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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윤(趙匡胤)'''은 [[당]] [[명종]] 천성2년 2월 16일(927년 3월 21일) 낙양 협마영에 태어났다. 조광윤은 [[조홍은]]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두씨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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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0년 [[송]](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 군사들의 추대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비록 선양의 형식을 취했다 하나, 그 내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말이 있다.  
 
960년 [[송]](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 군사들의 추대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비록 선양의 형식을 취했다 하나, 그 내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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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대 사람들은 이 모두가 조광윤 일파가 꾸며 낸 한 편의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광윤이 곧바로 군사를 돌려 볜징으로 향한 것으로부터 요와 북한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애당초 사실이 아니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ref>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1판; 청아출판사, 2018, pp. 244-246.</ref>
 
후대 사람들은 이 모두가 조광윤 일파가 꾸며 낸 한 편의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광윤이 곧바로 군사를 돌려 볜징으로 향한 것으로부터 요와 북한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애당초 사실이 아니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ref>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1판; 청아출판사, 2018, pp. 244-246.</ref>
  
== 조광윤의 정치적 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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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활동 ==
 
=== 황제 지배체제 강화 ===
 
=== 황제 지배체제 강화 ===
 
태조 조광윤은 개국 공신이자 모신인 [[자오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오대의 쟁란 원인으로, 번진 세력이 너무 강대함을 지적하며, 번진의 권력을 빼앗고 재정 처분권을 제한하며 정예 병사를 중앙에 불러 들여 천하를 안정시키라는 진언을 했다. 이를 받아들인 태조가 취한 조치가 오대를 이어 오는 동안 변란의 중심에 있던 금군을 손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송 태조 자신이 금군의 수장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 아마도 금군 출신이었기에 금군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금군이 나중에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었으리라.  
 
태조 조광윤은 개국 공신이자 모신인 [[자오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오대의 쟁란 원인으로, 번진 세력이 너무 강대함을 지적하며, 번진의 권력을 빼앗고 재정 처분권을 제한하며 정예 병사를 중앙에 불러 들여 천하를 안정시키라는 진언을 했다. 이를 받아들인 태조가 취한 조치가 오대를 이어 오는 동안 변란의 중심에 있던 금군을 손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송 태조 자신이 금군의 수장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 아마도 금군 출신이었기에 금군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금군이 나중에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었으리라.  

2020년 6월 29일 (월) 17:02 기준 최신판

조광윤

출생 927년
사망 976년

생애

조광윤(趙匡胤) 명종 천성2년 2월 16일(927년 3월 21일) 낙양 협마영에 태어났다. 조광윤은 조홍은의 차남이고, 어머니는 두씨이다.

960년 (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 군사들의 추대로 황제 자리에 오른다. 송의 태조 조광윤이 황제 자리에 오른 것은 비록 선양의 형식을 취했다 하나, 그 내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말이 있다.

그의 조상은 대대로 탁주에서 살았는데, 아버지인 조홍은 대에 낙양으로 이주했다. 조홍은은 후진과 후한, 후주 삼대에 걸쳐 금군의 장령을 지냈다. 조광윤은 아비를 따라 군인의 길을 걸었는데, 후한의 대장 궈웨이의 휘하에 있다가 그의 눈에 들었다. 나중에 궈웨이가 정변을 일으켜 후주를 세우자 전장금군에 중용되었다가 궈웨이의 뒤를 이은 세종 차이룽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워 전전도점검으로 승진하여 후주의 병권을 장악했다. 여기서 송주 귀덕군절도사를 겸임하여 수도 볜징의 방위를 책임졌으니, 천하의 군권이 그의 손에 들어간 셈이다. 세종이 요를 정벌하러 가는 길에 병사하자, 그의 아들 시종훈이 7세의 어린 나이로 황위를 계승했다.

960년 정월에 진주와 정주에서 북한과 요나라의 연합군이 남하하여 후주를 침공한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 첩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고 후주의 부 태후와 재상 범질, 왕부 등은 황급히 조광윤에게 대군을 거느리고 북상해 적을 방어케 했다. 조광윤의 부대는 진교역에 이르러 숙영하였다. 다음 날 새벽 진교역에서 갑자기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전날 마신 술에서 막 깨어난 조광윤은 밖으로 나와보니 그의 동생인 조광의와 모신인 조보를 필두로 한 장수들이 한 손에 무기를 들고 대오를 지어 뜰 앞에 서서 “저희에겐 주인이 없으니 점검께서 천자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일제히 소리쳤다.
이에 조광윤이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장수들은 미리 준비해 둔 황제의 옷인 황포를 그에게 입힌 후 일제히 절을 올리고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조광윤은 사람들에게 “그대들이 자신의 부귀를 위하여 나를 천자로 세운 것이나,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결코 군주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사람들이 재차 권하자 “후주의 태후와 어린 황제 그리고 고관들에게 절대 위해를 가하지 말 것이며, 조정이나 시장의 창고 등을 약탈하면 엄벌에 처한다.”라는 약속을 받아 내고서야 제위에 올랐다 한다.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후주의 대신 한통이 급히 군대를 조직해 대항할 준비를 하던 중 조광윤의 부하에게 피살되고, 재상인 범질과 왕부는 협박에 못 이겨 굴복하였다. 정월 5일 오후에 조광윤은 어린 황제를 폐위하고 황제에 올라 국호를 송이라 하고, 연호를 건륭이라 하였으며, 볜징을 도읍으로 삼았다

후대 사람들은 이 모두가 조광윤 일파가 꾸며 낸 한 편의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광윤이 곧바로 군사를 돌려 볜징으로 향한 것으로부터 요와 북한의 연합군이 쳐들어온다는 첩보가 애당초 사실이 아니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1]

정치적 활동

황제 지배체제 강화

태조 조광윤은 개국 공신이자 모신인 자오푸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는 오대의 쟁란 원인으로, 번진 세력이 너무 강대함을 지적하며, 번진의 권력을 빼앗고 재정 처분권을 제한하며 정예 병사를 중앙에 불러 들여 천하를 안정시키라는 진언을 했다. 이를 받아들인 태조가 취한 조치가 오대를 이어 오는 동안 변란의 중심에 있던 금군을 손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송 태조 자신이 금군의 수장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측면이 있다. 아마도 금군 출신이었기에 금군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아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금군이 나중에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간파했기 때문이었으리라.

조광윤은 금군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연회를 열고 금위군의 장수인 석수신 등을 불렀다. 한창 주흥이 무르익을 때 송 태조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오. 그러나 황제 자리도 그리 즐거운 것이 아님을 알았소. 밤에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으니 말이오." 이에 석수신 등이 "폐하께서 이제 귀하신 천자가 되셨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고 되묻자, 태조는 "그대들 가운데 황제가 되고 싶지 않은 이가 누가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이 말 뜻을 알아들은 이들은 "폐하, 무슨 말씀이시온지요? 폐하의 지위는 하늘이 정하신 것인데 누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태조는 다시 "알겠소. 여기에 있는 경들이야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만약 어느 날 아침 부하들이 그대들에게 황포를 입힌다면 그대들은 어찌하겠소? 고개를 가로저을 까닭이 없지 않겠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석수신 등은 태조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리석은 신들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신 등이 어찌해야 할지 하교를 내려 주소서." 이에 태조는 말했다. "사람의 일생이란 짧은 것이오. 그저 편안하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면 그뿐인 게지요. 경들은 군사에게 손을 떼고 토지와 집을 마련해 매일 노래와 춤으로 평생을 즐겁게 보내는 게 좋을 것이오." 다음 날 석수신을 비롯한 장군들은 모두 중병이 들었다는 핑계로 자진 사퇴하고 군대의 통수권을 태조에게 넘겼다.

이 밖에도 오대를 거쳐 오며 임명되었던 지방의 절도사와 관리들을 점차 송조의 문관들로 바꾸고, 사정상 급하게 교체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문관인 통판이라는 감독관을 파견해 견제하였다. 아울러 독자적으로 운용되던 재정권을 중앙에 환원시키기 위해 문관인 전운사를 두었다. 이로써 무관의 군사권과 문관의 정치, 재정권이 분리되어 당 말 이후 번진 세력에게 집중되었던 지방 권력을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집행 기관이었던 상서성과 중서성, 문하성이라는 3성을 폐지하고 군사 통수권은 추밀원에서 맡고, 재정권은 호부사와 염철사, 탁지사 3사로 나누어 위임하였다. 무엇보다 천자의 실책을 지적하고 바로잡게 하는 간관을 간원이라는 독립 기구로 분리하니, 이제까지 황제 다음가는 위치에서 존중받았던 재상의 지위가 격하되어 황제의 독재권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렇듯 당 말 이후 군벌 세력의 발호를 지켜보았던 송 왕조는 무관 대신 문관을 우대하고 번진의 권력을 빼앗아 중앙에 힘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이로 인해 송 왕조는 변방에 외적이 침입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할 수 없었고, 군사 통솔권이 추밀원에 귀속되어 있어 재상은 군사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2]

과거제도에서 전시제 도입

송대에는 전시(殿試)제도를 통해 황제가 과거합격자를 최종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한 점이 특징이다. 전시제는 과거 합격자와 시험관 사이에 사적인 관계가 형성되어 붕당이 생기는 것을 막고 황제를 향한 충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천자는 과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관리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고, 과거의 합격이 천자에 의해 결정되므로 합격자는 황제의 충실한 문생(門生)으로서 천자의 질문에 대한 대책(對策), 곧 상표문의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송대에는 시험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하기 우해 답안지에 수험자의 이름과 연령 등을 풀칠하여 봉하는 봉미법과, 답안 내용을 일괄적으로 옮겨 적어 필체의 차이를 없앤 다음 채점하는 등록법이 실시되었다. 이로써 과거 합격에 응시자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으며, 과거에 의한 계층 이동의 가능성이 확대되었다. 북송대 구법당 관료인 진양(陳襄)은 「선거권학문」에서 다음과 같이 과거의 개방성을 찬미하였다.[3]

지금 천자께서 3년에 한 번 선비를 뽑으시니 저 산야의 빈천한 집이라 할지라도 자제 중에 문학의 재질이 있으면 반드시 과명(科名)을 천자로부터 사여 받아 부귀를 누리고 가문은 영광되고 요역이 없고 자손 또한 그 음(蔭)으로 대업에 보임된다(『적성집(赤城集)』 권18)

문치주의

송 태조 문치주의가 진행됨에 따라, 국방이 약화되어 이민족(거란, 여진족)의 침입을 많이 받게 된다. 이민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막대한 세폐를 지불하게 된다. 또한 관료의 비대한 증가로 국가의 재정이 악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망

송 태조 조광윤은 재위 17년이 되는 해인 서기 976년 10월에 50세의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 데다 평소 건강했기에 태조의 죽음은 당시에도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정자에서는 단순히 객관적인 사실만 담담하게 전하고 있지만, 야사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했다.

전하는 말로는 어느 눈 오는 날 밤에 태조가 아우인 조광의를 불러 내관들을 물리고 침궁에서 같이 술을 마셨는데, 한참 있다 침궁 안에서 촛불에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이다가 도끼가 바닥에 찍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다. 그리고 조광의가 사람들을 불러 들어가 보니 태조가 이미 죽어 있었다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몇 가지 추론을 했다. 우선 조광의가 같이 술을 마시다 태조가 설핏 잠들자 후궁을 희롱했는데 태조가 깨어나 그 상황을 보고 크게 노하여 조광의에게 도끼를 집어 던져 바닥에 찍혔다는 설도 있고, 조광의가 태조를 죽이려 도끼를 휘두른 것이라는 설도 있다.

태조가 죽자 동생인 조광의가 형의 뒤를 이어 황제 자리에 올라 태종이 되었다. 이것 역시 후대 사람의 의혹을 사기에 충분한 것으로, 태조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도 동생인 조광의가 황제가 된 것은 누가 봐도 의심을 살 만 했다. 혹자는 그들 형제의 모친인 두 태후가 평소에 후주가 천하를 잃은 것은 나이가 어린 황제를 세웠기 때문이라 생각해 태조에게 형제간에 나이 순으로 황제 자리를 물려주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태조가 생전에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태조가 죽은 뒤 뒤늦게 달려온 황후가 시동생인 조광의가 이미 궁궐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자, 조광의는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한다.

이런 여러 가지 설들은 그야말로 전설에 불과하고,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기 어렵다. 공교로운 것은 어머니의 부탁대로라면 조광의에게 자신이 죽은 뒤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될 광미라는 아우가 있었는데, 천하 통일을 완수한 조광의가 곧바로 죄를 뒤집어씌워 동생인 광미를 죽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태조의 둘째 아들이 덕방도 죽인다. 숙부와 동생이 죽은 것을 보고 어쩌면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태조의 첫째 아들 덕소는 지레 자살하고 만다. 그러고 보면, 진교에서의 한바탕 소동을 연출한 것도 동생인 조광의였다. 이런 일련의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애당초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것은 송 태조 조광윤이 아니라 동생인 조광의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날 밤의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태조와 태종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태조 조광윤이 황제가 된 뒤 그 자식들은 오히려 죽음으로 내몰리고, 후손들은 권좌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그러나 훗날 휘종흠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북송이 망하고 휘종의 아들 중 하나인 강왕 조구가 고종으로 즉위한 뒤 그의 아들이 죽자, 신하들은 더 이상 태종의 자손 중에서 황제를 내는 것을 거부하고 태조의 후손 중에서 양자를 선택해 제위를 물려주도록 강요한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태조의 후손 가운데서 양자를 들여 황태자로 삼으니, 이 사람이 남송 시기 현군으로 이름 높았던 효종이다. 이후로는 태조의 후손이 남송이 망할 때까지 황제 자리를 지켰다. 세상사는 돌고 도는 것일까?[4]

그에 대한 평가

자신도 절도사 출신이기에 자신을 전복시킬 세력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래서 절도사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전시제를 도입하여 공정한 과거제 실시를 도모한다. 이러한 상황은 ‘문치주의’로 흘러가게 되고, 송나라의 군사력이 많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로 인한 이민족의 침략에 대한 방어 실패, 관료의 비대한 증가는 결국 송나라 재정의 위기를 불러 오고, 이후 왕안석의 신법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 했으나 기득권의 반발로 이는 실패로 돌아간다. 이 상황의 시작이 너무 극단적인 조광윤의 개혁이 불러온 일련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가 급진적으로 절도사의 권한을 약화시키지 않고, 이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유지하고 관리하며, 동시에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여 문무가 조화되는 중용의 미를 발휘했으면 이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1.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1판; 청아출판사, 2018, pp. 244-246.
  2.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1판; 청아출판사, 2018, pp. 247-249.
  3. 동북아역사넷.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levelId=edeah.d_0003_0030_0020_0010
  4.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1판; 청아출판사, 2018, pp. 250-2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