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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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문왕
출생 기원전 12세기
사망 기원전 11세기

개요

문왕(文王)은 중국 (商)나라 말기의 주(周)의 군주이다. 성은 희(姫), 명은 창(昌)이며 「西伯」「西伯侯」「西伯昌」이라고도 불린다. 계력(季歴)과 태임(太任)의 아들이며 주나라를 건국한 주무왕의 아버지, 태사(太姒)의 남편이다. 유교에 있어서는 무왕과 주공 단과 함께 모법적이며 도덕적인 군주로서 알려져 있다.

생애

희창의 조상은 대대로 주(周)를 통치하면서 상나라의 종속국으로 섬겨 삼공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인 계력이 죽은 후 주나라를 물려받았다. 희창은 선조인 후직공류의 유훈을 이어받아 농업을 발전시켰고 고공단보와 계력의 유훈을 받아 주나라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다. 또 노인을 공격하고 어린 사람에게는 자상하였으며 인구를 늘리기 위해 애썼고 천하의 인재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무사들이 희창에게 귀복하였다.
그러나 숭후호(宗侯虎)가 상 주왕(紂王)에게 “희창을 이대로 두면 당신에게 거역할 것이다”라고 참언한 탓에 주왕에게 잡혔다. 굉요(閎夭)들이 미녀나 신기하게 생긴 말, 36두의 말과 그 외에 모아둔 많은 귀한 물건들을 주왕의 총신인 비중(費仲)을 통해 주왕(紂王)에게 바쳐서 희창은 풀려났다.
희창이 주나라에서 인정을 재개하게 된 후 제후들은 다툼이 생길 때마다 희창에게 가서 조정을 구하였다. 어느 때 우(虞)와 예(芮)라는 작은 나라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나 양국의 군주들이 조정을 구하기 위해 희창을 찾아갔다. 그러나 주나라 영토로 들어왔다가 농민들이 서로 양보하면서 사는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두 나라의 군주는 마음을 잡아 분쟁을 그만두었다. 이 사건에 의해 제후들과 백성들로부터 찬사를 받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주나라로 몰려들었다.
이듬해 희창은 강태공(姜太公)을 군사로 하여 북방 유목 민족인 견융(犬戎)과 밀수(密須), (黎), (邗)을 잇달아 무너뜨리고 그 후에는 숭후호를 공격하고 그의 영토인 숭나라를 주나라와 병합하였다. 주왕(紂王)이 포학한 나머지 제후들은 점차 희창을 더 의지하게 되었으나 희창은 죽을 때까지 주왕의 신하로 살았다. 희창의 사후 주나라를 물려받은 무왕은 제후들을 이끌고 목야 전투를 일으켰다. 이때 혁명의 주도자는 자신이 아니라 희창이라고 하며 전차에 희창의 위패를 올려 출진하였다.

평가

유교에 있어서는 춘추전국시대의 유가가 주나라를 모범으로 삼아 주나라에 관한 서물을 경전으로 하였기 때문에 문왕은 무왕주공 단과 함께 숭배되었으며 논어맹자 이후 빈번히 언급되어 왔다.
문왕과 무왕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나라 (湯)이 하나라(夏) (桀)을 무너뜨리기 위해 혁명을 일으킨 것과 비슷한 사건으로 인식되어 있으나 무왕, 탕왕과 달리 문왕은 임종을 맞이할 때까지 신하로서 주왕(紂王)을 공경하였다는 점에서 유교의 교의인 명분론, 존왕양이론, 충의론의 근본에 대한 의제로 때때로 거론된다. 그 예로 주왕으로 인해 유폐되었을 때의 문왕의 심정에 대해 한유(韓愈)가 쓴 「구유조(拘幽操)」와 그것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의론이 잘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 사마천, 「사기 본기」, 小竹文夫・小竹武夫 역, ちくま学芸文庫, 1995.
  • 조영주, 「주역과 문왕」, 좋은따출판사, 2017.
  • 谷口眞子, 「近世中期の日本における忠義の観念について -山崎闇斎学派を中心に-」, 早稲田大学総合人文科学研究センター研究誌, 2016.
  • 市来津由彦, 「山崎闇斎編『拘幽操』における朱熹説理解について」, 広島大学 東洋古典学研究,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