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파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개요

염파(廉頗)전국시대 조나라(趙)의 장군이다. 조나라 말기에 활약한 대표적인 장군 중 한명으로 신평군(信平君)의 칭호를 받았다. "문경지교(刎頸之交)”라는 고사를 통해 같은 시대에 활약한 조나라 재상 인상여(藺相如)와의 교우도 엿볼 수 있는 인물이다. 젊은 시절부터 손에 꼽는 명장이었고 늙어서도 그 명성이 어디가지 않아 노익장(老益壯)의 대명사로 알려졌다고 한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장군 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장수였으며 정치가로서도 안목을 갖춘 인물이다.

생애 및 업적

염파의 생애는 어디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지 않다. 하지만 사기나 여러 자료를 통해 그의 많은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본인의 사기 열전에 <염파인상여열전>에는 누락된 이야기가 많은데, 특이하게도 세가에 염파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기원전 283년(혜문왕 16년), 염파는 장수가 되어 제나라를 공격하여 양진(陽晋, 지금의 산동성)을 함락시켰고 그 공으로 상경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279년(혜문왕 20년), 염파는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기원전 276년(혜문왕 23년), 조나라가 누창을 대장으로 삼아 위나라의 기땅을 공격하게 했으나 빼앗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에 염파가 장수가 되어 기땅을 다시 공격하여 점령했다.

기원전 275년(혜문왕 24년), 염파가 방자를 공격하여 빼앗은 다음 그곳에 성을 쌓고 돌아와 다시 안양을 공격하고 점령했다.

기원전 260년(효성왕 4년), 염파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장평(長平)에 주둔했다. 같은 해 조나라는 염파를 대신하여 조괄(趙括)을 대장으로 삼았다.

기원전 249년(효성왕 15년), 위문의 땅에 염파를 봉하고 신평군이라는 봉호를 내렸다. 장평의 패배로 초토화된 조나라를 노리고 동쪽의 연나라가 2군과 전차 2천승을 이끌고 쳐들어왔는데 조나라는 염파를 대장으로 출격시켜 연나라 군대를 파하고 율복을 잡아서 죽이고 경진과 악한은 사로잡았다.

기원전 248년(효성왕 16년), 염파가 군사를 이끌고 연나라를 포위하였다.

기원전 243년(효성왕 21년), 염파가 장수가 되어 번양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조왕이 악승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게 하자 염파는 악승을 공격했다. 악승은 싸움에서 지고 도망치고 염파는 위나라로 망명했다.

본기가 아닌 세가에서 이렇게 많은 기록을 남긴 인물은 드물다고 한다.

관련 고사

문경지교(刎頸之交)

염파는 솔직하고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라고 일컬어지는데, 특히 문경지교라는 고사성어를 통해 그의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문경지교란 목을 베어 줄 수 있는 벗, 그런 사귐, 서로 죽음을 함께 할 수 있거나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을 수 있을 정도의 막역한 사이를 이르는 말이다.

완벽귀조(完璧歸趙)

전국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목현(繆賢)의 식객에 인상여 (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原狀)대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 에 임명되었다고한다.

부형청죄(負荊請罪)

그리고 3년 후 소양왕이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종일품(從一品)의 상경(上卿)이라는 높은 벼슬에 올랐다. 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져갔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서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 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테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녔다.
이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론 소양왕입니다." 그러자 인상여가 말했다.

"나는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소양왕을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 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진나라가 쳐들어 오지 않는 것은 염파 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고 염파 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 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고, 그는 곧 '웃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負荊請罪)"하고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하였고,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었다고 한다.

(廉頗가 肉袒負荊하고 至門하여 謝罪曰 鄙賤之人이 不知將軍寬之如此라. 卒相與驩이 爲刎頸之友하다.)


화통한 성격이지만 부족한 융통성

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 염파는 성격이 굉장히 솔직하고 화끈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화끈한 성격이 정치를 하는데에 있어 부족한 융통성으로 이어져 훌륭한 정치가가 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인상여열전의 문경지교일화를 제외하고도 이러한 성격이 드러나는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염파가 면직이 되어 장평으로 돌아와 권세를 잃었을 때 옛 손님들이 모두 떠났다가, 다시 장수가 되자 손님들이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그러자 염파는 손님들은 꺼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손님이 염파에게 어찌 당신은 판단이 느리느냐, 천하는 시장에서 장사하듯이 사귀는것이고, 당신이 권세가 있으면 본인이 따르고 아니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원망하냐고 했다고 한다.

죽음

염파의 죽음은 비극적인 결말인데, 그의 죽음은 조나라의 멸망과 직결됨으로써 그 비극성을 더해준다고 한다. 염파는 원수 곽개의 중상모략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위나라로 망명하여 대량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염파이지만 위나라는 염파를 믿고 쓰려하지 않았다. 한편 조나라는 진나라와의 전쟁을 계속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의 도양왕은 염파를 다시 조나라의 장군으로 세울 생각을 하였고 염파 역시 조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그리하여 도양왕은 사람을 보내어 염파가 아직 쓸만하지 파악하고 오도록 시키는데 이때 염파의 원수 곽개가 사신에게 뇌물을 주고 염파를 모함하도록 시킨다.
염파는 사신 앞에서 밥 한 말과 고기 열 근을 먹고 갑옷을 두르고 말에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이 쓸만 하다고 어필하였으나 곽개에게 뇌물을 받은 사신은 조나라로 돌아가 염파를 모욕을 하게되고 도양왕은 염파가 늙었다고 생각하여 그를 부르지 않았고 염파는 쓸쓸히 초나라로 옮겨가 생을 마감하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있지 않다. 조나라 병사를 부리고 싶다는 유언만을 남기고 염파는 쓸쓸히 죽었다.

기타

노익장의 대명사라고 알려진 앞의 문서에도 나와 있듯이 80이 넘은 나이에도 밥을 한 말씩 먹고 고기도 열 근씩 먹어서 모두가 두려워했다고 한다. 덕분에 중국에서는 노익장과 같은 면모를 보이는 나이든 사람을 가르킬때 염파를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고 한다.

참고문헌

  • <사기>열전 인물형상 연구, 이승신, 이화여대대학원, 1994.
  • 사마천, <사마천 사기 56>, 소준섭 편역
  • 나라 위해 목숨 던진 배짱 문경지교로 사직의 안녕을 이루다, 포스코경영 연구원 발행
  • 미야자키 이치사다,<중국 통사>, 조병한 옮김, 서커스
  • 위키백과 중국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