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마왕퇴(馬王堆)란 ‘마왕(馬王)의 무덤(塚)’이라는 뜻으로, 10세기 중반 그곳을 다스렸던 마은(馬殷)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면서 붙은 이름이다. 호남성(湖南省) 장사시(長沙市) 동쪽 교외에 위치하며, 총 3개의 묘로 구성되어 있다.

발굴 및 조사

마왕퇴(馬王堆)는 양쯔강(揚子江) 남쪽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시에 위치해 있다. 사실 마왕퇴는 1961년 성급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문화재 표지판도 있었으나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표지판이 훼손되어서 평범한 언덕으로 보였다. 발굴 전까지는 누구도 그 가치를 몰랐다.
1971년 인민군은 소련의 원자탄 공격에 대비해 마왕퇴에서 방공호를 파들어가기 시작했다. 366병원 당위원회는 요양원 안에 있는 마왕퇴 밑에 대형 동굴을 파서 부상병을 돌보기로 결정했다. 동굴을 10m쯤 파내려 가자 하얀색 흙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깊이 팔수록 딱딱해졌다. 조사 결과 흰 흙은 백고니였다.
백고니를 드릴로 뚫자 구멍을 통해 정체 불명의 가스가 나왔다. 현장에 있던 병원 원무처장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고 그로 인해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1호묘의 높은 보존도와 이 기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구멍을 막지 않고 방치해서 기체가 다 빠져나와 수집에 실패했다.
1972년 1월 16일부터 74년까지 대대적으로 발굴이 시작됐다. 인력이 모자라서 동네 주민, 중학생, 대학생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불도저로 1호묘의 봉분을 깎자 길이 20m, 너비 17.9m의 직사각형 무덤 입구 나왔다. 발굴 중에 세 개의 구멍(근래의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정사각형 모양, 더 오래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개의 원형)이 나왔는데 이는 도굴꾼이 도굴을 시도하려던 흔적이다. 다행히 발굴이 지속되면서 구멍은 사라졌고 이를 통해 도굴꾼이 도굴을 중도에 포기한 것을 알 수 있다.
1972년 1월부터 4월 1호묘 발굴을 시작으로 이듬해 1973년 11월부터 12월 사이에 1호묘 남쪽에 인접한 3호묘를, 1973년 12월부터 1974년 1월에는 서쪽 무덤에 해당하는 2호묘를 발굴 및 조사하였다. 당시는 문화대혁명의 풍조가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홍위병의 공격에 대비하여 촬영 필름을 셋으로 나눠서 세 곳에 보관했다. 발굴 결과 마왕퇴는 실제 10세기보다도 훨씬 오래전인 대(漢代) 초기의 유적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마왕퇴 한묘(漢墓)라고도 한다. 무덤의 주인은 장사국(長沙國)의 승상이자, 대(軑)라는 땅에 영토를 받은 대후(軑候) 이창(利蒼) 일가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후난성 박물관은 마왕퇴 발견 후 조사를 담당하여 마왕퇴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이곳은 마왕퇴 유물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외에는 후난의 역사문물이 진열되었다.)


의의

묘지가 발견된 장사(長沙)는 본래 (楚)의 영토였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형산(衡山)∙구강(九江)∙강남(江南)∙예장(豫章)∙장사는 초나라 남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왕퇴 한묘의 연대가 대략 기원전 186년에서 145년 사이이고, 초나라가 멸망한 시기인 기원전 223년이 이로부터 육십 년도 채 안 된다는 점에서 마왕퇴의 묘장(墓裝) 이나 각종 부장품, 다량의 마왕퇴백서는 초나라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마왕퇴 유적은 초나라 문화와의 비교 연구에서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1]

1호묘

마왕퇴 1호묘의 관 위에 덮여있던 T자형의 백화(帛畵)[2]

1호 묘에서는 간독(簡牘), 직물, 칠기, 죽목기(竹木器), 도기, 악기 등 1000점이 넘는 부장품이 보존이 매우 잘 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2,000여년이 넘었음에도 전혀 부패하지 않고 보존 상태가 좋은 중년 여성의 미라가 4중으로 된 관에 안치되어 있었다. 관에는 피장자의 혼이 무사히 승천하길 비는 그림이 그려진 T자형의 백화(帛畵)가 덮여 있었으며, ‘대후가(軑候家)’와 ‘대후가승(軑候家丞)’이라고 적힌 명문 및 봉니(封泥)가 함께 출토되었다. 피장자는 대후부인(軑候夫人) 신추(辛追)로 밝혀졌으며, 부장품의 특징에 의거하면 연대는 기원전 175년에서 145년 사이로 추정되며, 피장자 대후부인은 한 무제(武帝) 12년(기원전 145) 이후에 사망했을 것이다.

구조

무덤입구에서 밑바닥까지 오화토로 채워져 있고, 약 40cm씩 30여층으로 흙이 단단히 다져져 있었다. 이 흙은 도굴방지나 비, 습기 스며들지 않도록 하는 장치로 추정된다.
백고니 두께 1.3m로 굉장히 두터웠다. (다른 무덤은 두터워도 몇 센티미터에 불과한 것과 대비된다.) 백고니를 드러내자 두께 40-50cm의 숯(현대의 숯과 동일.)이 나왔다. 숯을 파내자 죽석이 발견되었다. 죽석이 막 출토되었을 때는 새 것처럼 황색을 띠고 있었는데 몇 십 분 후에 공기와의 접촉으로 검은색으로 변질되었다. 죽석은 길이 2m 너비1m로 네 줄로 펼쳐져 있었고 총 26장이었다. 각 장의 구석에는 가(家) 자가 쓰여 있었으나 용도는 모른다. 관곽을 계란 노른자로 비유하자면, 백고니는 계란 껍질(외부의 충격과 빗물의 침습 막기), 숯은 흰자(방습 기능과 물을 빨아들여서 건조한 상태 유지 기능)라 할 수 있다.
관곽의 외부 길이는 6.67m, 너비는 4.88m였다. 관곽의 뚜껑을 해체하자 곽실이 드러났다. 정(井)자형 구조이고(매우 드문 형태) 가운데는 관목이 있었다. 관목에는 화려한 문양과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귀퉁이에는 4개의 커다란 변상(상자)이 있었고 안에는 약 1000점의 유물이 있었다.

1호묘 구조.jpg

미라

미라는 20벌의 의복과 포단으로 감싸지고 9개의 명주 끈으로 묶여있었다. 신장 154cm, 체중 34.3kg이다.
마왕퇴의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미라의 보존상태이다. 내장을 전부 발라내고 방부처리를 한 이집트 미라와는 달리 죽을 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의 장기도 훌륭히 보존되었다. 보존을 위해서 알코올과 포르말린의 혼합액을 체내에 주사하자 마치 산 사람처럼 혼합액이 혈관을 따라 퍼질 정도였다.
미라는 두 겹의 관곽 외에 다시 네 겹의 목관으로 감싸져 있었는데 이를 통해 무덤의 주인이 굉장히 높은 지위였음을 알 수 있다. 내관안에는 80리터정도의 액체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액체의 정체에도 많은 논의가 있었다. 일부러 넣은 건지 나중에 지하수가 들어온 건지 알 수 없다.
어떻게 시신을 해부 방법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마왕퇴 한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시신의 해부 방안에 관한 보고서'에 따라 해부 전에 전면적인 검사(안과, 이비인후과, 피부과, 산부인과, 구강과, 방사선과 의사들이 진행)를 하고 외형을 완전히 보존하고 어떻게 절개할지 구체적으로 정한 뒤에 이뤄졌다.
장기가 부드럽고 매끄러웠으며 폐와 간은 가장 부패하기 쉬움에도 완전히 보존되어 있었다. 피부와 인체조직이 썩지 않고 세포도 분명히 보였다. 피하 조직이 탄력적이고 관절도 부드러웠다고 한다. 눈썹, 코털, 왼쪽 귀 속에는 고막까지 남아있었다. 시신의 조직과 머리카락에서 혈액형이 A형이라고 드러났다. 또한 일본혈흡충병, 담낭 기형, 동맥경화증, 관상동맥경화성 심장병 등을 앓고 있었고 체내에 납과 수은이 쌓여 있었다. 당시 귀족들은 불로장생을 꿈꾸며 선단(수은으로 만들어짐.)을 복용했기 때문에 만성 수은중독도 있었다.
골격 분석, x선 검사, 산부인과 검사 등을 통해 50세 전후에 사망했다고 추정한다. 관상동맥이 심하게 막혀서 담석증이 급성으로 발작해 급성심근경색으로 돌연사 했을 가능성이 크다. 소화기관에서 138개의 참외 씨 발견함. 참외를 먹은 뒤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갑자기 사망하였고 참외가 익어가던 여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례』와 『예기』의 기록대로 장례가 치뤄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기록에는 사람의 사망부터 매장까지의 과정이 자세하게 기술 되어있다.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1. 향기로운 물이나 술로 시신을 닦기, 천으로 시신 감싸기-오물을 제거하고 시신을 향기롭게 만들었으며, 소독의 효과도 있었다.
2. 얼음으로 시신의 온도 낮추기-부패를 늦추기 위해서이다.
3. 빨리 입관하고 관을 봉한다. -무덤의 주인은 사후 5일 안에 염했을 것이다. 다만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의 규모로 보아 매장까지 수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라가 발견된 당시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미라를 보려고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미라에 대한 이상한 소문(미라가 일어나서 대화)이 퍼지기도 하고 수십명이 밟혀서 부상당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 이에 왕야추는 미라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건의했다.(박물관의 미라를 사진으로 대체하고 비밀리에 보관하기, 인원통제를 위한 경비 요원 200명 동원 등) 그의 보고서를 읽은 주은래가 시신을 냉동창고로 옮기고 화학처리 하도록 지시했다.

백화

백화(帛畵)는 고대중국의 가장 중요한 제례절차인 장례 때 사용된 의례 용 천 위에 그린 그림이다.상을 당했을 경우 백화를 흔들며 소리쳐 떠난 혼을 불러들이고 장례를 치루는 동안 상갓집 앞에 세워 두었다가, 관위에 덮어 함께 땅 속에 묻는다. 이 백화에는 상주들의 염원이 담긴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발굴된 백화들 중 장례 문화와 회화예술의 완벽한 결합이라고 칭송받는 마왕퇴의 T형 백화가 가장 대표적이다.

관 뚜껑 위에 덮힌 T자 형의 정번백화(旌幡帛畵)는 길이가 206cm, 상단너비가 90cm, 하단너비가 47.7cm로 세 장의 결이 좋은 견직물을 합쳐서 만들어졌다. 네 개의 모서리에는 흑청색의 술이 달려있다. 이 모양은 당시 유행하던 옷의 모양과도 같은 것으로, 영혼이 하늘로 올라갈 때 입고 올라가는 옷이라는 의미로 ‘비의(非衣)’ 라 불린다.

백화 내용에 대해서는 여덟 가지의 견해가 있다.

1.천상-인간-지하설
-천상세계
천상세계의 중심에서 청룡과 적룡으로 양쪽에 한 마리 씩 있다. 용은 광의적 의미에서 중화민족의 대표적 상징이고 중국, 그리고 왕의 상징이기도 하다. 큰 태 양 아래에는 8개의 태양이 마치 나무에 열린 듯한 모습으로 나무에 매달려 있다. 천상의 중간에는 쌍룡이 서로 교호하고 있고, 이것은 생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후세계에도 풍요로운 삶을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신과 신수, 천문이 그려져 있다.
-지상세계
지상세계는 옥벽을 기준으로 인간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윗 부분은 묘 주인의 승천을 묘사하고 아래 부분은 묘 주인을 위한 제사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두 명의 가신이 무릎을 꿇고 쟁반을 든 형태로 저승세계로 떠나는 주인에게 예를 올리고 있다. 주인이 서 있는 단 아래 인간세계를 하늘세계와 연결시켜 주는 통행로와 같은 둥그런 옥벽을 사이에 두고 거대한 용이 두 마리 있고, 용의 몸통 부분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다. 가마 밑에는 제례상이 차려져 있 고 제사상 옆에는 구름을 물고 있는 거북이와 거북이의 등의 올빼미가 있다. 이는 어두운 밤에 제사를 올리면 두 마리의 용과 두 마리의 호랑이가 승천하는 것 을 표현한다.
-지하세계
지하세계는 괴수와 용, 뱀, 큰 물고기들을 그려 바다를 묘사하며 황천을 표현하고 있다. 지하세계의 중심에는 땅을 받치고 있는 역사(力士)가 있다. 물고기 두 마 리가 몸을 꼬고 있는 그림을 통해 땅 밑을 역시 수중세계로 표현했다.

2.무덤 주인 생활 설
-1단은 두개의 대궐문, 문을 지키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2단은 무덤 주인의 모습과 생활을 표현했다. 무덤의 주인인 노부인, 두명의 가승, 세명의 시녀가 그려져있다.
-3단은 일곱명의 사람이 그려진 주방이다.

3.천상-과도단계-인간 설
4.천상-인간제사-수부설
5.지부 혹은 저승 설
6.길상 설
7.선도영빈 설
8.봉래선도-천국 설

부장품

죽은 사람의 영혼은 없어지지 않고 죽은 뒤에 다른 세계에서 생활한다고 믿었다. 생전에 좋아하던 물건, 일상품, 음식 등을 넣었다. 1호묘에는 1000점 이상의 부장품이 발견되었고 보존도가 매우 좋았다. 이를 통해 당시의 문화, 생활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미라의 머리는 북쪽에 있는데 이는 생전에 북쪽을 등지는 것과 같다. 미라 주위의 4개의 큰 변상(상자)는 각기 집에 있는 방을 상징한다.
팥, 배, 딸기 등 다양한 곡식과 과일 채소도 있었으나 싱싱한 딸기열매가 공기와 햇빛에 닿자 검은색 재처럼 변하는 등 운반과정 중 손상이 심했다.

-북쪽 변상
응접실을 상징한다. 안에는 고대 귀족이 흔히 사용하던 칠병풍, 수화침두, 칠궤, 칠렴(화장합)이 있었다. 화장합에는 매우 화려했는데 내부에는 연지, 파우더 등이 발견되었다. 화장합 안에는 뿔로 만든 인장도 있었다. 인장에는 첩신추(妾辛追)라고 써있었는데 첩은 고대여성이 자신을 일컫는 칭호고, 신추는 이름을 뜻한다. 이를 통해 1호묘는 신추라는 이름의 여인의 무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외에도 직책 높은 시녀와 악대, 가무단을 본뜬 목용(나무인형)이 다량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무덤 주인인 가무와 연회를 즐기며 호화로운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동쪽 변상
312개의 죽간이 있었다. 이는 무덤 안에 있는 모든 부장품의 명세서이다. 집사와 일반 고용인의 인형. 칠기, 도기 등 귀한 유물도 발견됐다.
-남쪽의 변상
주방과 노비가 사는 곳을 상징한다.
-서쪽 변상
저장실이나 지세 창고를 상징한다. 우와 슬이라는 완벽한 형태의 악기도 있었다. 생전에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견직물, 옷 등도 출토되었다. 중국의 비단은 5000년 역사를 지녔지만 쉽게 썩어서 고대의 비단에 대한 정보를 얻기 힘들었다. 출토된 견직물은 고대의 거의 모든 견직물 품종, 다양한 색, 기법, 문양을 지녔다. 특히 소사단의가 희귀한 유물. 총길이 128㎝에 어깨길이는 190㎝나 되지만 중량은 겨우 49g인 직물 '소사의(素紗衣)'도 있다. 이것이 중국이 세계를 향해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가벼운 옷'이다. 이를 통해 2100년전 중국의 수준 높은 방직기술을 짐작할 수 있다.

2호묘

마왕퇴 2호묘에서 출토된 ‘대후지인(軑候之印)' 인장(印章)[3]

2호 묘에서는 ‘대후지인(軑候之印)’, ‘장사승상(長沙丞相)’, ‘이창(利蒼)’이라는 3개의 인장(印章)이 출토되었다. 여기서 ‘대후지인’은 묘주의 작위(爵位)를 나타내는 인장이며, ‘이창’은 묘주가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인장, ‘장사승상’은 묘주의 관직을 나타낸다. 2호묘의 주인인 이창은 전한(前漢) 시기의 인물로, 혜제(惠帝) 2년(기원전 193)에 대후로 봉해졌으며, 여후 2년(기원전 186)에 사망했다.[4] 도굴을 많이 당한 탓에 이외에는 별다른 중요한 출토품이 없다.

3호묘

3호묘의 발굴은 마왕퇴의 세 개 무덤 중 학계에서 가장 이목을 끌었다. 1호묘에 필적하는 1000점 이상의 귀중한 부장품이 발굴되었는데 38건의 병기, 5건의 악기, 316건의 칠기, 104건의 나무인형, 50개의 대나무 상자, 사직품(絲織品), 백화(帛畵)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나무조각에 쓴 글인 목독(木牘)도 발굴되었는데, 410쪽의 유책(遺策, 묘지 속의 물품 수량을 죽간에 기록한 장부)과 200쪽의 의서(醫書)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전국 말기에서 한 초기에 이르는 시기의 천문, 의술, 점서, 신앙, 복식, 칠기공예, 신앙, 회화 등을 이해하는 데 실로 중요한 자료이다.[5]목독(木牘)에 적힌 ‘12년 2월 을사 초하루 무진날(十二年二月乙巳朔戊辰)’은 묘장 연도로 추정되며, 이에 따르면 피장자는 한 문제(文帝) 12년(기원전 168)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6]3호묘의 주인은 이창의 아들로 2대 대후인 이희(利豨), 혹은 그의 형제의 것이라고도 한다.[7]

참고자료

  • 웨난 지음, 이익희 옮김, 『마왕퇴의 귀부인』, 일빛, 2001.
  • 권석한 외 5인 지음, 『중국문화답사기 2 : 형초지역의 도원지몽을 찾아서』, 다락원, 2004.
  • 종전휘 외 2인, 이미지텔링의 관점에서 본 마왕퇴의 T형 백화, 『철학사상문화』 제16호, 2013, 162-188쪽.
  • '中 ‘영험한 땅’ 미신으로 창샤 주민들 마왕퇴한묘 호시탐탐 노려’, 내일신문,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86&aid=0002122020, 2012년 08월 27일.
  • 김태식, ‘참외 먹고 죽은 2천100년 전 미라-1’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800077, 2007년 10월 29일

  • 김태식, ‘참외 먹고 죽은 2천100년 전 미라-2’,

연합뉴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800080, 2007년 10월 29일.

  • 김경수, 『출토문헌을 통해서 본 중국 고대 사상』, 심산출판사, 2008, p.29-30
  • 사진 및 내용 출처: http://www.hnmuseum.com/gallery/node/32/40
  • 사진 및 내용 출처: http://www.hnmuseum.com/gallery/node/32/3
  • 위의 책, p.28-29.
  • 위의 책 p.21.
  • 위의 책 p.29.
  • 후쿠타 데쓰유키 저, 김경호·하영미 역, 『문자의 발견 역사를 흔들다』, 너머북스, 2016,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