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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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장이(張耳)는 전국 시대 때의 위(魏)나라 사람이다. 진나라 말기에 다시 나타난 조나라의 대신이며, 한나라의 무장이자 제후왕으로 조나라 왕을 지냈었다.

생애

위나라

장이는 대량의 사람으로, 어렸을 때에는 위나라의 신릉군의 식객이었다. 젊었을 때 외황에서 망명하며 위의 공자 무기의 빈객이 되기도 했었다. 때마침 부잣집의 딸로서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 용렬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에게서 도망쳐 와 아버지의 빈객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빈객은 본디 장이의 인간됨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그는 그 여인에게 그대가 실로 어진 남편을 구하고 있다면 장이를 따르는 것이 좋지라고 넌지시 말했다. 여인은 마침내 헤어지고 장이에게로 시집을 갔다.
이후 그는 처가의 도움을 받아 천리의 먼 곳에 있는 인사들까지도 사귈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위 공자 무기를 추종하여 빈객이 되었던 인연으로 위나라에 임관하여 외황령을 지내면서 어질다는 명성을 더해갔다. 진여 또한 대량 사람으로서 유자의 학문을 좋아해 조나라 형이라는 곳을 자주 드나들었었는데 부자인 공승씨가 진여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그의 사위로 삼게 되어 장이는 젊은 진여와 후에 문경지교를 맺었다.
기원전 225년, 마침내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하자 장이와 진여가 위의 명사임을 알고 장여는 현상금 일천 금, 진여는 오백 금의 보상을 목에 걸어 두 사람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이름을 바꾸어 진으로 가서 성문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끼니를 때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높은 관리가 성 앞을 지나가다가 진여가 한 눈을 팔아 매질을 받게 되어 분노하려는 진여를 말리고는 ‘애초의 우리의 약속이 뭐였나. 이런 작은 치욕때문에 일개 관리에게 죽으려는가?’ 라고 하자 진여가 이에 수긍했다. 이후 진나라에서 자신들을 잡으라는 조서가 내려오면, 그들이 역으로 이 내용을 전달하는 일을 맡기도 했었다.

조나라 부활

진섭(陳涉)은 기 땅에서 일어나 진현에 이르렀을 때 그 군사가 수만명에 달했다. 장이가 진섭에게 뵙기를 청했다. 진섭과 좌우의 측근들은 평소에 그가 현명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으나, 아직 만난 적이 없었기에 이들을 만나자 매우 기뻐했다. 진현의 호걸과 원로들이 진섭을 설득해 초나라 왕이 되어달라고 말했다. 진섭이 이를 장이에게 묻자, ‘처음으로 진현에 와서 왕이 된다면 이는 천하에 사욕을 보이는 것이다. 왕위에 오르지 말고 서쪽 진나라를 치고, 사람을 파견해 여섯나라들의 후대를 왕으로 세워라. 적이 많으면 힘은 분산되고, 무리와 함께라면 군사는 강해지게 된다.’라고 답했으나, 진섭은 말을 듣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진여가 다시 그를 설득하여 장이와 진여는 좌우 교위가 되어 3천명의 병사들과 북쪽으로 조나라 땅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렇게 행군을 시작해 조(趙)의 땅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그 나머지는 성을 지키며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그 후 괴철의 조언에 싸움을 하지 않고 항복한 성이 30여 개나 되었다. 그렇게 옛 조나라의 서울 한단에 이르자, 진여와 진왕 진승이 자신들의 계책을 써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져 무신을 조왕으로, 자신은 우승상에 임명되었다. 진왕이 그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무신, 장이, 진여, 소소 등의 일족을 다 죽이고 조나라를 공격하려 했지만, 진나라의 만류로 오히여 무신을 회유해 진나라를 함께 치기로 하여 장이의 아들 장오를 성도군에 봉했다.
조왕 무신은 한광(韓廣)에게는 연을, 이량(李良)에게는 상산을, 장염(張黶)에게는 상당을 각각 공략하게 했다. 한광의 군대가 연 땅에 도착하자, 연 사람들이 한광을 연왕으로 세우자 장이는 조왕과 진여와 함께 연나라를 공격하러 가는데 조왕이 연나라 군사에 붙잡혔다. 장이와 진여가 걱정하는 데, 집일을 하는 병사 하나가 공을 위해 기지를 발휘하여 조왕을 구출해낸다. 그 사이, 항산을 공격하러 간 이량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가 무신을 죽이자, 조나라 사람들의 도움으로 진여와 함께 겨우 탈출해 군사를 모아 자신의 빈객에게서 조나라 왕족 출신을 왕으로 임명하도록 조언을 받아 조헐을 조왕에 세우고, 신도에 임시 수도를 정하여 이량의 추격군을 격파했다.

거록 전투

이세황제 3년(207년) 10월, 진나라 장수 장한이 이량의 투항을 받고 한단에 이르러 그 곳의 백성을 모두 하내로 옮기고, 그 곳의 성곽을 모두 허물어뜨렸다. 장이는 조왕 헐과 함꼐 달아나 거록성으로 들어갔는데, 진나라 장수 왕리가 이들을 포위했다. 진여는 북쪽우로 가서 상산의 병력을 거두어 수만 명을 얻어 거록성의 북쪽에 주둔시켰고, 장한은 거록성의 남쪽 극원에 주둔하고 참호를 만들어 황하까지 연결해 왕리에게 군량을 공급했다. 왕리의 군대는 군량이 풍부해지자 맹렬하게 거록성을 공격했고, 거록성 안에서는 군량이 거의 바닥나고 병력이 적어서, 장이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진여에게 전진하라고 했으나 진여는 병력이 적어서 진의 군대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자 장이는 크게 노하여 진여를 원망했으며, 장염과 진택을 보내 책망하며 비록 헛되이 죽을 뿐이라도 구원군을 내라고 말했다. 진여는 거절했으나, 장염과 진석이 한사코 청하자 시험 삼아 5천 명의 군사를 내주었지만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이때 연나라, 제나라, 초나라는 조의 위급함을 듣고 모두 달려와 구원했다. 장오도 북쪽으로 대(代) 땅의 군사를 거두어 만여명을 얻어 이들을 이끌고 와서 모두 진여의 군영 곁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둔했다. 하지만 감히 진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항우의 군대는 장한의 참호를 여러 번 차단하니, 왕리의 군대는 군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항우가 군사를 모두 이끌고 황하를 건너 마침내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자, 제후들의 군사들은 거록성을 포위하고 있는 진의 군대를 용감하게 공격해 마침내 왕리를 사로잡았고 섭간은 자살했다. 결국 거록성을 보존하게 한 것은 초나라의 힘이었다.
그렇게 조왕 헐과 장이는 거록성에서 나와 제후들에게 사례했다. 장이는 진여를 만나자, 진여가 조를 구원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꾸짖고 장염과 진택의 소재를 물었는데 진여가 노하며 ‘장염과 진택은 반드시 죽기를 각오해야 한다고 저를 책망했기에 제가 5천명의 군사를 주고 맞서보도록 했는데, 그들은 모두 몰살당해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이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진여가 그들을 죽였다고 생각해 진여에게 자주 물었다. 그러자 진여가 노하여 자신을 그렇게 책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하며 장군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아쉬워하지 않는다며 장군의 인수를 풀어서 장이에게 내밀었지만 장이는 깜짝 놀라서 받지 않았다. 그때 빈객 한 사람이 장이에게 빨리 그것을 받으라고 하자 장이는 마침내 그 인수를 차고 그 휘하의 사람을 거두었다. 진여는 돌아와서 장이가 그 인수를 돌려주지 않은 것을 또 책망하며 마침내 그곳을 급히 나와 버렸다. 장이는 마침내 진여의 군사를 거두게 되고 진여는 홀로 휘하 중에서 친하게 지내던 수백명과 함께 황하의 물가에서 낚시와 사냥을 하며 지냈다.
이렇게 진여와 장이는 결국 틈이 생기게 되었다

조나라 왕, 조경왕

조왕 헐은 다시 신도에 머물게 되었다. 장이는 항우와 제후들을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갔다. 한 고조 원년(기원전 206년) 2월에 항우는 제후들을 왕에 봉했다. 장이는 평소에 널리 교유했기에 그를 천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항우도 평소부터 장이의 현명함에 대해 자주 들어왔기 때문에 조 땅을 나누어 장이를 상산왕에 봉하고 신도를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신도의 이름을 양국으로 바꾸었다. 진여의 빈객들이 항우에게 진여와 장이는 똑같이 조(趙)에 공이 있다고 말했지만 항우는 진여가 함곡관으로 들어올 때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와 그가 남피에 있다는 것을 듣고 남피 부근의 세 현을 봉해주었으며, 조왕 헐은 대(代)의 왕으로 옮겨 주었다.
항우의 분봉에 불만이 생긴 진여는 마침 그 때 비슷한 불만이 있던 전영이 항우가 쪼갠 세 제나라를 아우르고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어 자신에게 군사적 지원을 해주자 봉읍에서 군사를 긁어모았고, 장이는 진여의 공격을 받아 패주했다. 한나라로 도주한 장이가 삼진을 평정하고나서 장한의 군사를 폐구에서 포위하고 있던 한왕(漢王)을 알현하자 한왕(漢王)은 그를 후하게 대우했다.
한나라가 동쪽으로 초(楚)를 공격했는데, 사신을 조(趙)에 보내어 함께 공격할 것을 제의했다. 이때 진여가 내 건 조건은 장이의 목숨이었다. 한왕(漢王)은 장이가 아닌, 장이를 닮은 사람을 죽여 진여를 속였다. 그렇게 한나라를 도왔지만, 한나라가 팽성의 서쪽에서 패하고, 진여도 장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 한나라를 배반했다. 한왕(漢王) 3년, 한신이 이미 위(魏)땅을 평정하여, 한나라는 장이와 한신을 보내 조(趙)를 정형에서 격파하고, 지수(泜水) 가에서 진여를 베고 조왕 헐을 추격해 양국 땅에서 죽였다.
한나라는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한왕(漢王) 5년(기원전 202년), 장이가 죽자 경왕(景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이의 아들 장오(張傲)가 그 뒤를 이어 조왕에 올랐다. 한 고조의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가 조왕 장오의 왕후가 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