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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1021-1086)은 자가 개보고 임천 사람이다. 그는 폭넓게 공부하여 유가 경전, 불경, 제자백가, 의서, 소설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재능을 드러냈다. 젊었을 때 은현(지금의 절강성 영파)의 지현(知縣)을 역임하던 중, 현지의 수리 공사를 단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수년간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재능을 단련시켰고 사회현실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후에 그는 인종에게 [[만언서]]를 상주하여 당시 사회, 정치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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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안석(王安石)'''(1021-1086)은 자가 개보고 임천 사람이다. 그는 폭넓게 공부하여 유가 경전, 불경, 제자백가, 의서, 소설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재능을 드러냈다. 젊었을 때 은현(지금의 절강성 영파)의 지현(知縣)을 역임하던 중, 현지의 수리 공사를 단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수년간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재능을 단련시켰고 사회현실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후에 그는 인종에게 [[만언서]]를 상주하여 당시 사회, 정치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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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9일 (월) 16:54 기준 최신판

왕안석

왕안석(王安石)(1021-1086)은 자가 개보고 임천 사람이다. 그는 폭넓게 공부하여 유가 경전, 불경, 제자백가, 의서, 소설 등 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치적 재능을 드러냈다. 젊었을 때 은현(지금의 절강성 영파)의 지현(知縣)을 역임하던 중, 현지의 수리 공사를 단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수년간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재능을 단련시켰고 사회현실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후에 그는 인종에게 만언서를 상주하여 당시 사회, 정치 문제를 분석하고 개혁을 주장하였다.

정치 개혁의 배경

신종이 당시 상황에 의해 부총리에 해당되는 참지정사로 왕안석을 임명했다. 젊은 신진으로 신종의 많은 기대가 따랐다. 송의 정치, 문화에 새바람을 불어넣은 남인이라 일컫는 그룹의 한 사람이었으며, 이미 인종 때 천자에게 상서를 올려 정치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한 만언서를 통해 천하의 명문이란 칭송을 받았다. 그 상서에서 왕안석은 현재 중국이 이민족의 모멸을 받고, 안으로는 재정 궁핍으로 인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올바른 법이 시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이와 연관지어 인사와 교육의 문제라고 판단했고 인간의 힘을 통해 재건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같이 중국의 불안정한 대내외적 상황에 대해 정치 개혁이 필요함을 주장하였고, 신종 또한 왕안석의 의견에 크게 찬성하여 정치 개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균수법

왕안석이 재정의 합리화를 위해 최초로 추진한 법이다. 당시까지 시간과 지역의 격차로 경제적 불균형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균수는 아직 교통이 발달하지 못하고 정보도 불충분한 시대에 같은 물자가 한 지방에는 남아돌고 다른 지방에서는 바닥나서 가격에 커다란 격차가 생기는 그러한 때 정부의 힘으로 물자를 남아도는 지방으로부터 부족한 지방으로 이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당시 조세는 금전화되지 않고 현물로 납부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왕안석은 이를 우선적으로 예산화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당시의 재무부에 해당되는 삼사의 규칙을 개정해 재정을 예산화하고 1년 동안 필요한 물자를 미리 계상하게 했다. 그리고 지방의 재무 관리에게 실정을 조사 보고하게 하고 물자를 조달하는 데는 되도록 가까운 곳에서 또한 되도록 값싼 곳에서 입수하는 원칙을 세웠다. 이는 당시 통일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물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정책인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청묘법

왕안석이 농민에 대한 저금리 융자를 위해 실시한 법이다. 농민들이 작물을 파종하고 생산 활동에 들어가려 할 때 농기구를 구입, 수리하고 수확기까지의 소금, 곡물을 비축해 두려는 경우에 가장 금전이 필요한데, 이를 대금업자에 빌리면 이율이 5~6할까지 달해서 농민들은 경제난에 시달리게 된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청묘법이라는 대안을 내놓게 되는데, 청묘법은 융자를 희망하는 농민은 10호 이상 모여서 보를 만들어 연대책임을 지고 저당 없이 관청에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변제의 경우 빌릴 때의 시가에 따라 정해진 액수의 곡물로 한다. 그러나 당시 군인이 많아 이들을 포함한 비생산인구가 많았던 점을 고려해볼 때, 조세가 고대처럼 곡물만을 주로 하는 것은 아니므로 조세만으로는 이를 부양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화적이라는 제도로 민간에서 강제적으로 곡물을 매입한 것인데, 정부의 재정이 군색해지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지 못하게 되어 이것이 인민을 괴롭히고 있었다. 청묘법은 이 화적의 역할을 대신 떠맡은 것이며, 곡물 구입의 대금을 선불하게 되는 셈이였다.

시역법

왕안석은 당시 수도를 비롯한 지방 대도시에 터를 잡고 경제를 지배하던 대상인들의 과점 체제를 바로잡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를 시역법이라고 한다. 수도에 시역무, 지방 대도시에 시역사를 두고 거기서 적체된 화물을 매상하고 또는 이를 저당으로 받고서 돈을 대부하는 것이다. 당시 자본주의 경향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대상인들의 과점 체제가 시장을 지배했다. 이와 같은 과점은 국가 경제와 소상공인에 많은 피해를 입히다 보니 왕안석은 이러한 관점에서 시역법을 펼쳤다.

모역법

시역법과 비슷한 시기에 모역법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농촌 부유 계급의 이익 보호를 위한 법이다. 농촌의 향호는 자산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분류되어 이 중 1등호부터 4등호까지 요역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조세의 관리, 관물을 중앙정부에 운송할 때의 감독과 관리의 연회를 주선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데, 그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왕안석은 이와 같은 합리적이지 않은 역법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예산 제도를 도입하여 요역 의무가 있는 4등의 향호로부터 자산 정도에 따라 면역전이란 명목으로 징수하였다. 이로써 기존에 농민을 착취하고 낭비하던 악습이 그치고, 정치 운영에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경비를 요역 의무자로부터 정규적인 조세 이외의 부가세로 징수하게 되었다.

보갑법

보갑법은 기존의 용병 제도를 고치고 고대의 병.농 합일 제도로 복귀시키려는 법이다. 기존의 용병 제도는 군인의 직업화이기 때문에 국가적으로 인원의 정리나 실업 문제를 우려하는 것이 컸다. 또한 봉급을 손에 넣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 향토를 지키려는 투지가 결여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왕안석은 농민에게 향토방위를 위한 자위단을 조직하도록 했다. 보갑법을 통해 농민이 해당 지역의 군인 역할을 하며 향토방위에 힘쓰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미야자키 이치사다, 《중국통사》, 서커스 ,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