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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견'''은 홍농 화음 (섬서성 화음) 출신으로, 유목 민족과 한족의 혼혈 가문에서 중국 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서위의 [[우문태]]와 마찬가지로 무천진 무장 출신이었다. 568년, 북주 왕조의 강력한 무장이었던 그는 서위 (西魏) 12대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 양충으로부터 수국공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수隨를 수隋로 고쳐 왕조의 명칭으로 삼았다.
 
'''양견'''은 홍농 화음 (섬서성 화음) 출신으로, 유목 민족과 한족의 혼혈 가문에서 중국 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서위의 [[우문태]]와 마찬가지로 무천진 무장 출신이었다. 568년, 북주 왕조의 강력한 무장이었던 그는 서위 (西魏) 12대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 양충으로부터 수국공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수隨를 수隋로 고쳐 왕조의 명칭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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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견'''이 북주의 무제武帝 를 따라 북제北齐를 복속시키고 화북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정 원년 (578년) 무제가 병사하고 선제宣帝가 즉위하였다. 선제는 행실이 포악하여 원로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정역郑译이라는 신하에게 국정을 맡겨 조정에 충격을 가져왔다. 대성 원년 (579년) 2월 19일, 선제 우문정은 7살밖에 되지 않은 장남 우문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연호를 대상大象으로 바꾸고 스스로 천원황제가 되었다.
 
'''양견'''이 북주의 무제武帝 를 따라 북제北齐를 복속시키고 화북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정 원년 (578년) 무제가 병사하고 선제宣帝가 즉위하였다. 선제는 행실이 포악하여 원로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정역郑译이라는 신하에게 국정을 맡겨 조정에 충격을 가져왔다. 대성 원년 (579년) 2월 19일, 선제 우문정은 7살밖에 되지 않은 장남 우문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연호를 대상大象으로 바꾸고 스스로 천원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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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3년 2월 14일, 재상이 수왕 '''양견'''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정제에게 강요하자, 정제는 다른 궁궐로 옮겼다. 마침내 '''양견'''은 수선受禅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이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찬탈하여 옥새를 받고 황포를 입게 된다. '''양견'''은 정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수나라를 세운다. 그의 독재에서 황제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불과 10개월, <수당서>에는 “나라를 얻기는 쉽지만, '''양견'''견만한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된다.
 
대상 3년 2월 14일, 재상이 수왕 '''양견'''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정제에게 강요하자, 정제는 다른 궁궐로 옮겼다. 마침내 '''양견'''은 수선受禅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이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찬탈하여 옥새를 받고 황포를 입게 된다. '''양견'''은 정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수나라를 세운다. 그의 독재에서 황제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불과 10개월, <수당서>에는 “나라를 얻기는 쉽지만, '''양견'''견만한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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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문제는 돌궐을 막아낸 후 603년에 고비 사막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을 복속시켰다. 이듬해 계민가한啓民可汗은 수나라 황제를 성인가한이라 칭했고, 남쪽으로 이주한 돌궐족은 수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수 문제는 돌궐을 막아낸 후 603년에 고비 사막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을 복속시켰다. 이듬해 계민가한啓民可汗은 수나라 황제를 성인가한이라 칭했고, 남쪽으로 이주한 돌궐족은 수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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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견'''이 반란을 진압한 후, 강릉의 한 구석에 위치한 서량은 약소했으며 오랜 기간동안 [[북조]]北朝에 의지해 온 탓에 천하 통일의 적수는 남쪽의 진나라陈 밖에 남지 않았다. 개황开皇7년 9월 19일 신묘일에 (587년 10월 26일) 서량의 마지막 군주 소종萧琮이 죽고 서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양견'''이 반란을 진압한 후, 강릉의 한 구석에 위치한 서량은 약소했으며 오랜 기간동안 [[북조]]北朝에 의지해 온 탓에 천하 통일의 적수는 남쪽의 진나라陈 밖에 남지 않았다. 개황开皇7년 9월 19일 신묘일에 (587년 10월 26일) 서량의 마지막 군주 소종萧琮이 죽고 서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개황9년 정월 20일 (589년 2월 10일)에 진나라 장군 임충은 한금호韩擒虎를 이끌고 [[건강]]建康을 공격하여 [[진숙보]] 陈叔宝를 붙잡아 진나라를 수복시켰다. 오래지 않아 각지의 진나라 군대는 [[진숙보]]의 명으로 투항하거나 끝까지 수나라 군에게 저항하다가 소멸되었다. 영남지역만이 [[선부인]]冼夫人에 의해 영토를 지키고 있었다. 개황10년 (590년) 8월, 수나라는 위광韦洸 등의 신하를 영남에 사신으로 보내 회유하였고, 선부인은 군중을 이끌고 수나라 사신들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영남의 여러 지역이 모두 수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천하통일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개황9년 정월 20일 (589년 2월 10일)에 진나라 장군 임충은 한금호韩擒虎를 이끌고 [[건강]]建康을 공격하여 [[진숙보]] 陈叔宝를 붙잡아 진나라를 수복시켰다. 오래지 않아 각지의 진나라 군대는 [[진숙보]]의 명으로 투항하거나 끝까지 수나라 군에게 저항하다가 소멸되었다. 영남지역만이 [[선부인]]冼夫人에 의해 영토를 지키고 있었다. 개황10년 (590년) 8월, 수나라는 위광韦洸 등의 신하를 영남에 사신으로 보내 회유하였고, 선부인은 군중을 이끌고 수나라 사신들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영남의 여러 지역이 모두 수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천하통일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2020년 6월 29일 (월) 21:58 기준 최신판

수 문제 (隋 文帝)

본명 양견 (杨坚)
국적 (隋)나라
시호 문제 (文帝)

개요

수의 문황제 양견(隋 文皇帝 楊堅, 재위 581~604년)은 수 왕조의 초대 황제로, 시호는 문제, 묘호는 고조이다. 위진남북조라는 대분열의 종지부를 찍고 진시황에 이어 두번째로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으며, 선정을 통해 개황의 치를 이룩한 명군이다.

생애

출생

양견은 홍농 화음 (섬서성 화음) 출신으로, 유목 민족과 한족의 혼혈 가문에서 중국 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서위의 우문태와 마찬가지로 무천진 무장 출신이었다. 568년, 북주 왕조의 강력한 무장이었던 그는 서위 (西魏) 12대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아버지 양충으로부터 수국공의 작위를 물려받았고, 수隨를 수隋로 고쳐 왕조의 명칭으로 삼았다.

정권쟁취

양견이 북주의 무제武帝 를 따라 북제北齐를 복속시키고 화북을 통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정 원년 (578년) 무제가 병사하고 선제宣帝가 즉위하였다. 선제는 행실이 포악하여 원로 대신들을 처형시키고, 정역郑译이라는 신하에게 국정을 맡겨 조정에 충격을 가져왔다. 대성 원년 (579년) 2월 19일, 선제 우문정은 7살밖에 되지 않은 장남 우문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연호를 대상大象으로 바꾸고 스스로 천원황제가 되었다.


대상 2년 2월 20일, 북주 정제静帝는 양견을 대승상에 임명했다. 3월 31일, 정제静帝는 수국공 양견의 아들 양용을 낙주 총관에 임명하여 옛 북제 땅을 총괄 관리하였다. 5월 11일 을미일, 북주 선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측근 유방刘昉과 정역郑译 등은 양견과 오랜 친분이 있을 뿐더러 그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섭정하도록 조서를 교부하였다. 기재된 바에 따르면 양견은 “사양하겠습니다. 저에게 과분한 자리입니다”라고 하며 만류했다고 한다. 그러나 유방이 그에게 “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라며 경고하자 양견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정역은 선제가 병사한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부고를 내지 않았다. 선제의 이름으로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양견을 외병마사에 임명함으로써 그는 군권과 대권을 모두 장악하게 되었다.


선제의 친동생 우문찬은 우대정승으로 봉해졌으나 실질적으로 권력은 없었다. 그의 나이가 스물 채 되지 않고 식견이 좁아 유방에게 현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양견은 군권을 장악한 후, 북주 각지의 왕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천금공주가 돌궐로 시집가는 것을 구실삼아 조왕 우문초와 진왕 우문순, 월왕 우문성, 대왕 우문달, 등왕 우문유를 수도로 불러들여 군권을 박탈한다.


양견과 측근들이 선제의 사망소식을 숨기고 왕명을 거짓으로 꾸민 사실은 사서상서 안지의颜之仪에게 가장 먼저 발각되어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유방은 안지의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각 제위들이 거짓 조서를 받은 상태에서 안지의를 대신해 조서에 서명하였고, 이로써 군권은 완벽히 양견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 양견은 안지의에게 황제의 상징인 옥새를 요구하지만 안지의는 이를 거절하고, 양견은 이에 크게 노해 그를 참수하려한다. 그러나 안지의가 민간에서 명성이 높은 것을 고려하여 그를 서쪽 변방의 군수로 좌천시킨다.


양견의 독재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상주의 총관 위지형尉迟迥이 병력을 모아 양견에 맞섰고, 관동의 여러 지역이 함께 했다. 익주 총관 왕겸 역시 병력을 일으켰다. 양견은 위효관, 왕의 등을 내세워 신속하게 반란을 평정한 뒤 북주의 모든 왕을 죽인다.
대상 2년 6월, 조왕 우문현은 양견을 암살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양견의 측근 탁발주 拓跋胄의 엄호로 실패로 돌아갔다. 12월 31일, 양견은 조왕이 자신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조왕과 월왕을 반란죄로 처형했다. 12월 우문태를 죽이고 두 아들 대왕 우문달과 등왕 우문유만이 남았다. 같은 해 우문태의 손자 기왕 우문현도 살해했다.
대상 2년 12월 2일, 북주의 정제 우문설은 순국공과 대승상 양견을 재상으로 임명하여 문무백관을 총괄하도록 명했다.
대상 3년 2월 14일, 재상이 수왕 양견에게 왕위를 양보하라고 정제에게 강요하자, 정제는 다른 궁궐로 옮겼다. 마침내 양견은 수선受禅 (임금의 자리를 물려받음)이라는 이름으로 왕위를 찬탈하여 옥새를 받고 황포를 입게 된다. 양견은 정제를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수나라를 세운다. 그의 독재에서 황제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불과 10개월, <수당서>에는 “나라를 얻기는 쉽지만, 양견견만한 이가 없었다”라고 기록된다.

돌궐을 막아내다

수 문제는 돌궐을 막아낸 후 603년에 고비 사막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을 복속시켰다. 이듬해 계민가한啓民可汗은 수나라 황제를 성인가한이라 칭했고, 남쪽으로 이주한 돌궐족은 수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전국을 통일하다

양견이 반란을 진압한 후, 강릉의 한 구석에 위치한 서량은 약소했으며 오랜 기간동안 북조北朝에 의지해 온 탓에 천하 통일의 적수는 남쪽의 진나라陈 밖에 남지 않았다. 개황开皇7년 9월 19일 신묘일에 (587년 10월 26일) 서량의 마지막 군주 소종萧琮이 죽고 서량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개황9년 정월 20일 (589년 2월 10일)에 진나라 장군 임충은 한금호韩擒虎를 이끌고 건강建康을 공격하여 진숙보 陈叔宝를 붙잡아 진나라를 수복시켰다. 오래지 않아 각지의 진나라 군대는 진숙보의 명으로 투항하거나 끝까지 수나라 군에게 저항하다가 소멸되었다. 영남지역만이 선부인冼夫人에 의해 영토를 지키고 있었다. 개황10년 (590년) 8월, 수나라는 위광韦洸 등의 신하를 영남에 사신으로 보내 회유하였고, 선부인은 군중을 이끌고 수나라 사신들을 맞이하였다. 이로써 영남의 여러 지역이 모두 수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천하통일의 위업이 달성되었다. 서진 영가의 난 이래 273년 동안 분단되어 있던 중원과 강남지역의 정권이 수 문제에 의해 다시 통일되었고 167년의 수당성세를 열었다.


황태자 책봉문제

당시 수나라에서는 장자상속제가 아닌 유능한 황자가 왕위를 잇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태자 책봉을 두고 경쟁을 하게 마련이었다. 황태자를 정하는 일은 황제의 막중한 권한이었으나 문제의 경우에는 부인 독고황후의 영향력이 더 강하게 작용했다. 문제에게는 다섯 황자인 용, 광, 준, 수, 양이 있었는데 장남이었던 황태자 양용은 여색에 빠져 독고황후의 신임을 잃게 되었다. 둘째 양광이 독고황후에게 아첨하여 자신이 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배후에서 조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양광은 또한 사생활을 삼가고 여성을 멀리함으로써 어머니의 신임을 얻으려하였다. 황태자의 폐립은 개황 20년(600)에 있었다. 이 해 6월 문제의 3남 양준이 병사하고, 10월 양용이 폐태자가 되고 11월에 양광이 황태자가 되었다. 새로운 황태자 양광은 32세였다. 그로부터 2년 후 독고황후는 세상을 떠났고 인수 4년(604)에는 문제가 세상을 떠났다.

문제의 최후

문제의 죽음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 중 황태자인 양제 양광이 암살했을 거라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604년 4월부터 문제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후궁이었던 선화공주를 양광이 범하려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크게 노해 폐태자가 된 양용을 다시 불러들여 다시 황태자로 앉히려 했다. 이를 전해들은 양광은 심복 장형과 모의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자객을 보내 양용까지 살해함으로써 무난히 제위에 오를 수가 있었다.

수 문제의 치적

정치개혁

양견은 이전까지의 악정에 대해 단호한 개혁조치를 취하는 등 정치에 정진함으로써 유능한 군주로서의 자질을 발휘했다.
개황률
정치적 측면의 공헌을 빼놓을 수 없다. 정역 郑译、苏威、颎과 같은 한인 명신들이 도와 국가 정책을 추진하였다. 양견 역시 전 왕조에 가혹한 형벌이 많아 민생에 지장을 주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소위 등의 신하들로 하여금 새로운 율령을 편찬하게 했으니, 이것이 훗날 당률의 기초가 되는 “개황률”이다. 또한 국가 형법을 개정해 백성들이 법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형벌은 축소함으로써 백성들에게 관대함을 보였다. 양견은 건국 이래 나라를 잘 다스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 또 어떤 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단호했다. 관리의 공무집행에 대해 바로 그러했다. 횡령과 법을 어기는 행위는 그의 사전에 존재할 수 없었다. 양견은 허베이의 52개 주를 순시할 것을 명했고, 장리(현의 관리들 가운데 상급 관리)의 뇌물수수 등 부정함을 조사하게 한 결과 파면당한 이가 200여 명에 달했다. 국고를 넉넉하게 하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것 뿐 아니라, 관리의 치세를 정비한 것 역시 수 문제 양견이 재위하던 시기의 융성함의 요인 중 하나였다.

부병제
군사적으로 수 문제가 부병제라는 군사제도의 개혁을 단행하기 이전, 병농은 분리되어 있었다. 부병제란, 평화로운 시기에는 농사를 짓고, 장군의 지휘 하에 일상 훈련을 병행하는 형태로, 전쟁이 일어나면 조정에서 별도로 장군을 파견하여 각 지역의 병력을 모아 출정시키는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이다. 583년, 주현 2급제를 실시함으로써 국가지방행정을 정상궤도에 안착시켰다. “지방행정기구 간소화는 개황지치의 성공에 있어서 기본적인 요인이었다. 수 문제 시기 조정의 지출은 3분의 2로, 지방 행정기구의 지출은 4분의 3으로 감소했으며, 행정경비의 전국적 지출은 남북조 시기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구품 중정제九品中正制를 폐지하고 과거제를 실시하다
수 문제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를 폐지하고 과거제도를 실시하였고, 관리 선발에 있어서 가문을 따지지 않았다. 각 주州별로 매년 3명씩 중앙으로 선발하여 수재 秀才, 명경 등의 과에 응시하게 하고 합격자를 관리로 등용하였다. 과거제도는 중소 지주 계층도 정치에 참여하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제도였으며, 그들이 중앙에 충성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인재 선발에 유리했기 때문에 정치적 효율을 높이고 중앙집권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후에 단계적으로 정비되어 과거제도의 효시가 되었다.

경제

균전제
수 문제는 천하를 통일한 이후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에 양견은 사마소위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금, 술 전매와 시장세를 폐지하고 여러 차례 세금을 감면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다. 또한 국가의 농업을 장려하고 경제 발전을 안정시켰다. 수 문제 재위기간의 부유함의 근원은 개황3년(583년)부터 전국에 걸쳐 추진했던 균전제라고 할 수 있다. 균전제는 세수를 증가시킬 뿐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 발전에 밑거름이 되었으며, 남조의 사대부가 점진적으로 쇠락하다가 소멸하는 결과를 이끌어낸다. 균전제는 순조롭게 추진되어, 수 왕조 초중반의 경제발전에 큰 수익을 가져왔다. 적은 세금으로 백성의 부담을 덜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한편 위진남북조 시기의 불분명한 호적으로 인해 안정적인 세수가 어려웠고, 이에 개황5년 (585년) 부병제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호구조사와 수적법(输籍法 ; 세금징수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파악되지 않았던 48만여명의 장정들을 찾아내고, 165만여명을 호적에 새로이 편입시킨 바, 위진남북조 이래 만연했던 호적의 폐단을 청산하고 세금 징수의 투명성을 높였다.


또한 생산의 발전을 중시함과 아울러 절약을 강조하였다. 먼저 문제 자신이 솔선하여 검소한 생활을 하고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건도 아껴 썼으며 황후의 복장도 사치를 금했다. 관리와 귀족들도 검약을 자랑으로 삼고 금과 옥으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 힘썼다. 문제는 관리의 비행사실에 대하여는 항시 엄벌주의를 택하여 때로는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받을 정도로 단호한 조처를 취했으나 민생 문제에 대해서는 특별한 배려를 했다. 이와 같은 문제의 선정이 20여 년간 계속되자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하여 서민의 생활도 풍족해져 태평성대의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창고가 꽉 차 더 이상 곡식과 피륙을 쌓을 곳이 없게 되자 문제는 각 군현에 조서를 내려 부를 백성에게 돌리도록 하고 조세를 면제하도록 하기도 했다.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번영함에 따라 인구도 급격히 증가했다. 수나라 초기 북조에는 약 360만 호, 남조에는 약 50여만 호로 모두 4백여만 호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로부터 20년 후에는 전국의 호수가 890여만 호, 인구가 4천 6백여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수 문제의 계보

부왕: 양충(楊忠)
모후: 여씨(呂氏)

국왕: 문제(고조, 견) 文帝(高祖, 堅)
왕비: 문헌독고황후(文獻獨孤皇后)
장녀: 양황후(여화) 楊皇后(麗華)
장남: 폐태자(용) 廢太子(勇)
차남: 양제(광) 煬帝(廣)
3남: 진왕(준) 秦王(俊)
4남: 촉왕(수) 蜀王(秀)
5남: 한왕(양) 漢王(諒)
차녀: 광평광주 廣平廣主


연호

개황(開皇, 581~600년)
인수(仁壽, 601~604년)


참고문헌

  • 김희영,『이야기중국사 2』(청아출판사, 2006)
  • 박덕규, 『중국역사이야기 8』(일송북, 2005)
  • 조관희,『조관희 교수의 중국사강의』(궁리,2011)
  • 폴 로프,『옥스퍼드 중국사 수업 (세계사의 맥락에서 중국을 공부하는 법)』(유유,2016)
  • 위키피디아 중국어판 "隋文帝"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