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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 시대]] [[전진]](前秦)의 제3대 왕. 재위는 357~385년이다. 자는 영고(永固)이고 저족 출신이다. 이민족 출신이지만 학문을 장려하고 태학을 세웠으며 농경의 진흥에도 노력했다. 한인(漢人) 명재상 왕맹의 도움으로 한때는 화북을 통일하여 그 세력이 장강의 [[동진]](東晉)을 압도하였으나, 천하를 통일하려고 일으킨 비수대전에서 패하여 패망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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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견(苻堅)'''은 [[5호 16국 시대]] [[전진]](前秦)의 제3대 왕이며 재위는 357~385년이다. 자는 영고(永固)이고 저족 출신이다. 이민족 출신이지만 학문을 장려하고 태학을 세웠으며 농경의 진흥에도 노력했다. 한인(漢人) 명재상 왕맹의 도움으로 한때는 화북을 통일하여 그 세력이 장강의 [[동진]](東晉)을 압도하였으나, 천하를 통일하려고 일으킨 비수대전에서 패하여 패망의 길을 걷는다.
  
 
== 생애 ==
 
== 생애 ==

2020년 6월 29일 (월) 16:56 기준 최신판

부견(苻堅)

출생 338
업(鄴)
사망 385
별칭 진 세조(秦 世祖), 선소황제(宣昭皇帝)

개요

부견(苻堅)5호 16국 시대 전진(前秦)의 제3대 왕이며 재위는 357~385년이다. 자는 영고(永固)이고 저족 출신이다. 이민족 출신이지만 학문을 장려하고 태학을 세웠으며 농경의 진흥에도 노력했다. 한인(漢人) 명재상 왕맹의 도움으로 한때는 화북을 통일하여 그 세력이 장강의 동진(東晉)을 압도하였으나, 천하를 통일하려고 일으킨 비수대전에서 패하여 패망의 길을 걷는다.

생애

전진 건국 이전

저족은 한(漢)대 장성지대에서 서북지대에 걸쳐 유목하던 이민족으로, 감숙성과 사천 북부 일대를 터전으로 살아왔다. 저족의 부홍은 영가의 난을 틈타서 저족의 맹주가 되었는데, 전조(前趙)의 유요와 후조(後趙)의 석륵에 복종했다. 부견은 부홍의 손자인데, 후조의 수도 업(鄴)에서 나고 자랐기에 유학적 교양을 갖추었다. 부견은 부웅의 아들인데, 전진을 세운 부건은 그의 큰아버지이다. 부홍은 원래 성이 포(蒲)였는데 부(苻)로 고쳤다. 부홍의 뒤를 이은 부건(苻建)이 세력을 규합하여 장안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리고는 장안에서 천왕(天王), 대선우라 하고 하여 351년 전진(前秦)을 건국하였고, 부견은 종군하였는데 이때 14세였다.

즉위 이전

이후 부견은 여파루를 통해 왕맹(王猛)을 만나게 되는데, 왕맹을 대하기를 유비제갈량을 대하는 듯하였다. 이로서 막하에는 왕맹을 포함해 여파루( 呂婆樓), 강왕(强汪), 양평로(梁平老) 등 한족, 저족들의 보좌를 받았다. 부건이 재위 4년에 죽자 아들 부생(苻生)이 이어받았는데 폭정을 휘둘렀고, 결국 부견이 그를 살해하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스스로 대진천왕(大秦天王)이라 하였다.

즉위 이후

내정

한문화의 전통을 존중하는 것은 시정방침으로 삼아 학교를 세우고 고위 자제들을 태학에 입학시켜 인재를 등용하고, 서민에 대해서도 뛰어난 자는 임관시켰다. 특히 부견은 한족 출신들을 대거 등용했는데, 즉위 이후 왕맹을 승상으로 삼고 다스리게 하였다. 왕맹은 전진의 국가 기반을 공고히 하고 국세 확장에 공헌하였다. 왕맹은 법제를 정리하고 엄벌주의로 국가질서를 확립했다. 또한 저족의 지배층이 한인을 능욕하고 민족적 알력을 일으켰기에 가차없이 이들을 탄압하여 종족주의를 타파해 호한 융합을 도모하였다. 부견은 석호처럼 이민족 차별정책을 쓰지 않고, 흉노, 선비 등 여러 민족을 등용해 민족 화해정책을 펼쳤다.

부견은 즉위 이후 전대의 상공업 우대 정책 대신 한족 제국의 전통적인 중농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부견은 농민 보호를 위해 조세를 감면하고 호부의 노비들을 시켜 관개시설을 세움으로써 관중 분지의 농업생산력을 발전시켰다. 면수(沔水) 북부 양양 근방의 벼농사 토지를 군둔으로 하여 군호 600여 호로 이것을 경작시킨 기사가 진서 재기에 게재되어있다. 이 때의 군둔(병사들에게 땅을 경작하게 하는 것. 자급자족의 장점이 있다)은 가족을 대동하고 있는 군호로 경작시킨 것으로 보아서 민둔의 성격과 큰 차이가 없던 것으로 보인다. 북부 뿐만 아니라 흉노족이나 선비 등의 반란이 일어나면 그들을 용서한 뒤 장안에 사민하고 태학에서 교육시키는 등 관대한 성품을 가졌다. 그리고 관중에 많은 호의 여러 호족을 이주시켜 관중을 충실케 하였고 부국강병을 노리고 내치정비에 힘썼다.

화북의 통일

전연(前燕)에서는 영주 모용준이 죽은 뒤 일족 사이의 내분이 일어나는 동안 강남 동진의 장군 환온이 북벌을 감행하여 전진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전연이 약속하기로 한 땅을 주지 않아 결국 370년에 전연을 멸망시켰다. 371년에는 구지를 멸했으며 373년에 동진의 사천지방을 정복하였다. 재상 왕맹은 375년에 죽었으나 부견은 팽창을 계속하여 376년에는 양주를 근거로 하는 한족 장씨의 전량(前凉), 탁발십익건의 대(代)나라를 멸망시켜 화북지역을 통일하였다. 그리고 379년에는 강남 동진의 요충지인 양양을 함락하여 한수(漢水)까지 진출하였다. 서쪽으로는 장군 여광(呂光)과 군사 7만을 파견하여 언기를 항복시켰고 구자(龜玆)왕 백순이 항거하자 멸망시키는 등 서역제국을 토벌해서 서역 36국을 포함해 62개국의 조공을 받았다.

몰락과 죽음, 그 이후

부견은 동진의 정벌을 감행하고자 하였는데 동생인 부융과 후궁 장부인, 아들인 중산공 선을 포함하여 여러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특히 왕맹은 임종 직전 부견에게 동진의 정벌을 극구 반대하며 북쪽의 한족은 동진을 그리워하며 동진의 한족은 단결되어있다고 하였고, 선비족이나 강족 등이 후환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선비족의 모용수만이 동진 정벌을 찬성했고 부견은 이에 힘입어 보병 60만과 기병 27만 약 9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이것이 비수대전의 시작이다.

동진의 재상 사안(謝安)은 동생 사석과 조카 사현을 선봉으로 삼았고 8만의 군사로 대적하였다. 겨울, 유뢰지가 이끄는 동진군이 전진군을 공격하였고 전진의 5만 군사가 크게 패하여 강을 건너려다 1만 5천이 죽었다. 비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양측에서 사현은 부견에게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니 동진 군이 강을 건너가 싸우자고 권하며 전진군의 후퇴를 요구하였다. 부견은 이에 응하며 동진군이 도하 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병사들은 소통이 되지 않아 정말 후퇴하는 줄 알았고 앞다투어 도망쳤다. 양양의 태수이자 동진의 신하였다가 전진의 장수가 된 주서는 전진군의 혼란을 조장했고, 결국 일시에 전진군은 무너졌다. 결국 전진의 군사 중 살아남은 자는 10만에 지나지 않았으며 부견도 장안으로 도망쳤다. (383년)

비수의 패전에서 전진이 패배한 원인으로는 [[전진] 군부대의 특징이 다민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꼽히는데, 단결력과 통일이 부족하여 90만 대 8만이라는 압도적인 수에도 불구하고 동진에 패하였다. 그 결과 화북은 다시 분열되었고, 선비족, 강족 등이 계속 반란을 일으켜 망하였다. 자세히는 모용수후연을 건국하였고 관중에서는 강족 출신인 요장의 후진이 세워졌으며, 걸복국인의 서진, 여광의 후량, 모용홍의 서연 등이 건국되었다. 결국 왕맹이 주의했던 이민족 장수들은 배반하여 나라를 세웠고, 동진은 황하까지 도달했다. 385년, 서연의 모용충이 장안을 공격하자 부견은 성을 나와 오장산으로 도망쳤다. 후진의 요장은 부견을 잡아서 옥새를 빼앗고 부견을 죽였는데, 그때 부견의 나이가 48세였다(385년). 요장의 장병들은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통곡하였다. 이후 부견의 아들 부비가 뒤를 이었으나 1년만에 패배하여 죽었으며, 394년 부숭이 죽으며 전진은 멸망했다.

삼국(三國)과의 관계

40년, 진(秦)의 왕맹이 연(燕)을 격파했다. 연나라 태부 모용평이 쫓겨왔으나 왕이 이를 붙잡아 진(秦)에 보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여름 6월, 진왕 부견이 사신과 함께 승려 순도(順道)를 파견하며 불상과 경문을 보내 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위두(衛頭)를 부씨 진나라에 보내 공물을 바쳤다. 부견이 물었다. “경이 말하는 해동의 일이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위두가 답했다. “또한 중국과 같습니다. 시대가 바뀌었고 명호도 고쳐졌으니, 지금과 예전이 어찌 같겠습니까?”.

 
—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내물 마립간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듯 전진은 고구려의 전성기 기틀을 닦은 소수림왕에게 불교 전래 등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신라 본기에는 신라의 사신과 부견 사이의 대화가 남아있는데, 신라는 이후 전진과 국교를 수립했다.

참고문헌

정희철, 『삼국사기 주해: 고구려본기』, 명진, 2017
김유철, 『三國志 晉書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2009
증선지, 『십팔사략』, 미래사, 1995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지식산업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