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姓" 문서와 "史" 문서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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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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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문]]의 姓은 여자의 모양을 형상화한 글자 여자 여()와 흙 위에 풀이 돋아난 형태의 날 생([[]])이 합쳐져 만들어진 [[회의자]]이다. 갑골문에서는 女자가 오른쪽에 있지만 [[소전|전서]]에서는 왼쪽으로 순서가 바뀌었다. 여자와 아이의 탄생을 붙여 성씨를 나타낸 것으로, 현대의 부계사회에서 아이가 아버지의 성을 따라 쓰는 것과는 다르다. 성씨의 기원은 여성의 집안으로 내려온 것으로, 모계사회에서부터 성씨가 시작된 고대의 문화를 엿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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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는 고문에서 [[事]]와 같다. [[갑골문]]은 찌르고 사냥하는 도구인 [[干]]을 손에 쥐고 있는 모양으로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干]]은 상단에 작살이 있는 나무 막대 모양으로 사냥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고대에는 사냥을 본업()으로 삼았기 때문에 손으로 [[干]]을 쥐는 행위가 일반적인 일(事)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事는 다시 [[]], [[]], [[使]]로 분화되었다. 그러므로 事, 史, 吏, 使는 분명 동일한 유래를 가진 글자이다.
  
 
==文化==
 
==文化==
현재와 같은 혼인제도가 생겨나기 전에는 새로 태어난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열 달을 임신한 모친이 누구인지는 알기 때문에, 태어난 아이는 모친이 아이가 크도록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다. 이처럼 한 집단의 중심은 아이의 출신을 알 수 있는 어머니였고, 여성을 중심으로 한 집단사회가 발달했지만 차차 부계사회로 권력양상이 넘어가게 된다. 모계혈통집단을 명기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성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ref>廖文豪, 『汉字树 3』, 吉西平, 2015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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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는 축문을 담는 용기, 곧 축고기를 나뭇가지에 매단 형태다. 『[[설문해자]]』의 해설에 따르면 이 글자는 ‘가운데를 집는다.’라는 뜻으로, 사관이 공정하게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해석은 중국인의 역사 개념을 보여주는 매우 이치에 맞는 해석으로 여겨지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살펴보면 글자의 형태가 분명히 다르다. 史의 형태는 곧고 올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中]]과는 다르다. '가운데'라는 관념은 글자의 형태로 내용을 표현하기 힘들다. 중앙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뜻하는 [[中]]의 형태는 동그라미를 관통한 모습으로, 깃발을 의미한다. [[갑골문]] 복사에는 中의 위아래에 깃발을 붙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史는 [[中]]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부분이 축고기 형태로 되어있다.<br />
姓이 먼저 출현하고 姓을 기초로 나중에 [[氏]]가 발생했다. 규모가 큰 씨족에 분화가 생겨 부계의 혈연관계에 따라 하위단계의 조직을 결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부락의 분화에 표식으로 삼기 위한 특수한 호칭이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氏가 발생하게된 연유다. 이로써 '氏'는 '姓'과 반대로 부계 혈연관계를 대표한다. <ref>장이칭 등, 김태성 역, 『한자로 이해하는 문화인류학』 , 여문책, 2020</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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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사(卜辭)에 보이는 史는 사제라고 부른 내제 즉 왕실 내부의 제사에 사용되었던 글자다. 史는 축사, 무사라고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예전에는 신관이었다. 그것이 기록관이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분류:한자어원문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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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는 원래 한정된 왕족만이 모여 지내는 왕실 내부의 제사였다. 무정시대에는 왕족 복사, 다자족 복사라고 불린 복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양식적인 면에서 일반적인 복사와는 달랐다. 즉, 史는 이들 왕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였다. 이 제사의 목적은 조상에게 비는 것이었기 때문에 복사에는 “고사를 해야하는가.”라고 점친 내용이 보인다. 즉, 告와 史는 서로 비슷한 제사였다. 글자 역시 告는 축고기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형태이며, 史는 축고기를 손으로 받들고 있는 형태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史는 축문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신에게 기도해 무언가를 꾀한다는 뜻이다.<ref> 시라카와 시즈카, 윤철규 역, 『한자의 기원』, 이다미디어, 2009, p.11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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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2021년 2월 9일 (화) 21:43 판

語源

역사사.JPG

史는 고문에서 와 같다. 갑골문은 찌르고 사냥하는 도구인 을 손에 쥐고 있는 모양으로 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은 상단에 작살이 있는 나무 막대 모양으로 사냥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고대에는 사냥을 본업(事)으로 삼았기 때문에 손으로 을 쥐는 행위가 일반적인 일(事)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事는 다시 , , 使로 분화되었다. 그러므로 事, 史, 吏, 使는 분명 동일한 유래를 가진 글자이다.

文化

史는 축문을 담는 용기, 곧 축고기를 나뭇가지에 매단 형태다. 『설문해자』의 해설에 따르면 이 글자는 ‘가운데를 집는다.’라는 뜻으로, 사관이 공정하게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해석은 중국인의 역사 개념을 보여주는 매우 이치에 맞는 해석으로 여겨지지만 갑골문과 금문을 살펴보면 글자의 형태가 분명히 다르다. 史의 형태는 곧고 올바르다는 의미를 지닌 과는 다르다. '가운데'라는 관념은 글자의 형태로 그 내용을 표현하기 힘들다. 중앙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뜻하는 의 형태는 동그라미를 관통한 모습으로, 깃발을 의미한다. 갑골문 복사에는 中의 위아래에 깃발을 붙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史는 의 가운데에 해당하는 부분이 축고기 형태로 되어있다.
복사(卜辭)에 보이는 史는 사제라고 부른 내제 즉 왕실 내부의 제사에 사용되었던 글자다. 史는 축사, 무사라고 불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예전에는 신관이었다. 그것이 기록관이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다. 史는 원래 한정된 왕족만이 모여 지내는 왕실 내부의 제사였다. 무정시대에는 왕족 복사, 다자족 복사라고 불린 복사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양식적인 면에서 일반적인 복사와는 달랐다. 즉, 史는 이들 왕족들이 자신들의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였다. 이 제사의 목적은 조상에게 비는 것이었기 때문에 복사에는 “고사를 해야하는가.”라고 점친 내용이 보인다. 즉, 告와 史는 서로 비슷한 제사였다. 글자 역시 告는 축고기를 나뭇가지에 걸어놓은 형태이며, 史는 축고기를 손으로 받들고 있는 형태를 형상화한 글자이다. 史는 축문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는 것처럼 신에게 기도해 무언가를 꾀한다는 뜻이다.[1]

주석

  1. 시라카와 시즈카, 윤철규 역, 『한자의 기원』, 이다미디어, 2009, p.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