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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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曾子)

출생 B.C 505
산동성(山東省)
사망 B.C 435
생존시기 춘추시대
주요 작품 «대학(大學)», «효경(孝經)»

개요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 10월 12일 - 기원전 435년)는 지금의 산동성인 노나라(魯) 남무성(南武城) 출신으로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이다.
성씨는 증(曾), 이름은 참(參)이다.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공자(孔子)의 말년 제자 중 하나이며 유가 학파의 주요 대표 인물이다.
아버지는 증점(曾点)이며 칠십이현(七十二賢)중 하나이고 그 역시 공자를 스승으로 모셨다.

생애

증자는 공자의 말년 제자이며 공자보다 46세 적었다. 그는 공자, 안자(晏子), 자사(子思), 맹자를 비롯한 동양 5성 중 하나이다. 성인 반열에 올라 있는 사람을 지칭할 때 혹은 가장 높일 때 사용하는 자(子)를 사용하고 있다.
유학 발전사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며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했는데, «논어»에서도 그에 대한 기록은 독특하다. 다른 제자들은 공자의 가르침을 배우거나 듣는 내용이 많은데 비해 증자는 자신의 발언 자체가 상당수 기록되어 있다.

증자는 «논어論語»를 편제했고 «대학大學», «효경孝經», «증자십편曾子十篇» 등을 저술했다.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졌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해 공자사상의 핵심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하기 위해 씨족제로부터 비롯된 효와 신을 도덕 행위의 근본 덕목으로 강조했다.
증자는 주고왕(周考王) 6년 (기원전435) 향년 71세에 사망했다.

공자와의 관계

공자가 70세가 넘고 후계자를 선정할 때, 공자는 증자에게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라는 한마디만 하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증자만이 공자의 말을 이해하고 “예”라고 대답했다. 세상을 부분적으로 보면 복잡하지만 하나의 원리로 꿰어보면 단순하다는 의미이다. 다른 제자들이 증자에게 공자의 뜻을 묻자 “선생님의 도는 충(忠)[1] 과 서(恕)[2]일뿐이네.”라고 답했다. 깨달은 자는 깨달은 자의 언어를 안다고 하듯이 이 모든 것을 증자는 이해했다.


«공자와 열두 제자»의 저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서술했다.

공자가 증자를 후계자로 삼는 장면으로 봐도 지나치지 않다. 이때는 이미 공자의 아들인 공리가 죽고, 수제자인 안회가 죽고, 애제자인 자로마저 죽었을 때였다.

 
— 신광철, «공자와 열두 제자»

공자와 증자의 나이차가 적지 않다는 점, 공자의 제자는 수 없이 많다는 점에서 공자는 증자를 매우 아꼈다고 볼 수 있다.

사상

효(孝)

증자는 효도로 이름이 높은 사람이다. 다음의 일화에서 그의 효성을 알 수 있다.

제나라에서 그를 불러 경을 삼고자 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늙은 부모를 모시고 있다. 이제 만일 남의 녹을 먹게 되면 그 사람의 일을 걱정해야 할 터인즉 그렇게 되면 나의 늙은 부모는 멀리 해야 할 터이지 그런 일을 차마 하지 못한다" 고 했다. 계모 밑에서 구박을 몹시 당했으나 그는 여전히 변치 않고 잘 봉양했다. 어느 날 아내가 부모의 조석상에 나물을 덜 익게 삶아 내놓았다해서 내쫓기로 작정을 했었다. 이것을 보고 남들은 그만한 일로 아내를 내쫓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고 만류했다. 이에 증자는 “나물을 삶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인데도 나의 명령을 듣지 않고 부모에게 봉양을 못하니 하물며 더 큰일에 있어서야 더하지 않겠는가?” 하며 아내를 내쫓아 버린 다음 죽는 날까지 다시 장가를 들지 않았다. 그의 아들 원(元)이 아버지에게 장가들기를 청했으나, 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옛날 고종(高宗)은 후처 대문에 효기(孝己)를 죽였고 윤길보(尹吉甫)도 후처 때문에 백기(伯奇)를 내쳐 버린 일이 있었다. 나는 위로 고종에게도 못 미치고 중간으로는 길보에게도 비교할 수 없으니, 그들이 겪은 이러한 나쁜 일을 하지 않는다고 어찌 장담하겠느냐?"


증자는 효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효도는 부모를 잘 모시는 것, 부모의 뜻을 잘 따르는 것,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을 잘 관리하는 것[3]

증자가 나이를 먹고 병세가 악화되자 문하의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이불을 젖히고 내 발을 보아라. 내 손을 보아라. «시경»에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하고 가는 듯, 얇은 얼음을 밟고 가듯 하라.’라고 했다. 이제 나는 명이 다했으니 앞으로는 몸에 상처를 내 부모에게 불표를 하는 걱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제자들아.”

여기서 부모님이 주신 대로 몸을 간수하는 것이 효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러난다.


그의 효 사상은 공자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공자가어»의 육본(六本) 일화에서 알 수 있다.

증자가 참외밭을 매다가 실수하여 참외 뿌리를 캐어 버렸고, 그의 아버지 증점이 노여워하여 큰 막대기로 증자의 등을 마구 때렸다. 그러나 증자는 웃으면서 아버지에게 “아까 제가 아버님께 죄를 졌을 때 아버님께서는 너무 힘을 들여서 저를 훈계하셨사오니 혹 병환이나 계시지 않습니까?”라고 말하고 자신이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했다. 공자는 이 소문을 듣고 노여워하여 제자들에게 증자가 와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했다. 공자는 고수(瞽叟)[4]와 순(舜)[5]의 이야기[6]를 이유로, 증자는 아버지를 섬기는데 몸을 내버려 맘대로 때리도록 버려두었으니 만약 죽었다면 아비는 불의에 빠졌을 것이라면서 이것이 불효라고 말했다. 증자는 이 말을 듣고 공자에게 나아가 사과했다.


인(仁)

증자는 인(仁)을 공자와는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공자는 인을 배우는 과정을 즐거움으로, 인을 실천하는 것도 기쁨으로 생각했다. 반면 증자는 인을 배우는 학문의 길은 무겁고 멀며 인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운 책무이니 무겁다고 했다. 또한 공자와 달리 선비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주문했다. 선비는 세상을 지도할 위치에서 세상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개선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증자에게 학문은 공자처럼 즐거움이 아니라 고행일지라도 당연히 짊어져야 할 짐이기도 했다. 이는 «논어»에 전해진 증자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선비는 포부가 크고 의작 강인해야 한다.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또한 무겁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또한 갈 길이 멀지 않은가?


증자는 인자(仁者)란 자신의 학식이 높아도 높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채워져 있음에도 비어 있는 듯이 보이며, 능력이 있음에도 능력이 있음을 보이지 않아 어수룩하게 보일 정도이지만 충만하고 완성된 존재로 보았다.

또한 «논어»의 대목에서 증자는 한결같을 수 있는 사람, 공평무사하고 큰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대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 군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린 임금을 맡길 만하고, 나라의 일을 위탁할 만하며, 큰 절개에 임했을 때 그것을 꺾을 수 없다면 군자다운 사람인가? 군자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먼저 몸과 마음을 닦아 수양하여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한다는 의미이다.

수신제가

수신제가는 «대학»‹傳8장›에 기록되어 있다.

집안을 단정히 한다는 것이 그 몸을 닦는 것에 있다고 하는 것은
1.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것에 치우치며
2.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것에 치우치며
3.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것에 치우치며
4. 가엾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것에 치우치며
5. 오만하고 태만히 여기는 것에 치우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안 좋은 점을 알며, 미워하면서도 좋은 점을 아는 자가 천하에 적은 것이다.

이 다섯가지는 사람에게 있어 본래 당연한 것이지만 평범한 사람의 정(情)은 오직 향하는 바대로 하고 더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 그러면 반드시 한쪽으로 빠져서 몸이 닦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제가치국

제가치국은 «대학»‹傳9장›에 기록되어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반드시 먼저 그 집안을 단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 집안을 가르치지 못하고서 남을 가르치는 자는 없으므로, 군자는 집을 나가지 않고도 나라에 가르침을 행할 수 없는 것이다. 효(孝)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제(弟)는 상사를 섬기는 것이고, 자(慈)는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

몸이 닦이면 집안을 가르칠 수 있다. 효, 제, 자는 몸을 닦아 집안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군주를 섬기고 상사를 섬기고 백성을 부리는 도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집안이 위에서 가지런해지면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 것이다.

치국평천하

치국평천하는 «대학»‹傳10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른바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그 나라를 다스리는데 있다는 것은
1. 윗사람이 노인을 노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의 효(孝)를 불러일으키며
2. 윗사람이 어른을 어른으로 대우하면 백성들이 제(弟)를 일으키며
3. 윗사람이 고아를 구휼하면 백성들의 등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는 혈구의 도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일화

증자의 성격과 언행은 «공자가어», «논어», «한비자», «예기» 등에 서술된 일화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재액(在厄)

«공자가어» 중 재액(在厄)은 어진 자라고 해서 꼭 남들이 믿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해서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니며, 충성심을 반드시 군주가 알아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여기서 증자는 공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훌륭한 예시를 보여주고 있다.

증자가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노나라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노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증자에게 한 고을을 떼어주었다. 그러나 증자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사람들은 노나라 임금이 원해서 주는 것인데 굳이 사양한 연유를 물었고, 증자는 이렇게 답했다.

듣자니 남의 것을 받는 자는 항상 남을 두려워하게 마련이고, 남에게 물건을 주는 자는 항상 남에게 교만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임금이 나에게 땅을 주기만 하고 교만을 부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나로서야 어찌 두려운 마음이 없겠는가?

공자가 이 소문을 듣고 절개를 완전히 하였다고 칭찬했다.

약속한 돼지를 잡다

증자는 약속 이행을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게 실행한 사람이다. 이에 대한 일화가 «한비자»에 전한다.

증자의 부인이 장을 보려고 나서자 어린 아들이 따라가겠다고 울며 떼를 썼다. 증자 부인은 그저 아이를 달래기 위해 시장에 다녀온 뒤 돼지를 잡아 맛있는 음식을 해줄 테니 집에 있으라고 말했다. 아들은 그 말에 울음을 그쳤고 증자의 아내가 장을 보고 돌아왔다. 증자가 마당에서 숫돌에 칼을 갈고 있자 아내가 늦은 시간에 칼은 왜 가냐고 물었다. 증자는 돼지를 잡으려고 한다고 대답했고, 아내는 놀라서 돼지를 왜 잡냐고 다그쳤다. 증자는“당신이 아이에게 돼지를 잡아 요리를 해주기로 약속했으니 잡을 수 밖에 없소.”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를 달래려 했던 말이라고 하자 증자는 태연하게 말했다.“아이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오. 아이는 부모가 하는 대로 배우는 법인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아이가 뭘 배우겠소.”그날 저녁 잠을 자는데 아들이 자다 말고 일어나 밖을 나가려고 했다. 증자는 아들에게 어디가냐고 물었고,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다.“친구에게 책을 빌렸는데 오늘까지 돌려주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돼지를 잡는 것을 보고 저도 깨달을 바가 있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친구에게 돌려주려고 합니다.”

날마다 세 가지로 자신을 반성한다

증자는 나를 지키고 바르게 만드는 존재는 바로 자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채찍을 들이대면 자성과 독려가 되지만 남에게서 채찍을 맞으면 노예가 된다며 세상을 바르게 살기 위해 가는 존재는 자신임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주문하고 실천했다.

«논어»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증자는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하면서 진실되지 않았는가? 벗과 사귀면서 믿음이 없지 않았는가?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것을 남에게 전하지는 않았는가?


또한 «소학»에서의 발언에서 그의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가 드러난다.

관리는 지위가 생기면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병이 조금 나을만하면 마음을 놓아 오히려 중하게 한다.

죽는 순간에도 빈틈이 없었다

증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예(禮)를 지켰는데 이는 «예기»에 기록되어 있다.

증자가 병이 들어 누워있는 자리는 계손씨가 하사한 대부(大夫)의 자리였고, 증자는 사(士) 계급이었다. 그의 제자 동자가 "화려하고도 아름답습니다. 대부의 삿자리가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누워있던 증자는 벌떡 일어나 자신은 힘이 모자라 자리를 바꿀 수가 없으니 맏아들에게 자리를 옮겨 달라고 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맏아들은 증자의 병이 위급하니 천천히 바꾸자고 설득했으나 증자는 오히려 맏아들을 훈계했다. 평생 예를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죽는 순간 그것이 틀어지도록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증자는 자리를 교체하던 와중에 죽고 만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시련이 오더라도, 죽어가는 순간이라도 지키려는 증자의 굳은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참고문헌

왕숙 저, 이민수 역, 『공자가어』, 을유문화사, 2003
신광철, 『공자와 열두 제자』, 당신의서재, 2018
이영수, 『간추린 사서四書』, 도서출판 행복에너지, 2018
증자 저, 권영한 역, 『효경』, 전원문화사, 2000

百度百科, 曾子

  1. 참되고 진실한 마음가짐이며 마음의 한가운데를 의미한다. 왕이나 제후에게 바치는 일방적인 행동규약이 아니라 세상의 한가운데서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논리다.
  2. 나를 빗대어 상대의 마음을 읽어 용서하는 마음이다. 공자의 핵심 사상은 충서를 통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는 수신에 있었다.
  3. «효경» ‹개종명의장›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우리는 우리의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내 것이 아닌 부모의 것이므로 소중히 간직해야 한다는 의미.
  4. 순임금의 아버지. 눈 먼 장님이라는 뜻으로 몹시 어리석어서 선악을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5. 효행이 뛰어나 요(堯)임금으로부터 천하를 물려받았다.
  6. 순이 그 아버지 고수를 섬길 때 고수가 심부름을 시키고자 할 적에는 그곁에 있지 않을 때가 없었으나, 순을 잡아서 죽이려 할 때에는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또 매를 맏을 때도 작은 매로 때리면 그대로 맏고있다가 큰 매로 때리면 도망쳐버렸다. 그런 까닭에 고수는 아무리 악했어도 그가 아비가 아니라는 죄까지는 범하지 않았고, 순도 지극한 효도를 잃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