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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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왕(昭襄王)

본명 영직(嬴稷)
출생 B.C 325
사망 B.C 251
생존시기 전국시대

소개

나라의 28대 군주이자 3대 왕. 이름은 영직(嬴稷), 휘는 직(稷) 혹은 측(側). 약칭 시호로는 진소왕(秦昭王)으로 부르기도 한다. 진 소양왕은 56년의 재위 기간 동안 진나라의 통일을 거의 완수시킨 왕으로, 진효공과 혜문왕에 이어 진시황의 전국 시대 통일의 기틀을 다진 왕 중 하나로 평가된다.

생애

소양왕은 선대왕인 무왕의 이복동생이다. 무왕이 세발솥 정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죽는 바람에 애당초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소양왕이 기원전 306년 외삼촌 위염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다. 재위 3년에야 20세가 되어 관례를 올릴 정도로 어렸다. 재위 초기에는 대리청정을 받았고. 이후 재위 42년까지 외척들에게 견제를 받다가 범수(판쑤이)를 등용하여 위염을 축출한 후에야 외척들의 간섭에서 벗어난다. 재위 초기 소양왕은 왕실 내부의 반발을 억누르고 왕권을 확립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기원전 305년에는 서장(庶長) 장(壯)의 모반에 연루된 대신과 제후, 공자들을 모두 처형했다. 함께 얽힌 혜문후(惠文后)도 목숨을 잃었다. 무왕의 왕비인 도무왕후(悼武王后)는 위나라로 돌아갔다. 기원전 301년에는 형제인 촉후(蜀侯) 휘(煇)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착(司馬錯)을 보내 2만 여 명을 죽이고 평정했다.


범수

범수의 등용

범수는 진나라 소양왕에게 “진나라에 무슨 왕이 있습니까, 단지 태후와 양후가 있을 뿐입니다. 신이 듣기를 ‘일개 대부에게 필요한 인재는 나라 안에서 찾고, 나라를 일으킬 인재는 천하에서 찾는다.’라고 했습니다. 현명한 군주는 천하에서 인재를 빼앗아오는 법입니다.”라고 글을 올리며 스스로의 등용을 추천한다. 이에 진 소양왕은 범수를 진의 재상으로 등용한다.

원교근공책

소양왕의 외삼촌인 양후 위염이 아직 권력을 잡고 있었을 때, 위염은 제나라를 공격하여 진의 영토를 확장하려 했다. 이때 범수는 소양왕에게 새로운 외교 전략을 제시한다.

“한나라와 위나라, 이 두 나라를 거쳐 막강한 제나라를 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왕께서는 진나라의 병력을 아끼고, 한, 위 두 나라의 병력을 최대한 동원하시려는 것 같은데,동맹국을 믿지 못하면서 그 너머에 있는 제나라를 친다면 어떠하겠습니까? 지난 날 제나라 민왕이 연나라의 악의에게 패한 것도 멀리 떨어진 초나라를 치다가 과중한 부담으로 동맹국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나라와 위나라만이 덕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적에게 병력을 빌려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대준 셈입니다. 현 정세하에서는 먼 나라와는 친선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공략하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을 써야 합니다.”

이는 진나라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사이좋게 지내고, 국경을 접한 가까운 나라는 침공한다는 새로운 외교안보 전략이었다. 소양왕은 원교근공의 방식을 받아들여 인접한 한나라부터 공격한다.

장평전투

발단

기원전 265년 소양왕은 원교근공책에 따라 한나라를 우선 침략했고, 한은 두 개로 분리되어 결국 북쪽 상당 지방이 고립된다. 이에 한은 ‘진에게 땅을 빼앗기느니 조에게 항복하겠다’며 조나라 효성왕에게 한나라의 성을 넘기고, 이와 함께 장평전투가 시작된다.

진V.S.조

기원전 262년에 장수 왕흘은 20만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로 진군한다. 전쟁 초, 조의 장수 염파가 진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내면서 상황은 조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진의 재상 범수는 당시 지휘관이었던 왕흘을 몰래 백기로 교체하고, 조의 지휘관을 바꾸기 위해 ‘염파가 진을 공격하지 않는 것은 뒤에서 진과 내통하고 있기 때문’이며 ‘진이 두려워하는 것은 조괄이 장군이 되는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린다. 방어만 하는 염파가 못마땅하던 차에 이와 같은 소문을 들은 효성왕은 염파를 대신해 조괄을 지휘관으로 임명한다. 실전 경험이 전무한 조괄은 백전노장 백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백기는 조나라군에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이며 군사를 후퇴시켰고, 이에 속은 조괄은 결국 장평의 협곡 안까지 백기를 뒤쫓는다. 결국 조나라군은 진나라에 포위당하면서 전투는 끝난다.

장평전투 이후

장평전투에서 백기가 조의 군대 40만을 몰살시키면서 진은 명실상부 최강의 국가로 발돋움했다. 결국 소양왕은 주나라까지 멸망시키고 주나라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인 구정(九鼎)을 진나라로 가져왔다.

사후

소양왕이 죽은 뒤 태자인 주(柱)가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했다. 하지만 소양왕의 재임 기간이 굉장히 길었기 때문에 당시 나이가 53세였던 효문왕은 왕위에 오른 지 3일 만에 사망한다. 이후 효문왕의 아들인 장양왕(秦莊襄王)이 32세의 나이로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기타

맹상군과의 일화

소양왕은 맹상군을 초빙하여 진의 재상으로 삼고자 했다. 맹상군은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두 번째 초빙에는 응하여 진나라의 재상(宰相)이 되었다. 하지만 진의 신료들이 “맹상군이 이 시대의 일류 인재임은 분명합니다만, 제의 사람으로 진의 재상이 되어도 제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돌려보낸다 해도 진의 위협이 될 것입니다.”라고 모함하였고, 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여 맹상군을 감옥에 가둔다. 맹상군은 식객의 도움을 받아 진을 탈출하여 제나라로 돌아가 제의 재상이 되었다. 여기에서 '계명구도(鷄鳴狗盜)'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참고문헌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궁리, 2011
리산, <<전국칠웅>>, 이기흥 역, 인간사랑, 2016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통사>>, 조병한 역, 서커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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