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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희(趙姬)는 초(趙)나라 한단출신이고 [[진시황]](秦始皇)의 생모로 최초의 황태후다. 진(秦)나라의 왕족 자초(후의 [[장양왕]])에게 시집을 갔지만 [[여불위]](呂不韋)나 [[노애]](嫪毐)와 육체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서 현대에서는 중국 왕조의 악녀의 한 사람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나 [[서태후]](西太后) 등과 함께 악녀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에 대한 해석과 기록==
 
조희라는 이름은 조나라에서 매춘부 혹은 춤을 잘 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서는 ‘ 呂不韋姬’나 ‘太后’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여불위연전>에서는 ‘邯鄲諸姬’나 ‘姬’,’ 子楚夫人’,’太后’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어느 쪽에도 趙姬라는 이름으로는 적혀 있지 않는다. 즉 趙姬라고 표기된 이름은 후세의 사칭이다.
 
 
여기에서 ‘趙’라는 한자는 조희 본인이 조나라 출신이구나 趙씨라고 한다하는 의미가 아니라 시집을 간 진나라 子楚([[장양왕]])의 성이 趙씨인 데서 유래된다.
 
‘姬’라는 한자도 현대에서 많이 쓰이는 공주라 뜻이 아니라 ‘첩’이나 ‘귀부인’,’귀인의 딸로 미혼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귀부인이라면 뜻으로 쓰인다.
 
 
현대에서는 저희라고 불리는 사람이 따로 두 명 존재하고 한명은 전한(前漢)시대 高祖[[유방]](劉邦)의 비빈(제2.3의 부인)이며 또 한명은 삼국시대 오(呉)나라 우의(虞韙)의 여관의 별명이다.
 
 
 
 
{{인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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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조희(赵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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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조희(赵姬)
 
| 출생  =  B.C.280 조(赵)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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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B.C.229 진(秦)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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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칭  =  제태후(帝太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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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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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趙姬)'''는 조(趙)나라 한단출신이고 [[진시황]](秦始皇)의 생모로 최초의 황태후다. [[진]](秦)나라의 왕족 자초(후의 [[장양왕]])에게 시집을 갔지만 [[여불위]](呂不韋)나 [[노애]](嫪毐)와 육체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서 현대에서는 중국 왕조의 악녀의 한 사람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나 [[서태후]](西太后) 등과 함께 악녀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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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한 해석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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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라는 이름은 조나라에서 매춘부 혹은 춤을 잘 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서는 ‘ 呂不韋姬’나 ‘太后’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여불위열전>에서는 ‘邯鄲諸姬’나 ‘姬’,’ 子楚夫人’,’太后’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어느 쪽에도 趙姬라는 이름으로는 적혀 있지 않는다. 즉 趙姬라고 표기된 이름은 후세의 사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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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趙’라는 한자는 조희 본인이 조나라 출신이기에 趙씨라고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집을 간 진나라 子楚([[장양왕]])의 성이 趙씨인 데서 유래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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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姬]]’라는 한자도 현대에서 많이 쓰이는 공주라 뜻이 아니라 ‘첩’이나 ‘귀부인’,’귀인의 딸로 미혼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귀부인이라면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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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는 저희라고 불리는 사람이 따로 두 명 존재하고 한명은 전한(前漢)시대 高祖[[유방]](劉邦)의 비빈(제2.3의 부인)이며 또 한명은 삼국시대 오(呉)나라 우의(虞韙)의 여관의 별명이다.
  
 
==생애==
 
==생애==
 
===여불위와 자초와의 만남===
 
===여불위와 자초와의 만남===
조나라 [[한단]](邯鄲)의 부호의 딸로 태어나 무희(춤을 추는 사람)를 하고 있던 조희는 상인인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띄었다. 여불위가 마음에 들어 조희는 그의 첩으로 되었다. 하지만 진나라 왕족이자 인질로 초나라에 내밀려 여불위의 도움을 받고 있던 자초가 여불위를 서미는 조희를 보고 마음에 들으며 갖고 싶다고 바랬다. 여불위는 자초의 요구를 거부하지는 않고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된다고 조희를 자초에게 보내 조희는 자초와 결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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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 [[한단]](邯鄲)의 부호의 딸로 태어나 무희(춤을 추는 사람)를 하고 있던 조희는 상인인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띄었다. 여불위가 마음에 들어 조희는 그의 첩으로 되었다. 하지만 진나라 왕족이자 인질로 초나라에 내밀려 여불위의 도움을 받고 있던 자초가 조희를 보고 마음에 들으며 갖고 싶다고 바랬다. 여불위는 자초의 요구를 거부하지는 않고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조희를 자초에게 보내어, 조희는 자초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 아이가 태어나니 이 아이가 바로 정(政) 즉 후의 [[진시황]](秦始皇)이지만 진시황의 아버지에 대해 주로 두 가지의 설이 있다.
 
 
결혼한 후 돌이에게 아이가 태어나 이 아이가 바로 정(政) 즉 후의 [[진시황]](秦始皇)이지만 진시황의 아버지에 대해 주로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사기]]> 중 <여불위전>이나 송(宋)시대에 쓰인 <십팔사략>에는 여불위가 조희를 자초로 보내기 전, 조희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고 하고 여불위는 이것을 숨기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진시황의 아버지는 여불위라고 주장한다.
 
<[[사기]]> 중 <여불위전>이나 송(宋)시대에 쓰인 <십팔사략>에는 여불위가 조희를 자초로 보내기 전, 조희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고 하고 여불위는 이것을 숨기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진시황의 아버지는 여불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은 자초의 아들이며 여불위의 첩인 조희를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면 진시황(秦始皇)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진시황의 아버지는 자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은 자초의 아들이며 여불위의 첩인 조희를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면 진시황(秦始皇)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진시황의 아버지는 자초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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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 탈출===
 
===조나라 탈출===
 
진나라 [[백기]](白起)가 조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생매장한 [[장평대전]](長平大戰)이 끝난 쯤의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자초는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에서 진나라로 탈출했다. 하지만 조희와 어린 정(政,[[진시황]])은 조나라에 남겨졌다. 진나라 왕족에 시집을 간 조희(趙姬)와 어린 정(政)은 장평대전으로 인해 조나라로부터 원한을 받는 진나라 사람이 되었으므로 증오를 받게 되어 도망쳐 숨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진나라 [[백기]](白起)가 조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생매장한 [[장평대전]](長平大戰)이 끝난 쯤의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자초는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에서 진나라로 탈출했다. 하지만 조희와 어린 정(政,[[진시황]])은 조나라에 남겨졌다. 진나라 왕족에 시집을 간 조희(趙姬)와 어린 정(政)은 장평대전으로 인해 조나라로부터 원한을 받는 진나라 사람이 되었으므로 증오를 받게 되어 도망쳐 숨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2020년 6월 29일 (월) 15:25 기준 최신판

조희(赵姬)
생존시기 전국시대 말기
별칭 제태후(帝太后)
배우자 장양왕(莊襄王)

개요

조희(趙姬)는 조(趙)나라 한단출신이고 진시황(秦始皇)의 생모로 최초의 황태후다. (秦)나라의 왕족 자초(후의 장양왕)에게 시집을 갔지만 여불위(呂不韋)나 노애(嫪毐)와 육체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해서 현대에서는 중국 왕조의 악녀의 한 사람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나 서태후(西太后) 등과 함께 악녀 중 한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름에 대한 해석과 기록

조희라는 이름은 조나라에서 매춘부 혹은 춤을 잘 추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였다고 한다. 하지만 사마천의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서는 ‘ 呂不韋姬’나 ‘太后’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여불위열전>에서는 ‘邯鄲諸姬’나 ‘姬’,’ 子楚夫人’,’太后’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어느 쪽에도 趙姬라는 이름으로는 적혀 있지 않는다. 즉 趙姬라고 표기된 이름은 후세의 사칭이다.

여기에서 ‘趙’라는 한자는 조희 본인이 조나라 출신이기에 趙씨라고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집을 간 진나라 子楚(장양왕)의 성이 趙씨인 데서 유래된다.

’라는 한자도 현대에서 많이 쓰이는 공주라 뜻이 아니라 ‘첩’이나 ‘귀부인’,’귀인의 딸로 미혼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귀부인이라면 뜻으로 쓰인다.

현대에서는 저희라고 불리는 사람이 따로 두 명 존재하고 한명은 전한(前漢)시대 高祖유방(劉邦)의 비빈(제2.3의 부인)이며 또 한명은 삼국시대 오(呉)나라 우의(虞韙)의 여관의 별명이다.

생애

여불위와 자초와의 만남

조나라 한단(邯鄲)의 부호의 딸로 태어나 무희(춤을 추는 사람)를 하고 있던 조희는 상인인 여불위(呂不韋)의 눈에 띄었다. 여불위가 마음에 들어 조희는 그의 첩으로 되었다. 하지만 진나라 왕족이자 인질로 초나라에 내밀려 여불위의 도움을 받고 있던 자초가 조희를 보고 마음에 들으며 갖고 싶다고 바랬다. 여불위는 자초의 요구를 거부하지는 않고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조희를 자초에게 보내어, 조희는 자초와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 아이가 태어나니 이 아이가 바로 정(政) 즉 후의 진시황(秦始皇)이지만 진시황의 아버지에 대해 주로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사기> 중 <여불위전>이나 송(宋)시대에 쓰인 <십팔사략>에는 여불위가 조희를 자초로 보내기 전, 조희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고 하고 여불위는 이것을 숨기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진시황의 아버지는 여불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기> 중 <진시황본기>에는 진시황은 자초의 아들이며 여불위의 첩인 조희를 보고 아내로 맞아들이면 진시황(秦始皇)이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진시황의 아버지는 자초라고 주장한다.

조나라 탈출

진나라 백기(白起)가 조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 명을 생매장한 장평대전(長平大戰)이 끝난 쯤의 관계가 악화하는 가운데 자초는 여불위(呂不韋)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에서 진나라로 탈출했다. 하지만 조희와 어린 정(政,진시황)은 조나라에 남겨졌다. 진나라 왕족에 시집을 간 조희(趙姬)와 어린 정(政)은 장평대전으로 인해 조나라로부터 원한을 받는 진나라 사람이 되었으므로 증오를 받게 되어 도망쳐 숨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자초가 왕 즉 장양왕(莊襄王)으로 되어 정(政)은 태자가 되었기 때문에 조희와 정(政)은 조나라를 탈출해 장양왕가 정권을 가지는 진나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 때 여불위(呂不韋)는 왕을 보좌하는 승상(丞相)으로 되었다.

태후가 된 조희와 여불위의 관계

자초가 장양왕으로 되어 진나라에서 지내게 되었지만 병으로 인해 장양왕이 죽어 태자인 정9은 어린 나이에 왕으로 되었다.(진시황의 탄생) 진시황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 대신 어머니인 조희가 태후로서 정권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조희는 먼저 진나라로 들어간 여불위(呂不韋)와 다시 만나게 되어 태후(太后)와 승상(丞相)으로 육체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여불위는 조희(趙姬)와의 육체관계가 오래 계속되면서 성욕에 빠지는 조희를 만족시킬 수 없게 되었으며 이 관계가 진시황(秦始皇)에게 알려지면 자신의 지위가 위험해진다고 생각했다.

노애의 존재

여불위(呂不韋)는 연회에서 본 노애(嫪毐)라는 남자를 자기 대신으로서 후궁에 가짜 환관으로 보냈다. 조희는 여불위의 의도대로 노애(嫪毐)를 마음에 들어 또 육체관계를 가지게 되어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아이도 생겼다. 조희(趙姬)는 아이들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거짓 점을 치고 사는 곳을 (雍)으로 옮겼다.

노애(嫪毐)는 조희(趙姬)의 후원을 바탕으로 점점 권력을 가지게 되어 더욱 총애를 받아 장신후(長信侯)로 권력을 강화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노애를 좋게 생각하지 않아씨가 때문에 이 관계를 밀고하는 자가 많았다.

태후인 조희(趙姬)와의 관계가 진시황(秦始皇)에게 알려버린 노애(嫪毐)는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이에 대비하고 있던 진시황(秦始皇) 측에 잡혀 노애는 죽였다. 또 노애와 조희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과 노애의 일족도 같이 죽혔다고 한다. 노애를 후궁에 보낸 죄로 유배되어 이후 스스로 독으로 죽었다.

조희의 마지막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맞고 있던 조희는 노애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 화난 진시황에게 옹(雍)에서 유폐되었다. 하지만 진시황이 스스로 (雍)에 있는 조희를 찾아와서 허락을 받아 들어가게 되어 그 후 죽을 때까지 평온한 만년을 보냈다.

제태후(帝太后)라는 친호는 조희의 죽음 이후 진시황에 의해 치호되었다.

평가

사마천 <사기>의 저희에 관한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은 정도로 적으며 사료도 적기 때문에 정확한 것이 없고 현대에서는 여러 가지의 추측이 존재한다.

<사기> 중 <여불위열전>이나 후한(後漢)에 쓰인 <漢書>에는 진시황이 여불위의 아들이자 기록되어 있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사기]에는 모순이 많으며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는 임신 중의 만삭기간과 진시황의 출생한 날에 모순이 있다고 하여 진시황은 자초(장양왕)의 아들이자 하는 의견이 많다.

<사기> 중 <여불위열전>에는 “조나라는 趙씨의 아내를 죽이려고 했지만 조차(장양왕)의 아내의 조나라 부호의 딸이었다”라고 쓰여 趙씨의 가계를 조나라 부호라고 하였다.

<사기>중 <진시황본기>에는 “진나라 왕이 한단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조희,太后)의 집에 원한을 품은 사람을 모두 생매장으로 했다”라고 쓰였지만 역사학자 중에는 여불위의 지원을 받아 부자가 되었다는 의견과 조희가 매춘부이었다면 지원을 받아도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의견이 있다.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 중 <진시황본기>,<여불위열전>

鶴間和幸 <人間・始皇帝> 岩波書店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