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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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曹植

출생 192년(후한 헌제 초평 3년)
사망 232년(위 명제 태와 6년) 41세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은 자가 자건(子建)이며 조조의 넷째아들이자 조비, 조창의 친동생이다. 어머니는 변후(卞后)이며 패국 초현(譙縣) 사람이다. 192년(후한 헌제 초평 3년)에 태어나 232년(위 명제 태와 6년)에 항년 41세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생애

조조 시절

조식은 10세에 「시경」과 「논어」를 비롯해 사부 10만 자를 암송했고 문장에도 능숙했다. 조조는 그가 쓴 글을 보고 "남들에게 부탁하여 대신 지은 것이 아니더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조식이 무릎을 꿇고 "말을 꺼내면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고 붓을 움직이면 문장이 됩니다. 지금 당장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어찌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동작대가 새로 낙성되자 조조는 아들들을 데리고 동작대에 올라 그들에게 부를 짓도록 했다. 당시 조식은 붓을 들어 금세 완성했는데 매우 뛰어나 조조가 무척 기특하게 여겼다.[1]

조식은 14세에 원담(袁譚)정벌에 따라나섰고, 16세에는 오환 정벌에 종군하였으며, 20세에는 마초(馬超)정벌에 나섰다가 병이 들어 부스럼이 났고, 21세와 22세에는 두 차례에 걸쳐 조비와 함께 손권 정벌에 참가했다.

211년(건안 16년) 정월에 조식은 평원후에 봉해졌고, 214년(건안 19년)에는 임치후로 옮겨 봉해졌다. 7월에는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면서 조식을 남겨 업성을 수비하도록 했다. 조조가 조식에게 업성의 수비를 맡긴 것은 사실상 중용한다는 의미였다.

214년(건안19년)은 조조에게 가장 의기양양한 해였다. 그 영향은 조식과 그의 측근들에게도 미쳐 그들이 후계자 자리를 향해 더욱 야심을 불사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조는 태도를 바꾸었고 상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2]

215년(건안 20년)부터 3년이 흐르는 동안 조조는 조식에게 중요한 일은 전혀 맡기지 않았고, 조비를 세자로 정하고 나자 아예 조식을 핍박했다. 순식간에 조식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에 내몰리고 말았다. 조조가 죽고 조비가 자리를 계승한 다음부터는 조식은 아예 도마 위에 놓인 생선 꼴이 되었다.

조비 시절

220년(황초 원년)에 조식은 억지로 도성을 떠나 자신의 봉국인 임치(臨淄)로 가야 했다.

221년(황초 2년)에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다. 당시"감국알자 관균이 천자에게 '조식은 술에 취해 난폭하고 오만하게 굴며 사자를 협박했습니다.' 라고 상주했다. 해당 부서에서는 조식을 처벌할 것을 요청했지만 문제는 태후를 염려하여 조식을 안향후(安鄉侯)로 옮겨 봉했다." 조식은 군급의 작위에서 향급의 작위로 강등된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다시 견성후(현후)로 봉해졌다.

222년(황초 3년) 3월, 조비는 제후로 봉해진 동생 열한 명을 모두 군왕으로 삼고, 아울러 4월 14일 에는 조식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를 견성왕(현왕)에 봉했다.[3][4]그러나 머지 않아 동군 태수 왕기와 방포리 창집동이 또 조식을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고발했다. 결국 조식은 다시 죄를 얻어 도성으로 되었다. 조식은 "몸은 깃털보다 가볍고 비방은 태산보다 무겁다."라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내어 자기를 변호했다. 조비는 조식을 용서했고, 크게 감동했다. 그 후 얼마 동안 조식은 그런대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었다. 「낙신부」’서’에 따르면, 조식은 도성에서 자신의 봉국으로 돌아가던 도중에 "다시 낙천을 건너다가" 송옥(宋玉)이 초(楚)나라 임금과 신녀(神女)를 대한 일에 감동하여 <낙신부>를 지었다. 얼마 후에는 잇달아 상소하여 길조를 경하했다.

223년(황초 4년) 5월에 조식은 임성왕 조창, 백마왕 조표와 함께 "도성으로 가서 조회했다." 당시 조식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형틀을 쓰고 맨발로 대궐로 나아가" "땅에 엎드려 눈물을 흘렸다. 태후가 보고 못마땅하게 여겼다." 6월에 조비는 조창을 독살하고 "또 조식도 해치려 했다." 다행히 태후가 나서 "어차피 임성왕은 죽였지만 우리 동아왕(東阿王)마저 죽일 수는 없다."라고 말려 겨우 죽음은 면했다. 그해에 조식은 견성(甄城)으로 돌아와 다시 봉구왕으로 옮겨 봉해졌다. 매번 봉해지고 옮겨지고 할 때마다 조식은 예에 따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핵심 내용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조비가 이룬 덕을 칭송하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자술하는 내용이었다. 조식은 말을 겸손히 낮추고 용서를 구했는데, 자기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조창보다 나았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조비는 조식의 의도를 어여삐 여기고 조령을 내려 격려"했다고 한다.

225년(황초 6년)에 조비는 동쪽으로 정벌에 나섰다가 옹구(雍丘)를 지나던 중에 친히 조식이 사는 곳에 들러 식읍 500호를 더해 주었다.

조예 시절

226년(황초 7년), 조비가 병사하고 아들 조예(曹紀)가 뒤를 이었다. 조식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처지를 바꿔 보려 시도했다. 우선 내용이 긴<무제뢰>를 지어 애도하는 마음을 내보였다. 조식은 쓸데없는 말, 빈말, 본의 아닌 말을 잔뜩 거침없이 써 내려갔다. 찬사만 가득할 뿐 원망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아 그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엿볼 수 있다. 물론 전고(典故)를 즐겨 사용하고 수사를 한껏 강구하여 문채를 한껏 뽐내던 당시의 풍조를 고려해 보면 나름대로 홍분된 감정을 억제한 듯 보이기도 한다. 조비를 뒤이은 조예는 조비가 사용한 기존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다.

227년(태화 원년)에 조식을 준의왕(浚儀王)으로 옮겨 봉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옹구로 돌렸다. 당시 "조식은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해 항상 분노하고 원망하며 지냈다." 그는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상황이 바뀌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소를 올려 자신을 기용해 주기를 청했다." 조식은 <구자시표>에서 조카에게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군신의 도리를 언급했다. 그런 다음 "힘은 모자라지만 나라를 위해 진력을 다해 자그마 한 공이라도 세워 받은 은덕에 보답하고자 합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송곳과 칼의 쓰임을 본받게 하여 서쪽의 대장군에 소속시켜 부대의 군사를 통솔하도록 하거나, 동쪽의 대사마에 소속되어 전선 한 척을 이끌게 하신다면 신은 기필코 난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전선을 젓고 말을 달려 적진을 뚫고 적의 진지를 함락할 것입니다."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끝으로 기용되지 못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피력하며 "준마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백락이 자기 능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지금 신은 견마지로를 다하여 작은 공이라도 세우고자 하지만 시종 백락과 한나라가 저를 추천하지 않기에 봉지에서 안타까워하고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밝혔다.

229년(태화 3년) 조식은 다시 동아왕으로 옮겨 봉해졌다.

231년에는 다시 상소하여 기용해 줄 것을 청했다. 명제는 조식이 상소할 때마다 "도탑게 답을 해 주었다."

232년(태화 6년) 정월에는 조서를 내려 제후왕들을 모두 도성으로 불러 모았다. 하지만 명제는 조식을 기용할 생각은 없었다. 그해 2월에 명제는 네 개 현을 조식에게 주고 진왕(陳王)에 봉했다. 조식은 도성에서 지내는 동안 “황제를 독대할 때마다 시정(詩政)을 논하여 기용되기를 기대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의 봉지로 돌아는 조식은 마침내 "절망" 했다. 당시 법령 제도는 제후 나라인 번국(藩國)에 매우 엄격했지만 관속들은 무능했고 군사들은 불구이거나 늙은 사람들 만을 배속시켰으며, 그 숫자도 기껏해야 200명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조식은 과거에 저지른 잘못 때문에 이마저도 절반으로 줄었고, 게다가 11년 동안 세 차례나 자리를 옮기면서 늘 수심에 젖어 즐거움을 모르고 지낸 터였다. 결국 조식은 나이 마흔하나에 병사하였다.

작품

칠보시(七步诗)[5]

조비가 조조에게 <칠보시(七步诗)>를 짓게 한 일화가 있다. 남조 송나라 사람 유의경이 쓴 「세설신어」「문학」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조비가 조식에게 일곱 걸음을 걷는 동안에 시를 짓도록 했는데, 만약 완성하지 못하면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조식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 한 수를 완성했다.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는데 
콩을 짜서 즙을 만든다
콩깍지는 솥 아래서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는다
본시 한 뿌리에서 나왔건만
어쩜 이리도 급히 볶아 대나

煮豆持作羹,漉菽以為汁。
萁在釜下燃,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相煎何太急? <七步诗>
  • <칠보시>는 본래 여섯 구절이다. 앞에 나오는 세구절이 언제부터 ‘자두연두기(煮豆燃豆萁)’라는 하나의 구절로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다.

칠보시 일화에 대한 비판적 견해[6]

「삼국연의」에 나오는<칠보시>와 관련된 이야기는 많이 손질되었다. 조조가 세상을 떠났을 때 조식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조비는 허저를 보내 조식을 임치에서 체포해 업성으로 압송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어머니 변후가 간청해 조비는 조식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조비는 다시 분노가 폭발했다. 이때 화흠이 제안을 했다."재주를 시험하십시오. 만약 해내지 못하면 죽여 버리고 해낸다면 작위를 깎아 천하 문인들의 입을 막아 버리십시오.”<칠보시>를 짓도록 한 경위가 이러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첫째, 시간상 순서가 맞지 않다. 조식은 조비가 위왕이 된 뒤에는 자기나라로 돌아갔다. 따라서 당시에는 조식을 임치에서 체포할 수 없었다. 둘째, 조식은 본래 "줏대가 없었다." 조비가 왕이 되고 또 황제에 오르자 실제로 조식은 그에게 아첨했다. 조식은 많은 사람들이 눈을 부릅뜨고보는 가운데 조비 앞에서 의미심장한 시를 노래할 담력이 없었다. 셋째, 당시 조비는 조식을 가장 미워했고 노골적으로 그를 없애려 했다. 어머니에게는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 시에서 나타나는 대로 라면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두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시기」에서 언급한 듯이 조식의 본래 문집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만큼 홋날 덧붙여졌으리라 추정된다. 다른 하나는 <칠보시>는 스스로 한탄한 작품으로 보인다. 애당초 사람들에게 내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본래 문집에 수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비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림으로써 임방(任肪)이 “조식은 <칠보시>로 명성을 떨쳤다." 라고 했을 것이다. 두 번째 가능성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백마(白马篇)[7]

이 작품은 조식이 15세 때인 건안11년(206) 9월에 북쪽으로 아버지 조조를 따라 유성(柳城)원정길에 올라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 시가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영웅적인 내용과 호방한 풍격,표현상의 언어의 정교함과 다양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백마에 황금 재갈 장식하고
서북쪽으로 거침없이 내달린다.
누구 집 자제냐고 물으니
유주와 병주의 젊은 협객이란다.
어려서 고향을 떠나
사막 변경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언제나 좋은 활을 잡고
화살은 어찌 이리 들쭉날쭉 많은지.
활시위를 당겨 왼쪽 과녁을 깨뜨리고
오른쪽으로 쏘아 월지(月支) 과녁을 부서뜨린다.
손을 들어 날아다니는 원숭이를 맞히고
몸을 숙여서 마제(馬蹄) 과녁을 조각낸다.
재빠르고 날쌘 동작은 원숭이를 능가하고
용감하고 사나운 기세는 표범과 교룡 같도다.
변경의 성에는 위급한 경보 많고
오랑캐 기병이 수시로 침범하니,
우격(羽檄)이 북쪽에서 날아들면
말을 채찍질해 높은 언덕에 오른다.

白马饰金羁, 连翩西北驰。
借问谁家子? 幽并游侠儿。
少小去乡邑,扬声沙漠垂。
宿昔秉良弓,楛矢何参差!
控弦破左的,右发摧月支。
仰手接飞猱,俯身散马蹄。
狡捷过猴猿,勇剽若豹螭。
边城多警急,虏骑数迁移。
羽檄从北来,厉马登高堤。
长驱蹈匈奴,左顾凌鲜卑。
弃身锋刃端,性命安可怀?
父母且不顾,何言子与妻?
名编壮士籍,不得中顾私。
捐躯赴国难,视死忽如归。 <白马篇>

공후(箜篌引)[8]

이 시는 연회의 즐거움이 친구의 도의와 대업의 염원을 거쳐 결국 인생무상의 슬픔으로 끝난다. 비분강개하는 건안풍골(建安風骨)[9] 과 전형적인 삶을 근심해서 나오는 탄식의 특색을 잘 살린 일종의 서정시라고 말할 수 있다. 조식은 조조 생존 때인 건안 19년(214)에 임치후로 봉해진 적이 있는데, 이 작품은 그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높은 궁전에서 술자리를 벌이니
친한 벗들이 나를 따라와 노니네.
주방에서는 풍성한 음식 만들며
양을 삶고 살찐 소를 잡네.
진나라 쟁은 어찌 이리 격앙되며
제나라 슬은 조화롭고 부드럽구나.
양아의 기묘한 춤을 추고
낙양의 명곡을 부르네.
즐겁게 석 잔 넘게 마신 뒤
허리띠 풀고 산해진미 해치우네.
주인은 부귀 장수하라 말하고
손님은 만수무강하라 답례하네.
오랜 우정은 잊을 수가 없고
야박한 끝냄도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로다.
겸허함은 군자의 미덕이니
허리 굽혀 공손함이 무얼 바라서이겠는가.
세찬 바람이 태양을 날려 보내니
햇빛이 서쪽으로 쏜살같이 흘러가네.
성년 시절은 다시 올 수 없고
인생 백 년이 훌쩍 나에게 다가오네.
살아서는 화려한 가옥에서 살지만
죽어서는 무덤으로 돌아가리라.
옛사람 중 죽지 않은 자 누구인가
천명을 알기에 다시 무얼 걱정하리오.

置酒高殿上,亲交从我游。
中厨办丰膳,烹羊宰肥牛。
秦筝何慷慨,齐瑟和且柔。
阳阿奏奇舞,京洛出名讴。
乐饮过三爵,缓带倾庶羞。
主称千金寿,宾奉万年酬。
久要不可忘,薄终义所尤。
谦谦君子德,磬折欲何求。
惊风飘白日,光景驰西流。
盛时不再来,百年忽我遒。
生存华屋处,零落归山丘。
先民谁不死,知命复何忧。  <箜篌引>

평가

“예나 지금이나 어려서 지혜가 뛰어났던 사람으로 크게 성공한 자는 드물다. 크게 성공한 사람이 반드시 어려서부터 지혜로웠던 것은 아니다. 이 두가지를 겸비한 인물은 위나라 진사왕뿐이다.”-<시수>속편,권1-
"조식은 까다롭지 않고 순리를 따르는 성품이었다. 행동거지는 애써 위엄을 갖추려 하지 않았고, 거마와 의복은 소박했다. 조조는 조식을 만날 때마다 어려운 질문을 던졌는데 항상 훌륭한 답변을 내놓아 특별히 총애를 받 았다. 조식은 조비와 마찬가지로 독서를 좋아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조비와 조식이 지은 「등대부」는 모두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조식의 작품이 한층 재기가 돋보인다. 조식은 정치가다운 재능, 지혜, 담량, 식견이 부족했다. 반면 조비는 과감하고 임기응변, 속임수, 모략 등에 뛰어났다. 하지만 문학에서는 조식이 생각이 민첩하고 재능이 뛰어났으며, 조비보다 많은 작품을 세상에 남겼다. 그러나 단지 이 정도로 조비가 조식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문학 이론에서는 조비가 조식을 크게 앞지른다." -張作耀<조조평전>-
“위 문제는 문학적으로는 맑고 고운 재능이 넘쳐흘렀지만 역사적으로 평론가들은 그 가치를 폄하하여 조식에 비하면 천양지차라고 했다. 조식은 생각이 민첩하고 문학적 재능도 발군이었다. 그가 지은 시가는 아름답고 표 문(表文) 또한 일품이다. 조비는 구상은 구체적이지만 박력이 약했기 때문에 능가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악부는 맑은맛이 있고, 「전론」 「논문」은 핵심을 파악하여 나름대로 임기응변의 수완을 발휘했으며, 볼품없는 졸작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 사람들의 포폄(褒貶)이 한결같이 부화뇌동했기 때문에 결국 조비는 지위가 높다 하여 문학적 재능을 낮게 평가하고, 조식은 고생했다 하여 문학적 명성을 높게 평가했다. 당연히 훌륭한 논평이라 할 수 없다.”-유형-

참고문헌

  • 중국위키백과:曹植
  • <조조평전>,張作耀,남종건 옮김, 민음사
  • <진사왕 조식 시선>,曹植, 심우영, 지식을 만드는 지식
  • <자치통감9>,사마광, 신동준 역, OLJE CLASSICS

각주

  1. 「삼국지」「위서」「조식전」
  2. 「삼국지」「위서」「조식전」
  3. 당시 제후왕은 모두 봉지에 살았으나 이름만 있을 뿐 실지(實地)가 없었다.
  4. 자치통감,권69,위기1,위문제 황초 3년 (222)
  5. <진사왕 조식 시선>,曹植, 심우영, 지식을 만드는 지식p.113
  6. <조조평전>,張作耀,남종건 옮김, 민음사p.709-711
  7. <진사왕 조식 시선>,曹植, 심우영, 지식을 만드는 지식p.31
  8. <진사왕 조식 시선>,曹植, 심우영, 지식을 만드는 지식p.55
  9. 위진남북조 시기 당시 시인들이 사회적 혼란 속에서 크게 두 가지의 경향을 띠게 되었는데, 산림이나 초야에 묻혀 개인의 은일을 추구하거나 혹은 사회 속으로 뛰어들어 사회의 비참한 현실이나 부조리를 고발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노래하였던 것(문학비평용어사전, 2006. 1. 30., 한국문학평론가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