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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語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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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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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과 “伯”은 갑골문과 일부 금문 중에서 같은 글자이다. 그중 “白”자는 학자가 “日”에 처음 뾰족한 머리가 난 것이라고 여겼고, 다른 말로 엄지 형태를 말하며, 엄지손가락이 열 손가락의 머리이기 때문에 “伯”인 것이다. 어원에는“물방울설(水珠说)”도 있다. 소전에서 “白”과 “伯”을 분절했고 《설문해자》에서는 “伯는 장수하는 사람을 의미하며 白의 발음을 따른다”, “白은 서양인의 색을 의미한다”고 기록햇다. 예서는 직필로 두 글자를 꺾어 현재의 문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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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궤는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청동기로써, 국가 차원에서 출국을 금지한 64점의 귀중한 문물 중 하나다. 높이는 28센치미터이며 구경은 22센치미터이다. 윗부분은 원형에 큰 입구에 통통한 배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양쪽에는 짐승의 귀와 그 귀에 귀고리가 두 개 달려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아랫부분은 네모난 받침대가 있어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주 청동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기물이다.  
  
'白'은 서방(西方)의 색이다. 음이 작용할 때에는 사물의 색이 희다. '入(입)'이 '二(이)'와 합해진 모양으로 구성되었다. 二는 음수다. 白부에 속하는 한자는 모두 白의 의미를 따른다. (1) 나가는 것은 '양(陽)'이고 들어오는 것은 '음(陰)'이다. 그래서 '白'이 '入'으로 구성되었다. (2) '二'로 구성된 의미를 해설하였다. '白'의 발음은 旁(방)과 陌(백)의 반절이다. 고음 5부에 속한다. <ref>염정삼, 설문해자주 부수자 역해, 서울대학교출판부</ref>
 
  
白에 대한 허신의 해설은 본래의 형체도 잃었고 의미도 잃었다. 고문자에서 白은 사람의 머리를 그렸으며, "사람의 머리"가 본래 의미이다. 白은 우두머리(伯長)라고 할때의 伯으로 파생되었는데, 옛날에는 白과 伯이 같은 글자였다. '흑백(黑白)'이라고 할때의 白은 순전히 독음에 의한 가차 의미로, 본래 의미는 아니다.<ref>요효수, 허신과 설문해자, 도서출판3, 221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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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簋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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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簋는 상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유행한 청동기 중 하나다. 주로 음식을 담는 데 사용되었으며, 벼와 수수 등을 삶아 익혀서 담았던 옛날 그릇이다. 상주商周시대에는 궤簋는 음식을 담는 그릇의 용도 이외에 중요한 예기로서 향응과 제사를 지낼 때 짝수로 배열되어 鼎정과 함께 사용되었다.
  
==文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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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白은 햇빛, 즉 '일광(日光)'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예기》에 "당실지백"의 白이 바로 햇빛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의 "인생은 천지간에 마치 백구(白駒)가 틈을 지나는 것 같다"에서 "백구"는 바로 흰 망아지가 아니라 잠깐 동안의 해의 그림자를 말한다. 또 고대인들은 하늘의 무지개를 '채홍(彩虹)'이라 하지 않고 '백홍(白虹)' 이라 한 것은 "햇빛으로 된 띠"라는 의미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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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3월 상순에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県의 영구공사서단대대零口公社西段大隊가 경작하던 중 동기 여러 점을 발견하였다. 보고를 받은 임동현의 문화관 관원이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출토 지점이 2만 여 제곱미터에 걸친 주나라 유적의 한 구획이었으며, 이미 출토된 뒤여서 발굴된 당시 상황은 분명하지 않지만 절벽 위에 동기가 매장되어 있던 깊이 2미터, 너비 70센치미터 크기의 움막이 있었다. 출토된 동기는 60여 점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모 반듯한 대좌台座 위에 녹청으로 뒤덮인 궤로 불리는 제기 하나가 있었다, 그릇 안쪽 바닥에는 4행 32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었으며, 이후 명문의 보이는 그릇을 제작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 동기는 이궤로 불린 것이다.
  
날이 밝게 새는 것을 '백(白)'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대 시인 이하(李賀)의 《치주행(致酒行)》에 "수탉 한 번 울음에 천하가 밝았다(雄鷄一聲天下白)"라고 하였다.
 
  
白을 의부로 하는 한자가 흰색을 가리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어떤 문자학자는 "문자는 만든 사람이 햇빛으로 백색을 나타낸 것은 광학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햇빛으로 백색을 나타낸 것은 광학 원리에 온전히 부합한다. 고대인들은 현대 과학지식을 지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白을 의부로 삼은 글자들이 '희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고대문자의 묘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다. <ref>조선탁, 중국어 한자의 어원, 지식과 교양</ref>
 
  
[[분류:한자어원문화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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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궤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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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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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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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利簋_명문.jpg|280픽셀|오른쪽|利簋銘文4행 32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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珷征商, 隹甲子朝, 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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鼎, 克䎽, 夙又商. 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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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在闌師錫又事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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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 用作檀公寶尊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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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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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무왕武王께서 상商나라를 정벌하였을 때는 갑자일 아침 목성이 나타날 때 쯤이였다.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신속하게 상商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신미일에 무왕武王께서는 ‘간’ 땅에 머무시면서 왕을 모시고 참전했던 ‘이利’에게 청동을 상으로 하사하셨다. 이를 기념하여 ‘이利’는 ‘단공檀公’의 제사에 사용할 진귀한 제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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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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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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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다 데스유키,『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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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光直,『중국 청동기 시대 上』, 학고방, 2013.

2020년 12월 22일 (화) 21:15 판

개요

利簋.jpg

이궤는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청동기로써, 국가 차원에서 출국을 금지한 64점의 귀중한 문물 중 하나다. 높이는 28센치미터이며 구경은 22센치미터이다. 윗부분은 원형에 큰 입구에 통통한 배 모양을 지니고 있으며, 양쪽에는 짐승의 귀와 그 귀에 귀고리가 두 개 달려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아랫부분은 네모난 받침대가 있어 듬직하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현존하는 서주 청동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기물이다.


궤簋란?

궤簋는 상나라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 유행한 청동기 중 하나다. 주로 음식을 담는 데 사용되었으며, 벼와 수수 등을 삶아 익혀서 담았던 옛날 그릇이다. 상주商周시대에는 궤簋는 음식을 담는 그릇의 용도 이외에 중요한 예기로서 향응과 제사를 지낼 때 짝수로 배열되어 鼎정과 함께 사용되었다.

출토

1976년 3월 상순에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県의 영구공사서단대대零口公社西段大隊가 경작하던 중 동기 여러 점을 발견하였다. 보고를 받은 임동현의 문화관 관원이 현장에 도착해서 보니 출토 지점이 2만 여 제곱미터에 걸친 주나라 유적의 한 구획이었으며, 이미 출토된 뒤여서 발굴된 당시 상황은 분명하지 않지만 절벽 위에 동기가 매장되어 있던 깊이 2미터, 너비 70센치미터 크기의 움막이 있었다. 출토된 동기는 60여 점이었는데, 그 가운데 네모 반듯한 대좌台座 위에 녹청으로 뒤덮인 궤로 불리는 제기 하나가 있었다, 그릇 안쪽 바닥에는 4행 32자의 명문이 주조되어 있었으며, 이후 명문의 보이는 그릇을 제작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이 동기는 이궤로 불린 것이다.


이궤의 특징

명문

원문

利簋銘文4행 32자

珷征商, 隹甲子朝, 歲

鼎, 克䎽, 夙又商. 辛未

王在闌師錫又事利

金. 用作檀公寶尊彝.


해석

주 무왕武王께서 상商나라를 정벌하였을 때는 갑자일 아침 목성이 나타날 때 쯤이였다. 승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며, 신속하게 상商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신미일에 무왕武王께서는 ‘간’ 땅에 머무시면서 왕을 모시고 참전했던 ‘이利’에게 청동을 상으로 하사하셨다. 이를 기념하여 ‘이利’는 ‘단공檀公’의 제사에 사용할 진귀한 제기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1. 후쿠다 데스유키,『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2. 張光直,『중국 청동기 시대 上』, 학고방,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