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릉의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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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dong2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6월 21일 (화) 16: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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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개국 이래 줄곧 흉노의 위협을 받아왔다. 흉노에 대해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친을 이루기도 하였다. 한 무제 때에 이르러 대장군 위청(衛靑)과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이 흉노와 싸워 크게 승리하였다. 기원전 114년 흉노의 우두머리 이치사(伊雉斜) 선우(單于)가 죽으면서 쌍방이 모색해오던 화친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흉노는 마음을 바꾸어 한나라의 사신인 노충국(路充國)등 10여 무리를 잡아가둠과 동시에 부단히 변경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기원전 100년 저제후(且鞮侯) 선우(單于)가 막 즉위하자 흉노는 한나라의 기습을 두려워하여 몸을 낮추는 한편 억류시켰던 사신들을 돌려보내는 등 부드러운 태도를 취했다. 이에 한 무제도 중랑장(中郞將) 소무(蘇武)를 사신 삼아 한나라에 구류되어 있는 흉노의 사신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소무가 흉노에 도착하자 태도를 바꿔 소무를 구류시켰다.
이에 이듬해 기원전99년 한 무제는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에게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를 공격하게 했다. 무제는 이릉에게 이광리의 후방을 담당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이릉은 자신이 부대를 이끌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무제는 이릉의 청을 허락하였다. 이에 이릉은 보병 5천 명을 거느리고 흉노 진영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이릉은 준계산에서 흉노 선우의 3만 기병을 만났고 이릉은 흉노를 맞이하여 용감하게 싸웠다. 흉노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병사를 잃어 다시 8만 명의 군사를 증원하여 포위 공격하였다. 이릉은 싸우면서 후퇴하였지만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릉의 부하 중 한 명이 흉노에 투항하였고 결국 이릉은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이에 무제는 분노하였다. 이릉이 장렬하게 전사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기대와 달리 투항하였기 때문이다. 이릉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제는 먹지도 않고 조정 회의에서는 정무를 보아도 기뻐하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이릉이 유죄라고 노하여 질책하였다. 무제는 당시 태사령에 있던 사마천에게도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무제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이릉을 극구 두둔했다.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매일 똑같은 의견만 듣는 무제의 답답함을 풀어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순박한 충정이 도리어 무제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 실수가 궁극적으로 이광리(李廣利)를 지목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이광리는 다름 아닌 무제의 처남이었다. 한 무제는 무자비했다. 사마천을 당장 감옥살이를 시켰고 관리들의 논의에 따라 사마천은 사형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당시 법률규정에 따르면 사형은 50만 전으로 대체될 수 있었고 부형으로 대신할 수 있었다. 결국 가난한 사마천은 <<사기>>의 집필을 위해서 부형이란 치욕을 선택했다. 이후 기원전 96년 사마천은 감옥에서 풀려나고 중서령(中書令)이란 직책을 받고 복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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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김영수, <<역사의 등불 사마천, 피로 쓴 사기>>, 창해, 2006, ISBN 89-7919-738-1
  • 사마천, <<사기열전 3>>, 김영수, 최인욱 역, 신원문화사, 2006 ISBN 978-8935-913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