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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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불위(呂不韋)

출생 B.C. 293 (정확하진 않음)
(韓)나라 또는 (魏)나라
사망 B.C. 235 (진시황 10년)
생존시기 전국시대 말기
주요 작품 여씨춘추(呂氏春秋)

개요

여불위 그는 누구인가?

그는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 보고 투자할 가치가 있는 대상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거상(巨商)이었다.

그러나 그는 물건만을 사고파는 상인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에게서도 가치를 찾아내 사람마저도 투자대상으로 판단하는 비범한 상인이었고, 더 나아가 킹메이커이자 한 나라의 실세로 군림한 권신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인(異人)은 장양왕(莊襄王)이 되지 못했을 테고, 진시황(秦始皇)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즉, 그가 없었다면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인 (秦)나라 또한 없었다. 이 정도로 그는 중국 역사에 영향력이 큰 존재이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처절했다. 주변인의 실수를 말미암아 여불위는 진시황에게 협박을 받아 끝내 자결하고 말았다.

여불위 관련 인물관계도

여불위 인물 관계도

생애

불분명한 출생연도와 출신

그의 출생연도는 불분명하다. 한중교류 채널 봉황망(凤凰网)에서는 여불위가 B.C.292년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신빙성이 그다지 크지는 않다. 그리고 출생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그의 출생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 그가 (韓)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사마천 사기(史記)의 여불위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그를 “양적(陽翟)의 대고인(大賈人)”이라고 설명한다. 이때, ‘양적’은 한나라에 있는 큰 읍이고, ‘대고인’은 점포를 가지고 장사를 크게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두 번째로 그가 (衛)나라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유향전국책(戰國策)에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복양(濮陽) 사람 여불위 한단(邯鄲)에서 장사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복양’은 (衛)나라의 도시 중 하나이고, ‘한단’은 (趙)나라의 수도이다. 또, 봉황망(凤凰网)에서 “그의 아버지 여충의(呂忠义)는 위나라 성내에서 진귀한 한약재를 파는 유명한 상인이었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여불위 집안이 위나라 상인 집안이고 그로 인해 여불위가 위나라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안목과 기개: 기화가거

여불위는 상인이면서도 학문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상업적 능력은 여타 상인들에 비해 뛰어났다. 싸게 구매하여 비싸게 팔아 집에 천금을 마련했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그는 사업적 수완이 밝았다.

그렇게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상업을 통해 재산을 늘려가던 그는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그동안의 진귀한 물건들과는 비교도 안 될 값어치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진나라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이인이 그‘기화(奇貨: 뜻밖의 이익을 얻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였다.

왕의 핏줄이라기엔 너무 초라하게 사는 이인을 보고 여불위는 동정과 함께 투기 감각을 느꼈다. 기화인 이인을 ‘차지할 수 있는지(可居)’가 여불위에겐 중요했다. 아무리 값이 나가는 물건이라 해도 차지할 수 없으면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인이 태자였다면’ 또는 ‘그의 모친 하희가 총애를 받는 부인이었다면’ 아마 그의 가치는 ‘조나라 인질 이인’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고, 여불위는 이인에게 접근조차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인은 진나라에 쓸모없는 존재였고 여불위는 그를 차지할 기회가 생겼다. 여기서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전국책에 여불위가 궁핍하게 사는 이인을 보고 그의 부친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여불위의 뛰어난 안목이 드러난다.

“아버지, 경전(耕田)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열 배이다.”/“주옥(珠玉)의 이익은 몇 배입니까? 백 배이다.”/“국가의 주인을 세운 이익은 몇 배입니까? 헤아릴 수 없다.”/“논밭에서 땀 흘려 일해도 따듯한 의복과 남아도는 음식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나라를 세울 주군을 세우면 그 혜택을 후세의 자손까지 남길 수가 있습니다. 진나라 공자인 이인이 조나라의 인질로 와 있습니다. 가서 그에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이후, 그는 직접 이인을 만나 인사를 했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 여불위와 이인이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여불위의 당찬 모습과 기개가 드러난다.

“공자여, 제가 귀하의 가문을 크게 높여드리겠습니다.” 여불위가 말했다.“우선 당신의 가문을 크게 한 뒤 내 가문을 크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실소와 함께 힘없는 어조로 이인이 말했다.“공자는 모르시겠지만, 내 가문은 당신의 가문이 커진 후에야 커질 것입니다.”라며 여불위는 눈을 반짝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인이 관심을 보이자 여불위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제게 공자를 왕위에 올릴 계책이 있습니다.”

화양부인을 사로잡은 그의 재력과 지력

여불위가 이인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선 진나라 왕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때 여불위가 그동안 벌어놓은 천금의 재물이 큰 역할을 했다. 이 재물로 진나라 내부 사람을 매수하여 진나라의 내부사정을 알 수 있었다. 그 사정은 이랬다. 진나라의 소양왕이 안국군을 태자로 삼았으나, 안국군이 가장 총애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즉, 안국군의 뒤를 이을 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여불위는 이 점을 잡아냈다. 이인을 안국군의 태자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우선, 여불위는 이인에게 오백 금을 주어 교제 범위를 넓히라고 했다. 일단 조나라 안에서 평판이 높아져야 태자가 될 당위성이 생길 것으로 여불위는 생각했다. 이 오백 금은 일종의 투자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인이 이렇게 교제 범위를 넓히는 동안 여불위는 진나라 내부를 공략하고자 했다. 여불위는 왕의 핏줄이 아니었기에 바로 안국군을 만나는 것보다 그의 주위 사람을 만나는 것이 현실 가능성이 더 컸다. 그래서 그는 화양부인의 육친인 양천군(陽泉郡)을 우선 공략하기로 했다. (사기에서는 화양부인의 언니를 공략했다고 나오고 전국책에서는 화양부인의 여동생을 공략했다고 나오긴 하나, 중요한 것은 여불위가 화양부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을 구슬렸다는 점이다.)

화양부인의 육친에게 여불위는 5백 금 상당의 진기한 물품을 선사했다. 이와 함께 이인에 대한 칭찬이 담긴 말과 화양부인의 아들이 없다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이 담긴 말을 했다. 그 말은 사기 여불위 열전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以色事人者(이색사인자) 色衰而愛弛(색쇠이애이) 以色事他人(이색사타인) 能得幾時好(능득기시호) 미모로 사랑을 받은 사람은 미모가 시들면 사랑도 식는다. 미모로 남을 섬겼다면 그 얼마나 오래 갈 수 있겠는가!”
“제가 듣건대 아름다운 얼굴로 남을 섬기는 자는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지금 부인께서는 태자를 섬기며 총애를 받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찌감치 여러 아들 가운데 현명하고 효성스러운 자와 인연을 맺어 그를 후사로 발탁하여 양자로 삼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존중받으며 귀한 자리에 있고, 남편이 죽은 뒤에도 양자가 왕이 되므로 끝까지 권력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마디 말로 장구한 이로움을 얻는 일입니다. 영화를 누릴 때 터전을 닦아 놓아야 하지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고 사랑이 식은 뒤에는 비록 한마디 말을 하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이인은 현명하여 스스로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후사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며, 그를 낳아준 어머니도 사랑을 받지 못하므로 스스로 부인에게 의지할 것입니다. 부인께서 진심으로 이때 그를 후사로 뽑아 맏아들로 삼는다면 평생 진나라에서 존경받을 것입니다.”

화양부인의 영화에 의존하고 있는 육친에게도 이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었으므로 그녀는 바로 화양부인께 이 말을 전했다. 화양부인도 여불위의 말에 심히 공감하며 이인을 양자로 삼자고 안국군에게 눈물을 흘리며 청했지만, 안국군은 바로 승낙하지는 않았다. 안국군은 이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한 후에 그가 태자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여불위를 불러, 이인을 후사로 삼고 여불위를 이인의 스승 겸 보좌관이 되라고 했다. 여불위의 판단력과 재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진나라 소양왕 50년, 진나라는 왕의(王齮)를 보내 한단을 포위하였다. 상황이 매우 급해진 조나라는 자초를 죽이려 했다. 여불위는 자초와 모의하여 타개책을 생각해냈고, 황금 육백 근을 감시하던 관리에게 주고 탈출하였다. 진나라 군대 진영으로 도망한 뒤 마침내 진나라로 귀국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에도 여불위의 지력과 재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인이 화양부인을 처음 접하게 된 순간에도 그의 지력은 빛을 발했다. 화양부인이 이인의 기대 속 모습에 실망하면 계획이 틀어지게 되니 여불위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이인에게 귀띔했다. 그 귀띔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이인에게 초나라의 옷을 입게 한 것이다. 화양부인이 (楚)나라 출신임을 알고 초나라를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적중했다. 화양부인은 이인이 초나라 옷을 입고 그녀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그녀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이후, 화양부인은 이인을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했고, 바로 정식으로 아들로 삼고, 이인이라는 이름을 초나라의 아들 자초(子楚)라고 새로 지어줬다.

대업을 위해 바친 애첩

이인은 여불위가 초대한 술자리에서 여불위가 가장 아끼던 미첩(美妾) 조희(趙姬)를 보고는 한눈에 반해 그녀를 자기에게 달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인은 미녀를 보면 사족을 못 쓰는 호색가였다. 가장 아끼는 첩이기도 했고, 용모뿐만 아니라 온몸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조희를 덜컥 달라 했기에 여불위는 분노에 가득 찼지만 참았다. 그리고는 이인에게 그녀를 넘겼다. 이는 그가 그동안 진행해온 계획이 허사가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조희가 여불위의 아이를 배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조희가 자초의 정부인이 되면 이 아이는 왕족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여불위의 미래에 큰 이익을 가져오리라 생각했다. 계획대로 이 아이는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政)이자 미래의 진시황(秦始皇)이었다.

B.C. 259년 조나라 백성들은 진나라를 증오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돼서 진나라의 정부인인 조희와 정을 죽이고자 했으나, 조희는 조나라 호족(豪族) 집안의 여자였기 때문에, 몸을 숨길 수가 있었다. B.C. 251년 진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자, 화양부인은 왕후가 되었고 정은 태자의 아들이 되었으므로 조나라는 모자를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하늘도 그를 돕다, 순풍 올라탄 여불위

안국군은 재위한 지 1년 만인 B.C. 250년에 죽고, 효문왕(孝文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안국군이 만약 재위 후 오래 살았다면 여불위의 계획은 틀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너무나도 일찍 죽고 말았다.

이후 태자 자초가 즉위했고 그가 바로 장양왕(莊襄王)이었다. 장양왕은 즉위 후 여불위를 승상(丞相)으로 삼고 문신후(文臣侯)로 봉하여, 낙양 10만 호의 영지를 하사했다. 보잘것없던 그를 위대한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어준 여불위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에 답하듯이 여불위는 왕을 보좌하며 왕조를 순탄하게 운영했다. 행정과 군사 모두 서투르지 않았다. 실례로 몽오(蒙骜)라는 문관의 병략적(兵略的) 재능을 간파한 여불위가 그를 장군으로 발탁하여 큰 성과를 이뤄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불위는 집안의 노비가 만 명에 이를 정도로 권세를 누렸다. 그런데, 장양왕도 재위 3년 만인 B.C. 247년에 죽고 말았다.

그로 인해, 태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13세의 어린 나이인 정은 핏줄 때문인지 여불위를 받들었고, 여불위는 상국(相國)으로 삼고, 중부(仲父)라고 불렀다. 이렇게 어린 왕을 대신해 집정하다 보니 여불위의 권세는 나날이 높아졌다. 여불위는 문화활동에도 크게 관심을 가졌다. 당시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그리고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 저마다 식객을 늘리기위해 경쟁을 벌였다. 이에 질세라 여불위도 이 경쟁에 참여했고, 여불위는 3천 명의 식객을 두었고 이 식객들에게 저마다 문장 짓게 하여 팔람(八覽), 육론(六論), 12기(12紀) 등 모두 20여 만자에 이르는 책을 펴냈는데 이책을 천지, 만물, 고금의 사건을 모두 망라했다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이름 붙였다.

여불위는 이 책에 대한 자신감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함양 시장 문에 걸어놓고 그 위에 천금을 놓은 뒤 “누구든 이 책에서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사람이 나온다며 이 돈을 주겠다.”라는 내용의 방을 내걸었다. 여기서 빼어난 문장을 가리키는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는 성어가 나왔다.

노애의 오만함, 여불위의 몰락

정의 생모인 조희는 성욕이 왕성한 여성이었다. 그렇기에 장양왕이 죽고,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여불위뿐이었다. 조희는 기회를 보아 여불위와 불륜관계를 맺었고, 이것이 언젠가는 자신에게 큰 화가 되리라 생각한 여불위는 타개책을 마련했다.

그것은 바로 남근(男根)이 유달리 큰 노애(嫪毐)라는 사내였다. 여불위는 노애를 가짜 환관으로 만들어 조희 옆에서 시종을 들게 했고, 조희는 노애와 사통하며 그를 무척 아꼈다. 그러다 결국 노애의 애까지 배게 된 조희는 꾀를 내어 (雍) 땅으로 거처를 옮겼다. 노애는 이 땅에서 장신후(長信侯)로 봉해져 산양(山陽)의 땅을 받고, 태원군(太原郡)을 봉지로 받아 급속하게 권력을 강화했다. 왕조의 일도 본인이 처리하고, 하인이 수천 명에 이르니 노애도 욕심이라는 게 생겼다. 자기의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삼고자 했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 기회를 잡았다.

B.C 238년 진왕 정은 옛 수도 옹에서 가관의 예를 행하러 갔는데, 이때를 틈타 노애가 정이 머무는 궁전을 기습한 것이다. 이미 밀고를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정은 기습에 반격하고, 함양에서 노애의 반란군을 제압하고 노애의 3대를 멸하고, 노애와 조희 사이에 나온 두 아들을 죽였다. 이 과정에서 노애를 가짜 환관으로 들인 것이 여불위의 계획이었음이 드러났다.

정은 이를 빌미로 여불위도 죽이려 했지만, 선왕을 모신 공적을 높게 취하고 빈객과 유세객 대부분이 여불위를 변호했기에 상국 지위를 파면하는 데 그쳤다.

보이지 않는 미래, 눈앞에 놓인 독주

진시황은 권력이 자기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하지만, 하남으로 추방된 여불위에게 자꾸 빈객들이 모이는 것을 고깝게 생각했다. 특히 여씨춘추에서 밝힌 여불위의 사상은 진시황과 너무나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고 천하의 천하이다.”라는 여씨춘추의 말을 빌려 여불위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게다가 여불위를 복직하라는 상소마저 끊이지 않고 올라오자 여불위를 반란의 씨앗이라고 여긴 진시황은 결국 글을 하나 내린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내렸단 말인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관계가 있기에 중부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는가? 즉시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라.”

이 글을 보고 자신의 시대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 여불위는 그동안의 부귀영화가 물거품과 같이 허사였다는 것을 깨닫고,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독주를 마시고 자결했다.

평가

긍정적 평가

사업가의 관점에서 여불위에게 배울 점은 너무나도 많다.

숨겨져 있는 고부가가치를 찾는 능력: 여불위가 조나라에서 인질따위나 하고 있던 자초에게서 그의 미래를 내다본 것. /가치 있는 사업 아이템을 위해 모든 것을 투자할 수 있는 배짱: 자초를 태자로 만들기 위해 자초에게 직접 투자자금도 주고, 본인의 애첩도 주고, 화양부인이나 관리에게 뇌물을 제공한 것./ 상대의 배경 지식을 미리 파악하여 그의 심리를 휘어잡는 지략: 화양부인이 아들이 없는 점을 파고들어 그녀의 후사가 있어야 관련인 모두가 오래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 것. 

이 외에도 수많은 그의 능력이 현시대에서도 필요한 능력을 두루두루 겸비하고 있다는 평이 있다.

부정적 평가

공자(孔子)는 여불위를 문자(「聞」者: 명성만 좇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라고 말하며,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공자는 논어(論語) 안연(顏淵) 편(篇) “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에서 인용하였는데 자세한 말은 다음과 같다.

“명문(名聞:명성)이라는 것은 겉으로는 인을 취하는 체하면서 행동은 그와 다르며,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인을 자처하여 의심받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나라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드러나고 집안에서도 반드시 이름이 드러난다.”

즉 공자는 여불위를 명성만 좇아가고 언행이 불일치한 부덕한 인물이라고 봤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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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마천, 『사기열전 上』, 최익순 옮김, 백산서당, 2014.
  • 사마천, 『그림으로 이해하는 사마천의 사기』, 김학선 옮김, 평단, 2003.
  • 시마자키 스스무, 『단숨에 읽는 사기』, 전형배 옮김, 창해, 2014.
  • 이중톈, 『이중톈 중국사 5 춘추부터 전국까지』,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