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참고문헌)
(참고문헌)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2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28번째 줄: 28번째 줄:
 
항복한 장한과 사마흔, 동예는 각각 진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만들어진 삼진왕(三秦王) 중 옹왕(雍王)(雍王)에 봉해져 유방의 한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한나라의 명장 [[한신]]의 계책에 휘말려 폐구에 포위되었다. 기원전 204년 한나라 군대는 수공을 통해 폐구를 공격하였고, 패색이 짙어지자 장한은 결국 자결하여 생을 마쳤다.
 
항복한 장한과 사마흔, 동예는 각각 진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만들어진 삼진왕(三秦王) 중 옹왕(雍王)(雍王)에 봉해져 유방의 한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한나라의 명장 [[한신]]의 계책에 휘말려 폐구에 포위되었다. 기원전 204년 한나라 군대는 수공을 통해 폐구를 공격하였고, 패색이 짙어지자 장한은 결국 자결하여 생을 마쳤다.
 
== 참고문헌 ==
 
== 참고문헌 ==
[ https://zh.wikipedia.org/wiki/%E7%AB%A0%E9%82%AF 중국어 위키피디아 장한]
+
* [https://zh.wikipedia.org/wiki/%E7%AB%A0%E9%82%AF 중국어 위키피디아 장한]
<br><br>사기본기: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역사로, 사마천 원저/이인호 새로 씀, (주)사회평론, 2004
+
* 이인호, 『사기본기: 신화의 시대에서 인간의 역사로』, 사회평론, 2004

2020년 6월 29일 (월) 15:13 기준 최신판

장한

출생 B.C ?년
사망 B.C 205년

개요

장한(章邯)진나라 말기의 명장이다. 진승, 오광의 난을 진압하고 주장, 전황, 위책, 덩설, 우서, 전우, 이귀, 채하, 항량을 섬멸하는 등 반란군 진압에 큰 공을 세웠지만, 항우에게 패배하고 항복하였다. 그 후 항우에게 삼진 중 옹왕에 봉해져 한나라의 유방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자결하였다. ㅣ

생애

반란을 진압하다

진나라 말기 기원전 208년 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은 장군 진승을 필두로 하여 수십만 명의 병력을 모아 진나라에 대적하였다. 이에 장한은 여산(酈山)에서 노역을 하고 있는 죄수들을 사면 해주어 반란군과 싸우게 하자는 계책을 세웠고, 진 이세황제가 이를 수락하여 대장군에 임명된 장한은 진승의 군대를 완파하고 반란을 진압하였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지방에서 수많은 반란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고 기세가 오른 장한은 대대적인 반란군 토벌에 나서게 된다. 우선 반란을 틈타 재건된 위나라를 기습해 위-초-제 연합군을 격파하고 위나라를 무너뜨렸다. 위나라를 돕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온 제나라 군주 전담(田儋)도 이때 살해되었고, 군사를 이끌어 제나라를 포위하였다.

항량을 살해하다

(楚)나라 명장 항연의 아들 항량은 반란이 일어나자 세력을 규합하여 초나라를 부활시켰으며, 자신의 조카 항우와 패공 유방을 이끌고 제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격하였다. 장한은 항우의 패기에 밀려 패배하게 되고, 이후 계속된 전투에서 번번히 패배를 거듭하였다. 승리를 거듭한 황량은 교만해졌고, 전쟁에서 크게 활약한 항우와 유방의 군대를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보내는 큰 실책을 저질렀다. 장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항량에게 기습을 가했고, 항량은 장한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항량의 패전 이후 반란군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반란군 제후들은 진 제국의 위세에 주눅이 들어 앞에 나서는 자가 없었다.

항우와의 결투

한편 항량의 패전 이후 위축되어 있던 반란군 세력은 항우가 초나라의 군권을 장악하면서 전세를 뒤집기 시작하였다. 당시 장한은 내부의 배반으로 인해 무너지고 있던 조나라를 공격하였고, 조왕 조헐과 승상 장이는 거록성으로 도주하여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있었다. 이에 초나라는 송의를 상장군으로, 항우를 차장군으로 삼아 거록성으로 보내었다. 하지만 송의는 장한을 두려워하여 진나라의 군대와 대치만 하면서 싸움을 피하였다.
장한과 송의의 대치가 길어지자 군량이 부족해진 초나라 군사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져만 갔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송의가 자신의 아들을 승상으로 내려보내며 성대한 잔치를 열자 분노한 항우가 대장군의 막사로 들어가 송의를 살해하였다.항우는 평소에 송의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던 초군의 지지를 얻고 초왕으로부터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대장군이 된 항우는 경포를 선봉으로 삼은 후 배수진을 치고 군량을 사흘 분량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버렸다.
사생결단의 처지에 놓인 항우의 초나라 군대는 엄청난 기개를 보여주며 진나라 군대를 완파하였다. 비록 장한이 거록성에서 항우에게 완패하였다 해도 장한에게는 20만의 군사가 남아있었고, 장한은 항우와 7개월 가까이 함양 입성을 두고 완강하게 대치하였다. 항우의 맹렬한 공세에 장한은 조금씩 밀리기 시작하였고, 장한은 진 제국 조정에 지원병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환관 조고는 조정을 농단하며 장한에게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장한의 지원 요청을 무시하였고, 오히려 지원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조정에 찾아온 장수 사마흔을 살해하려 하였다. 결국 이러한 진 제국의 태도에 실망한 장한은 항우에게 투항하였다. 항우는 장한의 능력을 인정하여 장한과 사마흔, 동예와 같은 장군들의 항복은 받아주었지만,초군은 그 수가 20만에 이르는 진 항복군을 수용할 처지가 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진나라 병사들은 여전히 그 수가 많은 데다,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고 있소. 이들이 관중에 이르러서도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일이 분명 위태롭게 될 것이므로 ,차라리 그들을 쳐 죽이고서, 단지 장한(章邯)•장사 사마흔(司馬欣)•도위(都尉) 동예(董翳)만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겠소.”

항우는 결국 기원전 207년 11월 밤에 진나라 군대를 습격하여 20만여 명을 생매장시켰다.[1]

최후

항복한 장한과 사마흔, 동예는 각각 진의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만들어진 삼진왕(三秦王) 중 옹왕(雍王)(雍王)에 봉해져 유방의 한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게 된다. 하지만 한나라의 명장 한신의 계책에 휘말려 폐구에 포위되었다. 기원전 204년 한나라 군대는 수공을 통해 폐구를 공격하였고, 패색이 짙어지자 장한은 결국 자결하여 생을 마쳤다.

참고문헌

  • 그래서 초군은 야밤에 진나라의 (항복한) 병졸들을 습격하여 20여 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신안성(新安城) 남쪽에 묻어 버렸다.─ 사기 항우 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