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공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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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 공왕
출생 기원전 600년
사망 기원전 560년

개요

楚共王(초공왕)은 나라의 23대 군주로 그의 본명은 雄審(웅심)이다. 그의 아버지 楚莊王(초장왕)이 즉위 23년에 사후 雄審(웅심)은 기원전 590년 10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가 너무 어렸기에 영윤 子重(자중)이 정사를 맡았다. 장왕 사후 吳()가 신흥강국으로 떠올랐으며 경쟁국가인 晉()은 厲公(여공)을 중심으로 더욱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共王(공왕)은 (진)과 연합을 하여 晉()吳()연합에 대항했으며 晉()과 기원전 579년 휴전협정을 맺는다.
하지만 이내 그 협정을 깨고 공왕은 晉()과 鄢陵(언릉)에서 전투를 하게 되는데 이 전투에서楚()는 크게 패하고 공왕은 呂錡(여기)의 화살에 눈을 맞고 한쪽 눈을 잃는다. 이후 楚()는 국운이 크게 기울고 楚共王(초공왕)은 죽는 날까지 언릉의 전투를 자신의 한으로 생각하며 기원전 560년 사망한다.

주요 사건

제 1차 弭兵(미병)

초공왕 즉위 당시 5강 판도

초공왕 6년(기원전 584년), 巫臣(무신)은 멸문의 원수를 갚기 위해 晉()으로 망명한다. 이후 (오)나라로 사신으로 가서 그들에게 병법을 가르쳐 吳(오)가 강성해지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후 (오)나라는 楚()에 속해 있던 郯(담)과 州來(주래)와 같은 만이소국을 점령하며 楚()를 위협하는 강국으로 성장한다.
晉()은 북진하려는 楚()를 견제하기 위해서 吳(오)와 연합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楚()는 (진)과 연합한다. 그리고 楚()와 晉()은 鄭()을 두고 소모전을 이어 나간다.
鄭()은 초장왕 사후 초의 세력이 약해지자 다시 晉(진)에 붙어 국가를 연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晉()이 수도를 옮길 때 기회를 보던 楚()는鄭()을 晉()으로부터 구원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출정시켰지만 싸움을 걸지는 못했다. 이에 楚()는 鄭()을 뇌물로 매수하려 했고 成公(성공)은 晉()과 楚()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晉()은 鄭()을 공격했고 楚() 역시 晉()을 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사실상 지리적으로 晉()과 吳(오)는 서로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楚()와 晉()은 각자 2대 1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전쟁에 대한 피로가 쌓일 때 즈음 楚()의 子重(자중)과 晉()의 欒書(난서)와 사이가 좋았던 (송)의 华元(화원)은 이 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고 초공왕 10년(기원전 580년) 처음으로 전쟁을 멈추는 모임을 가졌고 기원전 579년 송나라 도성 서문 밖에서 晉()의 사섭(士燮)[1]과 楚(초)의 공자 피와 허언을 만나서 1차 弭兵(미병)을 맺는다.[2]

鄢陵之戰(언릉전투)

전쟁 과정

언릉 전투 시의도

초공왕 14년(기원전577년) 鄭()이 楚()의 부용인 許(허)를 공격했고 이에 楚()는 鄭()을 공격한다. 그리고 楚()는 鄭(정)에게 汝水(여수) 남쪽의 땅을 약속하고 晉()을 배반하게 하였다.
이에 晉()은 鄭()을 토벌하기로 한다. 楚(초)와 晉(진)에서 전쟁만을 원한 것은 아니다. 楚()의 申叔時(신숙시)와 晉()의 范文子(범문자)는 전쟁을 반대하지만 결국 초공왕 16년(기원전 575년) 晉()의 厲公(여공)은 欒書(난서)를 중군으로 하여 齐(제)、鲁(위)와 함께 鄭()을 향해 출병한다.
이에 楚共王(초공왕)은 鄭()을 구원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楚()연합과 晉() 연합은 鄢陵(언릉 : 현 하남 언릉 서남쪽)에서 교전을 벌였고, 晉()이 승리한다. 이때 주목해야 할 점은 각 군의 진영에는 서로의 진영에서 망명한 사람이 있어는데 楚()에서 晉()으로는 苗賁皇(묘분황)이 晉()에서 楚()로는 白洲梨(백주리)가 있 었다. 이들의 역할은 언릉전투에서 굉장히 컸고 특히 苗賁皇(묘분황)의 분석으로 적군의 중군을 자신의 진영으로 유인하는 전술을 사용했고 이는 언릉전투에서 晉()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언릉전투 시의도 참고)[3]
이 전투에서 초공왕은 呂錡(여기)의 화살에 눈을 맞아 달아났다. 이후 전쟁 중에 楚()의 총사령관이었던 子反(자반)은 다음 날 전투를 하기 전 열심히 싸우기 위해 술을 한잔 하고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共王(공왕)이 보낸 사신이 보고 共王(공왕)에게 전하게 된다. 이에 共王(공왕)은 크게 실망하고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이었던 楚의 병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사기를 잃었고 전군에 共王(공왕)은 퇴각명령을 내리고 瑕(하)로 도주한다. 곧이어 영윤 子重(자중)은 子反(자반)을 문책하고 子反(자반)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共王(공왕)은 子反(자반)이 자살을 하려 할 것 같아 그 것이 두려워 사람을 보내지만 이미 전쟁의 패배에 책임을 느낀 군의 대장 자반(子反)은 자결한다.[4]

전쟁 결과

언릉 전투는 晉()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이 전쟁의 승리로 晉()이 패권국가가 된 것은 아니다. 范文子(범문자)는 전쟁 이후 晉에 있을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주는 교만하고 사치하면서도 전쟁에서 적수를 이겼다. 그러니 이는 하늘이 그 잘못을 더하고자 하는 것이니 장차 난리가 나리라. 나를 아끼는 이는 오직 나를 위해 기도해달라. 나를 빨리 죽여 난리를 보지 않게 하라. 그게 우리 범씨의 축복이다.[5]

范文子(범문자)가 걱정했듯이 晉()의 승리에 중심이 되었던 郤(극)씨 가문이 엄청난 권력을 갖게 된다. 이것을 막기 위해 欒書(난서와 厲公(여공)은 郤(극)씨 가문을 숙청한다. 이와 같이 전쟁이 끝난 이후 晉()은 내정의 어려움을 겪는다. 마찬가지로 楚()는 共王(공왕)이 사망한 이후로 이렇다할 인재가 나타나지 않으며 오랜 정벌전으로 국인들과 위성들이 이반의 조짐을 보이게 되며 나라가 어려워진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진)과 吳(오)만 더욱 성장하게 되고 楚()와 晉()은 전선을 줄이기 위해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관련일화

楚弓楚得(초궁초득)

초궁초득 이야기는 춘추전국시대에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최초의 문헌은 公孙龙子·迹府(공손용자 적부)에 기록되어 있다. 초기의 기록에서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楚()의 왕 중 어떤 왕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으나 훗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共王(공왕)으로 기록된다. 楚()의 共王(공왕)이 사냥을 하러 가서 활을 잃어버리자 신하들이 그 활을 찾으려 하는데 共王(공왕)은 이를 막고는 초나라 땅에서 초나라 백성이 그 활을 줍게 될 것이니 찾을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는 共王(공왕)의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했지만 훗날 공자를 거쳐 마음의 도량이 좁음을 의미하는 사자성어로 의미가 바뀌게 된다.[6]

巫臣(무신)과 夏姬(하희) 이야기

夏姬(하희)는 춘추전국시대 5대 미녀의 최고로 꼽힌다. 楚莊王(초장왕)이 陳(진)을 멸했을 때 夏姬(하희)의 미모에 마음이 움직여 그녀를 후궁으로 두려 했고 司馬公子(사마공자) 역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지만 그녀는 이미 巫臣(무신)과 혼인을 한 상태였다. 기원전 589년 巫臣(무신)은 齊()로 가기 위해 夏姬(하희)와 함께 晉()의 밑으로 들어갔고 이에 자반(子反)은 共王(공왕)에게 巫臣(무신)의 일족을 멸해야 한다고 권한다.
하지만 共王(공왕)은 자반(子反)에게 무신은 선왕을 위해 충성하는 인물이지 나에게 충성을 하는 인물이 아님을 강조하며 이 요청을 거절한다.[7] 共王(공왕)이 자반(子反)의 의견을 거절한 이유를 보면 共王(공왕)이 이미 이른 나이에 선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기원전 584년 결국 자반(子反)은 巫臣(무신)의 일족을 멸한다. 이에 巫臣(무신)은 자반(子反)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참람하고 간특한 탐욕으로 군주를 섬기면서 무고한 사람들을 수없이 죽였다. 나는 반드시 너희들이 명을 받아 여기저기 내달리다 지쳐 죽게 만들것이다.[8]

이 서신을 보낸 이후 巫臣(무신)은 晉(진)으로부터 전차부대 1량과 군졸 100을 데리고 吳(오)에 사신으로 간다. 그리고 巫臣(무신)은 吳(오)에 병법을 가르쳤고 吳(오)가 楚(초)의 동쪽 땅을 점령하는데 큰 힘을 준다.

養由基(양유기) 이야기

楚(초)의 명사수 養由基(양유기)는 邲戰鬪(필전투)의 영웅이며 여러 전설적인 설화를 지니고 있는데 共王(공왕)과 있었던 일도 있다. 언릉전투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 養由基(양유기)는 활쏘기를 하던 중 일곱 겹의 갑옷을 뚫어 共王(공왕)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共王(공왕)은 養由基(양유기)가 晉()군대 의 표적이 될까 두려웠고 이에 언릉 전투에 養由基(양유기)를 화살이 없이 참전하도록 시킨다. 이때 共王(공왕)은 晉()의 呂錡(여기)가 쏜 화살에 눈 하나를 잃게 되는데 화가 난 共王(공왕)은 양유기에게 화살 2개를 주며 呂錡(여기)를 쏘라고 명한다. 이에 養由基(양유기)는 단 하나의 화살로 呂錡(여기)를 사살하고 남은 한 개를 共王(공왕)에게 돌려준다.[9]

楚共王(초공왕) 의 유서

共王(공왕)의 유서는 國語(국어) 楚語(초어)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못난 이 사람이 부덕하여 어려서 사직을 물려바았소이다. 태어나 십년 만에 선군을 여의고 스승의 보우와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도 이렇게 다복한 군주가 되었소. 이 못난 이가 부덕하여 선군의 패업을 잃고 언릉에서 초나라 장정들을 몰살켰으니, 이는 스스로의 죄요. 만약 몸이나마 무사하게 땅에 묻힌다면, 제사를 주관하는 이들은 내시 호를 靈(영 : 공업을 이루기 위해 힘쓰지 않은 군주를 칭함)이나 厲(여 : 포학한 군주)로 해주시오

이 내용을 미루어 봤을 때 그가 얼마나 선군에 대해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언릉 전투를 인생의 한으로 생각하고 반성하고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가족 관계

초공왕의 가족관계
  • 조부 熊商臣(웅상신) 21대 楚成王(초목왕)
  • 부 熊侣(웅려) 22대 楚莊王(초장왕)
  • 아들
  1. 熊昭(웅소) 24대 楚康王(초강왕)
  2. 熊圍(웅위 26대 楚靈王(초령왕)
  3. 熊比(웅비) 27대 楚初王(초초왕)
  4. 子皙(자석)
  5. 熊棄疾(웅기질) 28대 楚平王(초평왕)
  6. 公子黑肱(공자흑굉)
  7. 王子茷(왕자패)

참고 문헌 및 자료

  • 范文子(범문자)의 이름
  • 이 맹약 이후 晉()은 곧바로 秦(진)을 공격하는데 치중했고 楚(초)는 晉(진)이 吳(오)와 계속 교역하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커다란 이익을 보지 못했다.
  • 진나라는 의도적으로 중군과 하군의 위치를 바꿔서 상대의 주력군인 우군을 격파하고 상대의 중군을 자신의 진영 깊은 곳까지 유도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 사마천 사기에서는 '공왕이 자반을 사살했다'라고만 나와 있음 본 내용은 공원춘, 『춘추전국이야기 : 남방의 웅략가 초장왕』308p-309와 바이두 백과, “楚共王”를 참고함.
  • 공원춘, 『춘추전국이야기 : 남방의 웅략가 초장왕』, 역사의 아침(2011) 311p
  • 바이두 백과, “楚共王”참고
  • 바이두 백과, “楚共王”참고
  • 공원춘, 『춘추전국이야기 : 남방의 웅략가 초장왕』, 역사의 아침(2011) 284p
  • 바이두 백과, “楚共王”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