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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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춘추시대 위(衛)나라 제19대 국군. 성은 희(姬), 이름은 적(赤)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 668년부터 기원전 660년까지로 9년간 통치했다. 학을 유별나게 아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위의공(衛懿公)
출생 기원전 ???년
사망 기원전 660년
전임자 혜공(惠公) 희삭(姬朔)
후임자 대공(戴公) 신


생애

위의공의 아버지는 위혜공(惠公)으로 기원전 669년 혜공 사후 그 뒤를 이었다.

의공 4년(기원전 666년) 아버지가 동주 혜왕을 쫓아내고 왕자 퇴를 주왕으로 세운 죄를 물어 토벌하러 온 제환공과 싸워 대패했으나, 뇌물을 바쳐 화평했다.

의공 9년(기원전 660년) 북적(北狄)이 위나라를 침공했다. 위의공은 당시의 패자였던 제환공에게 원병을 청하는 한편, 병사를 일으켜 적에 맞서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은 "학에게 녹봉과 직위가 있으니 학더러 싸우라고 하십시오."라며 종군을 거부했다. 의공은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을 이끌고 형택에 나가 맞서 싸웠으나, 싸움에서 패하고 적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일화

의공은 학을 매우 아껴, 궁궐에 거대한 새장을 짓고 수집한 학을 모아 길렀으며 학들에게 관직을 내리고 국고로 곡물을 수입해 사 먹일 정도였다. 의공이 학을 지나치게 좋아했으므로, 학을 가져다 바치는 사람에게는 모두 큰 상을 내렸다. 궁궐 곳곳의 거처에서 기른 학들의 수는 수백 마리에 이르렀다. 의공은 자기가 기르는 모든 학에게 품계와 봉록을 정하고 학을 키우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봉록을 내렸는데, 학 중에 가장 높은 품계의 학은 대부가 받는 봉록을 받고, 성 밖으로 놀이를 나갈 때는 대부가 타는 수레에 타서 다녔다. 백성들로부터는 세금을 무겁게 걷어 학들을 키우는 데 탕진하였으나 굶거나 얼어 죽는 백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북적(北狄)의 왕 수만(瞍瞞)은 항상 중원에 진출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는데, 제환공이 북쪽의 산융을 정벌하러 나서자, 군세를 이끌고 형나라(邢)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이어 위나라를 침공했다. 국경을 지키던 관리가 의공에게 달려와 보고하자 의공은 크게 놀라 즉시 백성들을 끌어모아 방어에 나서려고 하였으나 백성들은 의공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모두 시골로 도망쳐 숨었다. 의공이 도망친 백성을 잡아와 물으니 한 백성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학에게 녹봉과 직위가 있으니 학더러 싸우라고 하십시오."

의공이 물었다.

"학이 어떻게 오랑캐의 군사들을 막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 백성이 대답했다.

"학이 오랑캐의 군사들을 막아 낼 수 없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군주께서는 유용한 것을 버리고 무용한 것만을 취하셨기 때문에 저희들은 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의공이 말했다.

"과인의 죄가 크도다!. 그렇다면 학을 놓아 보낸다면 너희들이 나를 따라나서 오랑캐를 막기 위한 싸움에 임할 수 있겠는가?"

의공은 사람을 시켜 학을 우리에서 꺼내 날려 보내도록 했다. 학들은 곡식을 너무 배불리 먹고 자라, 자기가 자라던 곳을 맴돌 뿐, 날아가지는 못하였다. 대부 석기자(石祁子)와 영장자(寗莊子)가 의공이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다고 말하자 백성들이 조금씩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의공은 석기자와 영장자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고, 거공(渠孔)에게 융차의 지휘를 맡기고, 자백(子伯)을 차우로 삼고, 황이(黃夷)를 선봉으로, 공영제(孔嬰齊)를 후군으로 삼아 형택(滎澤)에서 적과 싸웠으나 참패하고, 살해당했다.

후에 타국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온 대부 굉연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남은 것은 간밖에 없었다. 장사를 지낼 사람과 도구도 구하지 못할 실정이었기 때문에 굉연(宏演)은 스스로 할복하여 자신의 몸을 관을 삼아 위의공의 간을 담고 순절했으니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부복납간(剖腹納肝)이다.

참고문헌

  • 풍몽룡, 김구용 옮김, 《동주 열국지 2》
  • 여조겸, 전통문화연구회,《동래박의》
  • 사마천, 《사기》 권37 위강숙세가제7
  • 《춘추좌씨전》 장공 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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