑은 송대 元4년(1089년)에 지어졌으며, 높이는 각각 2m이다. 물빛이 반짝이는 호수 수면 위에 세워져 있으며, 이 세 개가 정삼각형을 형성한다. 小瀛州 이남의 호수는 달을 구경하기 가장 좋은 곳으로 물이 마치 심연(深淵)처럼 깊어 달이 깊숙하고 그윽하게 비친다.

苏轼은 西湖의 진흙을 정리할 때 이곳을 가장 깊게 판 뒤 수역의 경계와 호수의 진흙의 퇴적 상황을 표시하기 위해 석탑을 세웠다. 中秋节가 다가오고 밝은 달이 하늘에 걸릴 때마다 사람들은 속이 빈 탑 안에 촛불을 넣어 그 불빛이 바깥으로 스며 나오게 하였다. 이 때 탑의 그림자, 구름의 그림자, 그리고 달의 그림자가 함께 섞이고, 촛불의 빛과 달빛, 호수의 빛이 서로를 비춰 산뜻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이룬다. 현존하는 세 개의 탑은 명나라 天启 연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세 탑의 높이는 약 2m이며, 이 세 개의 탑은 각 변이 62m가 되는 이등변 삼각형 모양을 형성한다.

苏堤를 건설한 이후 苏轼은 ‘어떻게 해야 진흙이 다시 쌓이지 않고, 수초가 다시 자라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이들의 생각들을 모아 아주 현명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호수 연안을 사람들에게 대여한 뒤 마름(연못이나 늪에 사는 한해살이풀)을 심게 하는 것이었다. 마름은 제때에 물속의 잡초를 없애주는 효과를 갖고 있어 이 방법을 쓰면 농민들은 신속하고 깨끗하게 수초를 정리할 수 있고, 다시는 진흙이 쌓이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의 임대료를 얻어서 이 돈을 西湖의 회복과 유지 보호에 쓸 수도 있고, 몇몇 이들의 생계를 해결해 줄 수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일거삼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西湖는 너무나 컸다! 어떤 사람들이 호수에 마음대로 식물을 심게 되면 관청에서도 제때에 감독하고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 또한 苏轼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西湖 대부분 수역의 시야를 확보하고, 맑고 투명한 수역을 지켜내기 위해 苏轼은 西湖의 중심에 세 개의 작은 돌탑을 지었고, 이 세 개의 석탑은 서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로 한 하나의 수역을 조성하여 사람들이 이 수역 안에 식물을 심는 것을 엄금하였다. 이 작은 석탑들은 이후에 가장 유명한 西湖의 아름다운 풍경인 三潭印月이 되었다.(현재 현재 중국 화폐 도안으로 사용되고 있다)

双峰插云 - 구름과 안개가 자욱할 때 구름 사이에 南高峰과 北高峰이 낀 것 같은 풍경

双峰插云 [9]

높고 큰 天目山은 동쪽으로 뻗어있는데, 그 산맥의 한 자락이 西湖와 만나 남북으로 갈라져 西湖 풍경구의 南山과 北山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南高峰과 北高峰은 모두 옛날에 승려들이 점유한 곳으로 두 산꼭대기에 지어져 있는 佛塔은 멀리 사찰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뭇 봉우리들보다 높이 솟아 있었다. 봄과 가을에 날씨가 좋은 날에는 푸른 이끼와 하얀 안개, 탑의 끝이 구름 속에서 때로는 숨고 때로는 드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그 기세가 범상치 않다. 이곳은 남송시기에 西湖十景에 속하게 되었으며, 청나라 康熙황제가 그 이름을 双峰插云으로 고치고, 洪春桥 부근에 景碑亭을 지었다. 双峰의 탑이 무너진 지 오래되어 이제는 사람들이 이 경치에 원래 내포되어 있었던 의미를 알기 어렵게 되었다.

南高峰의 해발고도는 257미터이며, 산을 오르다 보면 높은 산세와 험준한 벼랑을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산꼭대기에서 동쪽으로 내려다보면 西湖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 전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北高峰의 해발고도는 314미터이며, 이 산의 서쪽에는 灵隐寺로 오르는 수천 개의 돌계단이 있으며, 길은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맑은 계곡물이 순환하며, 수목도 무성하다. 산의 동쪽에는 케이블카도 있어 산을 왕복하는데 6~7분정도 소요된다.

曲苑风荷 - 여름날 호수의 연꽃이 만개해 향이 진동하는 풍경

曲苑风荷 [10]

曲苑风荷는 여름날 연꽃이 만개한 경치를 주제로 하며, 苏堤春晓에 이어 제2의 西湖十景이 되었다. ‘曲苑’은 원래 남송 조정이 설립한 술을 담그는 수공업 공장이었는데, 지금은 灵隐路 洪春桥 부근에 위치해 있다. 당시에는 西湖 연안에 인접해 있었으며, 가까운 호수 연안에서 연꽃을 양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름이 되고 산들 바람이 천천히 불어올 때마다 연꽃향기와 술 향기가 사방에 흩뿌려져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청조의 康熙황제는 西湖十景을 감상하고 난 후 苏堤의 跨虹桥 옆에 ‘曲苑风荷’라고 세긴 비각을 세웠다.

曲苑风荷에서는 여름날 감상하는 연꽃을 최고로 친다. 공원 안의 크고 작은 연못에는 수백 가지 품종의 연꽃을 재배하고 있는데, 그 중 특별히 매혹적인 것으로는 风荷 관광 지구를 꼽을 수 있다. 이 수면에는 주로 유명한 연꽃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연잎은 수면을 뒤덮고 있고, 연꽃은 매우 매혹적이다. 수면 위에 제각기 다른 작은 다리들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들이 다리 위를 건널 때면 마치 연꽃의 한 가운데를 건너는 것 같이 느낄 수 있다.

서호 삼절(西湖三绝)

“孤山不孤,断桥不断,长桥不长”被称为西湖三绝。 서호의 십경 가운데 孤山과 断桥 그리고 长桥와 관련된 처량하고 애절한 이야기를 西湖三绝이라고 한다.

孤山不孤 - 孤山은 외롭지 않다.

孤山은 서쪽으로는 西泠桥와 가까우며, 동쪽으로는 白堤에 인접해있다. 해발 35m이며, 지면 면적은 20만㎡이다. 孤山의 풍경은 당송 연간에 이미 유명해졌다. 남송 理宗은 일찍이 이곳에 규모가 매우 큰 西太乙宫을 지었으며, 孤山의 절반을 御花园(황제가 노니는 화원)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청대 康熙황제 역시 이곳에 행궁을 지었으며, 雍正황제가 이 행궁을 圣因寺로 바꾸었는데, 이 사찰은 당시의 灵隐寺, 净慈寺, 照庆寺와 함께 ‘서호의 4대총림(승려들이 모여 수행하는 장소)’이라고 불렸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孤山은 西湖에서 가장 큰 섬인데, 왜 ‘孤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까?”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 산의 풍경이 특별히 아름다워 줄곧 孤家寡人(고대 황제의 자칭)이라 불리었던 황제에 의해 점유되었기 때문에 孤山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고 말한다. 지질학적으로 보자면 孤山은 화산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유문암(화산암의 일종)으로 조성된 곳으로써 전체 섬은 육지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孤山은 외롭지 않다.’라고 말한다.

断桥不断 - 断桥는 끊어지지 않는다.

白蛇传》에서는 白蛇낭자와 许仙(白蛇传의 남자 주인공)이 비 오는 날에 断桥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우산을 빌려주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는 断桥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다리는 성을 등지고 산을 마주보고 있으며, 북쪽 호수와 외호(外湖)의 물을 나누는 지점에 위치해있기 때문에 시야가 탁 트여있어서 겨울에 西湖의 설경을 감상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눈이 내리는 맑은 날이면 다리의 볕이 잘 드는 쪽은 눈이 녹았지만 잘 들지 않은 곳에는 여전히 흰 눈이 남아있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다리가 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断桥残雪(다리에 쌓인 눈이 중간부터 녹기 시작하여 마치 다리가 끊어진 것 같이 보이는 풍경)’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断桥는 白堤의 끝부분이기 때문에 ‘平湖秋月(平湖에서 바라보는 가을날 보름달의 운치)’로부터 시작된 白堤가 여기에서 끝이 난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아마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이것(堤断桥不断)은 원래 ‘제방은 끝이 나지만 다리는 끊어지지않는다.’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长桥不长 - 长桥는 길지 않다.

长桥에도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진다. 宋대에 젊은 아가씨 陶师儿와 서생 王宣教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陶师儿의 계모가 중간에서 이간질하여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하였으며, 제멋대로 그들을 방해하였다. 아름다운 혼사가 성사될 수 없음을 그냥 지켜만 보다가, 어느 날 陶师儿과 王宣教는 배를 타고 밤에 서호를 유람하다가 长桥아래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 깊숙한 곳에 이르러 함께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죽음으로써 현실에 맞섰다. 이 슬픈 사랑이야기 말고도 梁山伯祝英台가 나비로 변한 사랑이야기도 전해지는데,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항상 쌍을 이룬 아름다운 나비들이 찾아온다. 오늘날 长桥를 방문하면 长桥공원 길가에 정자만 남아 있으며, 그곳에서 시선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넘실거리는 호수 물결만 보인다. 사랑을 이루어 주지 못하고 이름만 남아있는 长桥의 유명무실한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