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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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포(季布)는 나라 하상(현 강소성)사람으로, 초한쟁패기 초의 장군으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유방군을 격파한 명장이다. 항우가 패망한 뒤 한 고조 유방이 현상금을 내걸었다가 하후영의 청으로 계포를 용서하고 낭중으로 임명하였고, 혜제 때에는 중랑장, 문제 때에는 하동 태수를 지낸다.

생애

계포
彭越

출생 ?
사망 ?
생존시기 진(秦) ~ 서한(西汉)


고조 시기

초나라 출신으로, 일찍이 사내다운 의기와 의협심으로 유명하였다. 항우의 장군으로써 활약했고, 여러 차례 유방군을 큰 곤경에 빠뜨렸다. 항우가 패망한 후, 유방은 현상금 천금을 걸어 계포를 수배하였고 계포를 숨겨준 자는 삼족을 멸할 것을 명령하였다.

계포는 도망쳐서 처음에 복양(濮陽)의 주씨네 집에 숨어있었다. 주씨는 계포에게 곧 한나라 군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니 자신의 계책을 따르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결하라고 하였고, 계포는 주씨의 술책을 따랐다. 주씨는 계포의 머리를 깎고 목사슬을 채우고 갈포옷을 입혀 노예처럼 보이게 한 후 집안의 하인들과 함께 노(魯)나라의 협객인 주가(朱家)에게 종으로 팔았다. 주가는 그가 계포라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 하고 사들여서는 농지에 두고 자기 아들에게 "밭일은 꼭 이 노예의 말을 듣고 식사도 반드시 함께 하라"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낙양으로 가서 개국공신인 하후영을 만났고, 계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며 고조를 설득할 것을 권유한다.

"신하는 각각 자기 주인을 위해 충성하는 것입니다. 계포가 항우를 위해 충성한 것은 계포의 직분에 불과합니다. 항우의 신하라면 무조건 다 잡아 죽이신답니까? 폐하께선 천하를 얻은 지 얼마 안되지요. 그런 분이 계포만한 현자를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한 사람을 엄중 수색하고 있대서 도량 좁은 군주라 천하에 소문이 났습니다. 폐하를 위해서도 좋은 처신이 아니지요. 계포는 북상하여 흉노에게로 도망치든가 아니면 남하하여 남월로 도망할 수밖에 없겠지요. 이는 장사(壯士)를 미워해 적국에 이익을 주는 결과와 같은데 마치 오자서가 형 평왕의 분묘에서 시체를 꺼내어 채찍질한 것과 같은 일이지요. 이는 반드시 보복을 가져옵니다. 공께선 어찌 폐하를 위하여 그 일을 충고하지 않습니까?”

이 말을 들은 하후영은 주가의 말에 동의하여 고조에게 찾아가 고하였고, 고조 또한 깨달은 바가 있어 그를 용서하였다. 그 후 고조는 계포를 낭중에 임명하였다. 당시에 천하의 현사들은 계포가 자신의 강의한 성격을 누르고 유연한 태도로 살아 있었음을 찬양했다.


혜제 시기

혜제 때 계포는 중랑장(中郞將)으로 봉해졌다. 이 시기에 흉노의 선우 묵돌이 여태후에게 일방적으로 편지를 보내 불손한 말을 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노한 여태후가 제장들을 모아놓고 대책을 논의 하였는데, 상장군 번쾌가 10만의 군사만 준다면 흉노를 정벌할 수 있다고 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이에 동의하며 여태후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 때 유독 계포만이 나서서 번쾌를 꾸짖었다.

"고조께서도 40만 대군으로 흉노에게 패했는데 10만 군사로 흉노를 정벌하다니 이것이야말로 면전에서 여태후를 기만하는 말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더군다나 진(秦)나라는 흉노 땅 정벌을 일삼다가 진승의 봉기 빌미를 주었습니다. 그 여파의 상처가 아직 채 아물기도 전에 번쾌가 면전에서 아첨해 천하를 동요시키다니요.”

계포의 엄숙하고 냉정한 분석을 들은 여태후는 마침내 흉노 징벌 논의를 철회시켰고, 그 이후 다시 논의되지 않았다.

문제 시기

계포가 하동군(河東郡) 태수가 되었다. 문제 시절에 계포의 현명함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를 들은 문제는 그를 어사대부로 임용하기 위해 그를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계포가 술에 취하면 난폭해져 아무도 친해지려고 하지 않으므로 어사대부 자리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고 결국 계포는 한달을 머무르다가 다시 임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계포는 다시 돌아가면서 문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공적도 없는데 폐하의 총애를 받아 하동에서 삼가 봉직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에게 폐하께서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저를 부르셨으니 이는 틀림없이 누군가가 폐하께 저를 두고 기만했던 것입니다. 또 제가 상경해 기다렸지만 그대로 임지에 돌아가라 하시니 이 또한 누군가가 저를 두고 비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폐하께서는 한 사람이 칭찬한다 해서 저를 부르시고 한 사람이 비방한다 해서 저를 돌려보내십니다만, 두려운 것은 천하의 인사들이 듣고 폐하의 식견을 의심치 않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에 문제는 부끄러워 하며 계포에게 하동은 자신의 팔다리와 다름없는 곳이니 그대에게 맡긴 것이라고 말하며 다시 돌려 보냈다.

관련 고사성어

계포일낙(季布一諾)

계포일낙진(秦)나라 말기의 민간에서 유행하는 '황금 백금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한마디 허락을 받는 것이 낫다'는 속담에서 나온 말이다.

이와 관련된 일화로는 다음과 같다. 초나라 출신인 조구생은 변설가로써 권력가에게 자주 붙고 돈을 밝히는 인물로 평이 나 있었다. 그는 특히 효문제 황후인 두씨의 오빠인 두장군과 친하게 지냈는데, 계포가 이 소문을 듣고 두장군에게 조구생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편지를 썼다. 조구생은 귀향하며 계포를 만나고자 두장군에게 소개장을 얻으려고 하였다. 두장군은 "계포가 그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며 거절하였으나 조구생이 듣지 않았고 결국 억지로 소개장을 써주었다. 계포는 자신을 찾아온 조구생을 보고 크게 노하였으나 조구생은 계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초나라 사람들의 속담에 ‘황금 백 근을 얻느니보다 계포가 승낙한다는 말 한마디를 얻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장군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양나라·초나라 지방에서 이런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제가 장군의 명성을 선양하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 저에게 같은 초나라 사람인데도 심하게 역정을 내시니 섭섭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계포는 기뻐하며 조구생에게 사과하였고 수개월 동안 크게 대접하고 떠나보냈다.[1]

가족

  • 동생 : 계심(季心)
관중을 집어삼킬만한 기개를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계포는 '신의와 단호함'으로, 계심은 '용맹'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다.
  • 외삼촌 : 정공(丁公)
초나라의 장군으로 팽성에서 유방을 궁지에 몰아넣었지만, 유방의 말에 홀려 죽이지 않고 살려보낸다. 후에 항우가 멸망하자 전날의 살려 준 은공을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고조를 찾아가지만 고조에게 죽임을 당한다.


참고문헌

  1. 사마천,『사기 본기』, 김영수 역, 알마, 2012.
  2. 사마천,『사기3 열전3권』, 김병총 역, 집문당, 1994.
  3. 중국위키백과 季布

각주

  1. 사기열전 중 계포열전에서, 사마천은 계포의 명성이 더욱 유명해진 것이 조구생 덕분이라고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