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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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사마의(司馬懿) (179~251년) 자는 중달. 하남성 하내군 온현 효경리 사람이다. 삼국시기 위나라의 걸출한 정치가, 군사가이며 서진 왕조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다. 일찍이 조위의 대도독, 태위, 태부를 역임했다. 위나라 3대를 보좌한 고명대신으로 후에 위나라 조정의 전권을 장악한 권신이 된다. [1]

생애

어린 시절

하내군 온현의 사마씨 집안은 후한시대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일류대족으로 명성이 높았다. 유방항우가 천하를 높고 겨룬 초한쟁패시대에 유방의 부하였던 사마앙이라는 장수가 공적을 세우고 그의 일족들이 논공행상으로 하내 땅을 하사받아 정착한 것이 온현의 사마씨 집안이 출발하는 계기였다.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은 성격이 소탈하면서도 정직하며 공정한 인물로 평소에도 위엄을 갖추고 있는 데다 품위있는 선비였고, 벼슬에 올라서는 진심으로 백성을 아끼고 돌보는 투철한 목민관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자식들의 교육에 있어서 대단히 엄격하여 그의 자녀들은 부친의 분부가 없으면 그 앞에서 자리에 앉을 수 없었고, 함부로 밖에 나돌아 다니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허락 없이 말대꾸하는 것조차 철저히 금했다. 하지만 사마방의 아들 여덟 명은 엄격한 가풍 속에서 기대 이상으로 자질이 뛰어나 사람들이 '팔달' 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인 중달 사마의가 가장 특출하여 일찍이 '왕좌지재(임금을 보좌할 만한 유능한 인재)'라는 칭송을 받았다.

인품과 성격

사마의가 성인이 되기 전, 전국에 메뚜기 떼가 내습해 극심한 대흉년이 들었다. 백성들은 너무나 곤궁한 나머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암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사마의의 형 사마랑은 온현 고을에서 식량을 모아 주민들에게 적절히 배급하는 등 위기를 극복하고, 나이 어린 사람들을 모아 가르치며 동생들에게도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하는 등 모범적인 처신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사마의는 아직 성인이 아니었으나 활달한 성품에 적극성을 발휘하여 형 사마랑이 하는 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보았는데, 맡은 일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 그 후 사마랑이 조조에게 부름을 받아 고향을 떠날 때 사마의는 형을 대신하여 그동안에 하던 일을 도맡았고 집안을 이끌었다.
한편, 사마의는 어릴 적부터 황건의 난, 무수한 농민들의 호응, 토벌군인 정부군의 출동과 평정, 포악한 동탁의 집권과 무의미한 파괴, 관동의군의 출현 등 많은 일을 겪었다. 특히, 여섯 살의 나이에 황건의 반란을 체험했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자면 민중 봉기였으나 당시에는 '하늘을 대신하여 백성을 교화하는 유덕자이신 천자님'에 대한 불충을 보이는 행위였다. 게다가 사마의의 집안은 유학을 중시하는 사대부 가문이라 황건의 난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시대적 상황을 헤아리고 나니 사마의는 백성을 착취하는 중앙 권력에 진출하는 것이 하등 소용없는 짓임을 절감하고, 오히려 진정으로 백성들을 위한다면 고향 땅에 남아 지방 관리로서 백성을 교화시키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고 마음 편히 살아가는 게 낫겠다는 결심을 했다. 따라서 사마의는 세월이 흘러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은거에 가까운 고향 생활을 하였고, 단 한 차례도 어떤 군벌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찾아가거나 몸담지 않았다.
사마의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인품과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겸허하고 바른 처신을 계속했다. 사마의와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이 평소 그가 존경과 친애하는 태도를 가졌다고 전한다. [2]

조조에게 출사 제의를 받다

조조의 첫번째 시도

기록에 의하면, 조조에게 온현 땅에 사마의라는 젊은 인재가 있으니 발탁하라고 추천한 사람은 순욱이다. 조조군이 북방의 패자 원소를 물리치고 기주를 비롯해 북방 4개주를 차지하여 승전고를 울리며 허도로 귀환했을 무렵이었다. 관도전투가 있기 전에는 조조가 차지한 영토가 원소의 3분의 1 크기밖에 안되었으나 이제 거의 4배가 넘는 관할 지역이 생겼으니 당연히 더욱 많은 인재가 필요했다. 더구나 이 무렵에 조조가 가장 신뢰하는 책사 곽가가 중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인재에 욕심이 많은 조조는 더욱 적극적으로 사방으로 눈을 돌려 쓸 만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순욱의 천거를 받자, 즉시 사자를 사마의가 있는 온현 땅으로 파견했다.

사마의는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를 주군으로 모실 의도가 없었으므로 사신에게 병 때문에 허도로 갈 수가 없다고 핑계를 댔다. 이때까지 사마의는 은둔한 선비와 같이,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뜻한 바를 실천하며 조용히 살고 싶었던 것이다. 조조로부터 첫 번째 부름에 응하지 않았을 때, 조조는 편입된 북방 4개 주 평정에 더하여 국경 너머까지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고, 따라서 사마의에 대한 일은 다음 순위로 넘어갔다.

조조의 두번째 시도

시간이 지나 조조가 오환정벌을 마치고 돌아와서 허도 근처에 현무지라는 큰 저수지를 만들어 수군 훈련을 시작했는데, 이는 남정에 나서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마침내 조조가 남정에 나설 결심을 하는데, 그 직전 조조 진영에서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전국적으로 인재를 불러 모으고 남정 이전에 허도의 권력 체제를 바꾸어 내치를 정비하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융을 처형하여 일사불란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일이었다. 조조는 지난번에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오지 않았던 것을 기억하고 사자에게 '이번에도 그가 병을 핑계로 삼거든 꽁꽁 묶어서 데려오라'고 강경히 지시했다.
이후 조조는 전쟁을 반대하는 공융을 처형함으로써 전쟁 반대자의 입을 막고 이전과는 다른 지도력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이렇듯 사마의가 두 번째 부름을 받았을 당시는 상황이 많이 변했고, 함부로 부름을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사마의는 끌려가듯이 허도로 가서 승상부의 문학연 자리에 임명되었다. 문학연이라는 자리는 고위직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교육과 문화를 담당하는 요직이었으며, 남정 직전의 일이었다. [3]

사마의 대 제갈량

사마의는 패했는가?

『자치통감』과『삼국지』는 사마의가 패하고 제갈량이 승리한 것으로 기록한다. 그러나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진서』의 <선제기>는 사마의가 승리한 것으로 기록한다. 『진서』는 당나라 정관 연간의 방현령, 저수량이 편찬한 것으로, 사마의의 전기에 당태종 이세민이 쓴 다음과 같은 특별한 평론이 첨부되어 있다.

십 년간 좋은 일을 해도 이를 아는 이는 적지만, 하루라도 나쁜 일을 하면 천하 사람들이 다 알게 되는데, 그렇지 아니한가! 비록 당시에는 덮어 둘 수 있다고 해도 종국에는 후세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조소를 받는다. 또한 이는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며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고, 시장에서 남몰래 돈을 훔쳐도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는 당나라 시대의 관리들이 사마의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내포하는데, 이러한 태도를 갖고 『진서』를 편찬했다면 특별히 사마의를 생각해 결점을 숨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따라서 『진서』에 기록된 사마의의 승리가 어느정도 근거가 있다는 주장과, 반면에『진서』가 오류와 허점이 많다는 주장이 대립하기 때문에, 제갈량과 사마의의 교전에 대한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다.

노성전투

첫번째 교전

사마의와 제갈량 교전의 첫번째 단계는 사마의가 대군을 이끌고 기산 부근에 이르러 제갈량과 싸울 준비를 한 것이다. 사마의의 기본전략 배치는 소규모 부대를 상규(지금의 감숙성 천수시)에 보내 그곳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제갈량의 주력군을 찾아 결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자 반대 의견을 낸 사람이 있었으니, 장합이었다. 그는 사마의의 수하 중 성적, 경험, 위신, 무게감이라는 네 가지 덕목을 갖춘 장수였다. 그는 군대를 전후 2군으로 나누어 전군은 제갈량을 요격하고, 후군은 옹성(지금의 섬서성 봉상성 남쪽), 미성(지금의 섬서성 미현 북쪽)에 주둔하게 하자는 의견을 제출했다. 사마의는 단연코 장합의 의견을 부정하면서 전쟁의 원칙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집중의 원칙으로,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야 섬멸전을 벌일 수 있다고 말했다. 사마의는 따라서 병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제갈량의 군영이 있는 기산으로 돌진했다.
이때, 제갈량은 사마의가 총출동하는 것을 보고 적군의 주력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하는 피실취허 책략을 선택해 상규로 달아났다. 상규에는 4,000여명의 위나라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지만 제갈량의 진군 속도가 너무 빨라 사마의가 기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규에 이른 뒤였다. 이로 인해 사마의는 처음으로 자신이 제갈량에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또 한 번의 특별한 결정을 내리는데, '바로 즉시 추격하는 것'이었다. 이치대로라면 상규에 전투가 이미 시작되었고 가는 길에 매복의 위험이 있어 무작정 쫓아가서는 안되지만, 『진서』에는 사마의의 추격을 두고 '권갑신야부지(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전군이 경장차림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상규로 내달렸다)'라고 설명한다. 사마의가 상규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의 영채는 막 완성되어 전투를 시작하지 못한 시점이었다.

두번째 교전

전투는 두번째 단계에 접어든다. 양군은 몇 차례 전투를 벌이지만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사마의는 맹장 우금을 보내 서촉과 작전을 벌이게 하지만 한 차례의 싸움으로 승부가 가려지지 않자, 병사들을 거두어들이고 대규모 영채를 지어 제갈량과 대치하기 시작한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군영이 빈틈없이 잘 지어진 것을 보고는 전군을 다시 기산으로 철수시킨다. 제갈량이 취한 전법은 기동전으로, '적이 반드시 구하려고 하는 곳을 공격하여'적을 끌어낸 연후에 적이 움직일 때 대규모 군사를 투입해 해치우는 것이었다.

세번째 교전

사마의는 달아난 제갈량의 군사를 다시 한 번 쫓을 것을 명령한다. 노성에 이른 사마의가 서슴없이 진행한 일은 서촉의 진영보다 더 견고한 진영을 세우는 것이었다. 두 대군은 집을 지으며 품질과 속도를 경쟁했다. 사마의는 군영을 세운 이후 견고하게 지키며 싸우지 않고 원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마의는 경쟁 상황에서 절대로 다른 사람이 준비해놓은 선택 항목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조위 장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5월 사마의는 마침내 싸움을 하기로 결정해 장합에게 한 부대를 이끌고 촉군의 남쪽 진영을 치게하고, 자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촉군의 북쪽 진영을 공격하였다. 양군이 대치한 형세는 장합 대 왕평, 사마의 대 제갈량이었으며, 6월이 되지 촉나라 군대는 군량이 떨어져 철군하였다.

마지막 교전

이번에도 사마의는 장합을 보내 추격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몇 차례의 교전을 통해 제갈량이 사마의의 책략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목문도에 매복을 설치한다. 촉군은 목문도의 높은 곳에 매복을 두어 장합이 오자 일제히 화살을 날린다. 장합은 갑작스러운 공격을 막아내지 못해 그 자리에서 죽게되고, 사마의와 제갈량의 대결도 이렇게 끝이 난다.

오장원전투

조위 청룡 2년, 234년 2월에 제갈량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야곡을 나와 사마의와 오장원에서 대치한다. 제갈량은 이전과는 다르게 한편에서는 싸움을 하고 한편에서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거나 농사를 지으며 싸우는 장기적인 전법을 선택한다. 사마의는 상대가 장기적으로 버틸 군량을 확보한다면 최종적으로 승기를 빼앗길 수밖에 없으며, 가까스로 늦여름이나 초가을까지 버텨낸다면 전장의 형세가 변할 것임을 깨닫고 정찰병을 보내 정탐을 한다. 적들이 군량 공급에 어려움을 겪게됨을 알자, 사마의는 문을 닫고 더 이상 싸우지 않는다.
그러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모진 초식을 사용한다. 제갈량은 자신의 친필 서신과 함께 여인의 옷을 하나 보내며 이렇게 적는다.

사마의 그대는 대장군으로서 중원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있는 힘을 다해 싸워서 자웅을 겨루려고 하지 않고, 굴을 파고 땅구덩이에 틀어박혀 칼과 화살을 피하려고만 하니 실로 아낙네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이에 아낙네들이 쓰는 관과 옷을 보내니 싸우지 않으려거든 두 번 절하고 받으라. 만약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고 남자의 포부가 남아 있다면 빨리 답장을 써서 보내어 날짜를 잡아 싸움터로 나오거라.


이를 읽은 후 주위 군영의 장수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사마의도 당연히 제갈량이 사용한 이 초식이 화를 돋워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격장법인 것을 깨달았다. 제갈량의 격장법에 사마의는 걸려들지 않아 싸움에 나서지 않았지만, 부하들은 이에 불만이 극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부하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자신의 위신에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따라서 사마의는 다음과 같은 책략을 사용하였다.

  1. 일관된 선택으로 권위를 유지한다 - 사마의는 전투 개시에 대한 허가 요청서에 작전 방안을 첨부하여 조예에게 긴급 통신문ㅇ르 보낸다. 조예는 사마의의 의도를 알아채고 즉각 사법을 주관하는 신비를 전선에 파견하여 전투를 감독하게 한다. 신비는 명목상 전쟁 감독관이었으나 실상은 싸우지 않도록 감독하는 역할이었다. 신비는 오자마자 영채 앞을 가로막고 손에 성지를 들고 누구도 나가 싸우지 못하게 했다. 사마의는 엎드려 읍소하며 노발대발했지만 신비는 결단코 그를 막는다. 모두가 두 사람의 연극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제갈량은 사마의가 싸움을 청함으로써 싸울 마음을 보여주어 군심과 사기를 안정시키고자 한 계략을 눈치챘다.
  2. 긍정적인 암시로 부하의 사기를 북돋운다 - 전선에서 제갈량의 30만 대군이 다섯 길로 나뉘어 기산을 출발했다는 전황이 전해지자, 위나라 조예는 두려워한다. 곧바로 사마의를 불러 적을 물리칠 계책을 논의하는데, 사마의는 회의에서 정치, 군사, 민정, 외교, 전략, 전술 등을 이야기하지 않고 별자리 이야기를 한다. 사마의는 조예가 군사 분야에 밝다는 사실을 알고 정보보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어 전투 의지를 고무하고자 했다. 사마의는 조예에게 말했다. "하늘을 보니 우리가 유리합니다. 규성이 태백을 범하니 공명이 또 헛되이 온 것이고, 중원에 왕기가 세니 우리는 아주 좋습니다." 말을 다 마치자 황제와 전군은 이를 믿고 사기가 상승했다. 사마의는 고의적으로 이런 예측을 '우리는 성공할 수 있다.'라는 정보와 함께 엮어 자신감을 끌어올렸다.
  3. 감정을 다스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 - 사마의는 전군의 정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심리적 안정도 꾀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조절하고 조직을 잘 관리하기 위해 낙관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4]

결국 양쪽은 대치할 뿐 접전이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 제갈량의 심신은 계속 악화되어 서기 234년 늦가을, 제갈량은 숨졌다. 이 뒤에 사마의가 취한 행동에 대해 『삼국지연의』와『진서』는 다르게 말한다.[5]

이렇게 대오를 편성한 사마의가 병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달려가니 오장원의 촉한군 영채는 텅 비어있었다. '분명 제갈량은 죽었구나'하고 확신한 사마의는 대오를 돌격형으로 바꿔 후퇴하는 촉한군을 엄습하라고 명했다.
(중략) 그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한 방 포 소리가 일어나며 우렁찬 함성이 계곡을 뒤흔들며 일어났다. 동시에 후퇴하던 촉한군이 일제히 기를 돌려 세우고 북을 치며 위군 쪽으로 다가오는데 주위의 숲 속에서 수십 명 장수가 사륜거를 호위하고 나타났다. 사마의가 진격을 멈추고 바라보니 수레 위에는 죽었다고 여긴 제갈량이 깃털 부채를 들고 단정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중략) "전날 사륜거 위에 앉아있던 제갈량은 실은 나무로 만든 목상이었습니다"하고 고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의가 탄식했다. "나는 제갈량이 살아 있는 줄만 알았지 죽은 줄은 몰랐도다." 이리하여 사람들 사이에서 '죽은 제갈량이 살아있는 사마의를 달아나게 했다'는 속담이 생겼다.

 
— 삼국지연의


며칠 뒤에 사마의는 오장원의 막사가 있던 곳을 순찰하며 촉한군이 남기고 간 수많은 문서와 군량미를 손에 넣었는데, 이때 비로소 제갈량의 죽음을 확인하고 "공명은 천하의 기재로다"라고 말했다. 신비가 공명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대장이 소중히 여기는 것은 군사 계획 서류와 병마, 그리고 군량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이것들이 모두 버려져 있다. 대체 사람이 오장육부를 버리고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는 죽었다. 서둘러 출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 진서<선제기>

참고 문헌

나채훈, 『사마의 평전』,2015.
자오위핑 지음, 박찬철 옮김, 『자기통제의 승부사 사마의』,2011.

관련문서

  • 자오위핑,《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위즈덤하우스, 2011, 18페이지
  • 나채훈,《사마의 평전》, 북오션, 2015, 40~72페이지 부분인용
  • 나채훈,《사마의 평전》, 북오션, 2015, 73~82페이지 부분인용
  • 자오위핑,《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위즈덤하우스, 2011, 37~45, 110~126 부분 인용
  • 나채훈,《사마의 평전》, 북오션, 2015, 174~177페이지 부분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