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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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발.jpg
주발(周勃)
출생 ?
사망 B.C.169
생존시기 서한(西漢)
작위 강후(絳侯)
시호 무후(武侯)

주발(周勃, ?~B.C.169)은 패군(沛郡)[1] 출신의 말(秦末) 초(漢初)의 군사가이자 정치가이다. 한 태조 유방(劉邦)은 주발에 대해 중후하고 말수가 적어 큰일을 맡길 만한 인물이라 평가한 바 있다. 여러 공로를 인정받아 강후(絳侯)로 봉해진 바 있고, 한 문제 때 우승상으로 임명된 적 있다.

생애

유년 시절

주발의 조상은 원래 권현(卷县)에 본적을 두었지만 페이현으로 이주하게 됐다. 가난했던 주발은 일찍이 누에를 짜고 상갓집에서 피리를 불어 주면서 생계를 이어갔으며, 후에 군 입대를 하게 되었지만 말단 장교에 불과했다.[2]

반진(反秦) 전쟁

진이세(秦二世) 원년(B.C.209), 진나라에 봉기를 일으킨 유방을 따라 주발은 중연(中涓)의 신분으로 종군하여 호릉(胡陵)을 공격하고 방여(方輿)를 함락시켰다. 이에 반기를 든 방여를 제압한 주발은 풍읍(豐邑)을 침공하고 탕(碭)에서 진(秦)군을 무찌른 후 유현(留縣)과 소현(蕭縣)으로 군을 돌렸다. 재차 탕을 공격하고, 하읍(下邑)을 함락시킬 때 제일 먼저 성에 올라간 주발은 유방에게 오대부(五大夫)[3] 의 작위를 하사 받았다. 또한, 그는 몽성(蒙城)과 우성(虞城)을 점령하고 장한의 기마부대를 습격하여 큰 공을 세웠다.

위나라의 땅인 원척, 동민, 율현, 설상 등을 공격한 주발의 군대는 진나라 군대가 복양(濮陽)까지 가는 길을 따라가 견성을 공략하기도 했다. 개봉(開封)을 공격할 때는 당시 성 밑에 먼저 도달한 주발의 병사들이 다른 부대원들 보다 많았다고 한다. 항량이 전사한 후에는 유방이 군사를 탕에 주둔케 하고 주발을 호분(虎賁)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이후 주발은 유방을 따라 영양, 구지를 공격하여 하수를 건너는 나루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했다. 조분(趙賁)군을 격파하고 무관(武關)과 요관(嶢關)을 잇따라 함락시킨 후 진나라군을 멸한 주발은 공을 인정받아 장군으로 임명됐다.

초한상쟁(楚漢相爭)

유방이 한왕으로 봉해지고 주발이 위무후(威武侯)로 봉해졌다. 한왕은 주발에게 회덕(怀德)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삼진(三秦)[4]의 전쟁

유방을 따라 함양에 종군하여 조분과 내사(內史) 보(保)를 공격하고 북쪽으로 진군하여 칠현(漆縣)을 침공하였다. 장평(章平)과 요앙(姚卬)의 군사를 무찌르고 동쪽의 미성(郿城)과 번양(頻陽)을 함락시켰다. 폐구에서 장한을 포위하고 여러차례 공을 세웠다. 삼진을 침공한 후, 초한 성고 전투[5] 에서 주발은 요관(嶢關)의 요충지에 가장 먼저 다다른 다음 성고의 주요 전장에 들어가 작전을 수행했다.[6] 오창(敖倉)을 사수하다 유방과 함께 항적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항우가 죽은 후, 동쪽으로 진군하여 사수(泗水)군과 동해(東海)군을 평정했다. 이 과정에서 22개 현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후, 유방은 종리현(鍾離縣)을 주발과 관영에게 공동으로 하사했다.

한(漢)왕조 초기

연왕(燕王) 장도(臧荼)의 반란군을 역수의 하류에서 무찔렀다. 한 고제 6년(B.C.201) 유방이 주발을 열후로 봉하고 8180호의 식읍과 강후(絳侯)라는 작위를 하사했다. 한왕(韓王) 신(信)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주발은 군사를 이끌고 진양성(晉陽城)에서 한신이 이끈 흉노의 기병을 격파하고 진양성을 함락시켰다. 주발은 그 공을 인정받아 태위(太尉)가 되었다. 주발은 진희(陳豨)의 반군을 공격하고 마읍을 도륙냈고, 휘하의 병사들은 진희의 장수 승마치(乘馬絺)를 베어 죽이고 안문군(雁門郡) 17개 현과 운중군(雲中郡) 12개 현을 평정했다. 영구(靈丘)에서 다시 진희를 공격하고 진희의 승상 정종(程縱), 장군 진무(陳武), 도위(都尉) 고사(高肆)를 생포했다.
이후 연나라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발은 번쾌(樊噲) 대신 군사를 이끌고 계현(薊縣)을 함락시키고 노관의 대장 저(抵), 승상 언(偃), 군수 경(陘), 태위 약(弱), 어사대부 시(施)를 포로로 잡았다. 상란(上蘭)에서 노관의 군대를 격파한 후 노관의 군대를 저양에서 무찌르고 장성(長城)까지 추격하여 상곡군(上谷郡) 12개 현, 우북평(右北平) 16개 현,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29개 현, 어양군(漁陽郡) 22개 현을 평정했다. 고제를 따라 종군하여 그가 세운 공로로는 상국 1명, 승상 2명, 장군과 고관 등을 포로로 잡은 것과 별도의 군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2개의 군대를 격파하고 3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5개의 군에 속하는 79개의 현을 평정하면서 승상과 대장 각 1명을 포로로 잡은 것이다.

노년

기원전 195년 고조가 죽고 한 혜제가 즉위하였으며 주발은 태위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기원전 180년 여태후가 죽고 난 후 여러 여씨[7] 들이 소란을 일으키자 주발은 승상인 진평과 모의하여 여록의 군권을 빼앗아 여씨들을 몰살하고[8] 한 문제를 즉위시켰다. 문제는 주발의 공로를 높게 사 그를 우승상으로 임명했다. 주발은 승상의 자리에 위임, 해임되기를 반복하다 결국 면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는 고향에 내려간 후 스스로 주살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갑옷과 병장기로 무장시킨 병사들을 수행하다 모반의 의심을 받아 고문을 받고, 옥리에게 뇌물 공세를 펼쳐 겨우 사면 받게 되었다. 주발은 풀려나자마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백만 대군을 지휘하던 장군의 신분이었던 나는 옥리 한 사람의 권세가 그렇게 대단한 줄 몰랐다."

한 문제 11년(B.C.169) 주발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무후의 시호를 받았다.

후손

주발이 죽고 그의 아들인 주승지가 작위를 계승했다. 이로부터 6년 후 주승지는 공주[9] 와의 사이가 멀어지고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후국[10] 은 없어지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문제는 강후 주발의 아들 중 재능이 출중하다 여긴 하내태수 주아부를 뽑아 조후에 봉하고 강후의 후사를 잇게 했다.

관련 일화

유세객들에 대한 태도

주발은 문학에 관심이 없고 화통한 성격이라 평소 유세객들이나 선비들과의 대화에선 항상 동쪽을 마주보는 방향에 서서

"빨리 빨리 얘기하거라"

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주발과 진평

문제가 주발에게 “천하 1년동안 옥사를 판결하는 소송이 얼마나 있었느냐” 라고 하자, 주발은 대답하지 못했다. 또 문제가 “천하 1년동안 돈과 식량의 세금과 지출이 얼마나 되느냐?”라고 묻자 주발은 이 또한 대답하지 못했는데, 진평이

"두 가지 일에는 모두 담당하는 관리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옥사에 관한 일을 알고 싶으시면 정위에게, 돈과 양식에 관해 알고 싶으면 치속내사에게 물으시면 됩니다."

라고 답하여 주발을 난감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관련 고사성어

좌단 : 어느 한쪽을 편든다는 뜻으로, 여씨 반란 진압 중 주발과 병사들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 여씨 일족을 멸할 때 군사권을 장악한 주발이 병사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여씨를 위하려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를 위하려면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

이에 모든 병사들이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여씨 일족을 척살했다.

참고문헌

각주

  1. 지금의 장쑤성의 페이현을 말한다.
  2. 힘이 매우 세서 재관부대의 궁노수가 됐다고 한다.
  3. 진나라와 한나라에서 시행된 이십등작 가운데 하나로, 9등급에 해당한다.
  4. 중국의 관중을 달리 이르는 말이다.
  5. 형양-성고 전역의 성고, 형양, 사수 전투 중 하나를 말한다.
  6. 곡우(曲遇) 공격에서 그 공이 가장 컸다고 한다.
  7. 여록과 여산 등이 주축이였다.
  8. 이 과정에서 번쾌의 아내도 매 맞아 죽었다고 한다.
  9. 문제의 딸을 말한다.
  10. 제후의 나라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