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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왕망의 등장과 신의 설립

왕망(王莽)은 원제 황후의 동생인 왕만의 아들이었다. 왕소군이 장안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제는 세상을 떠났고, 아들 유오가 황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바로 성제(成帝)이다. 그는 무도한 황제로서, 나라 정사를 전혀 돌보지 않았고, 그리하여 조정의 대권을 그의 외척이 서서히 장악하게 되었다.
왕망은 왕씨 일족이면서도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성제의 어머니인 황태후 왕정군한테는 여덟 동생이 있었는데, 그 중 왕봉의 지위가 제일 높았으며, 대사마에 대장군까지 겸했다. 왕봉이 조정 대권을 틀어쥐자 그의 형제와 조카들은 모두 교만해져서 가는 곳마다 위세를 부렸다. 그런데 오직 왕망만은 그들과 달랐다. 왕봉이 죽은 다음, 그의 직위는 다른 형제 둘이 이어받았다가 나중에 왕망한테로 넘어갔다.이를 계기로 순조롭게 관리로 승진을 거듭해 B.C.8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대사마의 지위에 올랐다.(그가 기원전 1년에 섭정을 시작하기 전부터 그의 집안은 이미 세 숙부와 한 사촌형이 대사마와 대장군 지위에 있으면서 28년 동안이나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성제가 죽은 다음 10여 년 동안 한나라 조정은 황제를 한제, 평제 이렇게 두 명이나 갈아 치웠다. 평제는 9세에 즉위해서 나라 대사는 왕망이 모두 주관하게 되었다. 아첨을 일삼는 대신들은 왕망이 한나라를 안정시킨 공신이라고 추켜세우며 높은 직위로 책봉해야 한다는 상주서를 황태후에게 올렸으나, 왕망은 이를 사양했다.

평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린 후, 며칠 뒤 평제는 숨을 거두었고, 왕망은 유씨네 종실에서 두 살배기 아기를 데리고 와 황태자로 삼았고, 왕망은 스스로 가황제라 칭했다. (이때의 아기가 바로 유자영이다.) 줄곧 겸양하기로 이름이 났던 왕망이었지만, 이때에 이르러서는 겸양이 없었다. 그는 참위설을 이용하여 자신의 즉위가 하늘의 뜻이라는 여론을 조작하여 진천자가 되었다.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는 등 신비주의적 작태를 조작하여 자신을 천명 받은 자로 부각시킨 후, 유영이 자신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형식으로 황위에 올랐다. 결국, 그는 8년에 정식으로 황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신(新)으로 고쳤으며, 도읍을 장안으로 정했다.


개혁

당시의 상황

왕조의 기반은 엄청나게 넓은 농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이 같은 사회 구조에 맞추어 농민 대중을 근본으로 삼는다는 정신으로 정치를 펼쳐야 했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제국이 수립된 지 200년 이상이 지난 때였고, 이 무렵에는 내정(內廷)이라고 불린 측근과 외척들이 온갖 음모에 말려들어, 외정(外廷)이라고 불린 그 밖에 조정 대신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제국의 기본적인 과세와 징병의 대상이었던 일반 농민의 토지와 노동력이 차츰 지방 호족들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추세를 보였다. 겸병(兼倂)이라고 불리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지방의 자원은 중앙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전의 농업 제도

토지세는 모두 무(畝)단위로 징수되고, 인두세도 사람 수에 따라 징수되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비록 소유권이 바뀐다고 하더라도 징수되는 세금의 총액에는 변화가 없어야 옳았다. 그러나 아주 오래전에 작성된 농촌의 토지대장이 그 후로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정기적으로 개정되지 못하면서, 누락되는 인원이 생겨났다. 이 때의 중국은 호구를 단위로 과세했기 때문에 인구의 변동이나 재산의 소유권 이전으로 인해 정해진 세금을 온전하게 징수하지 못했고, 결국 세입이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방 정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징수할 세액을 다른 호구로 편입시켜 그 차액을 채우는 방책을 마련했으나, 그렇게 되자 도망자만 늘어나 결손액이 더욱 커졌고,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에는 세액을 감면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이 방법은 관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부작용도 있었다.

개혁과 실패

왕망은 즉위하면서 여러 방면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유가의 경전을 근거로 관명을 고치고 서주 시대의 제도를 부활시켰다. 따라서 왕망의 개혁을 총칭하여 탁고개제(托古改制)한 복고 정치라 부른다. 유교 경전을 중시한 왕망은 주대를 이상으로 삼아 《주례》에 의거해 왕전제를 실시하여, 전국의 토지를 왕토로 국유화시켰다. 대토지의 노동력인 노비에 대해서도 제한을 가하여 노비매매를 금지했으며, 무제 이후 표준화폐 역할을 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켰다. 그러나 왕망의 개혁은 전국시대 이후 이상화된 유가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한 탁고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에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정치와 사회, 경제에 많은 혼란을 초래했다. 서주를 이상화해 시행한 대폭적인 관제의 개혁이나 관명과 지명의 명칭변경은 행정의 비효율로 이어졌고, 오수전의 폐지는 경제 면에서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또한 주변 이민족을 멸시하는 왕망의 정책은 흉노, 고구려와의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고, 전반적인 계획과 준비도 없이 성급하고 즉흥적이었던 왕망의 개혁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개혁의 구체적 내용

- 경제 정책으로서, 농지와 노비를 국가 소유로 돌리는 한편, 그 사적인 매매를 즉각 금지하고 나섰다.

- 금융 정책으로서, 베는 물론 거북의 등껍질까지 화폐로 지정해서 유통했는데, 이것들이 금, 은, 동전과 함께 통용되는 바람에 화폐제도가 복잡해졌다.

- 관료 조직의 상층부는 왕망의 전면적인 인사 조치로 크게 재편되었지만, 기층 조직은 명칭이 바뀐 것 말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 정책 집행을 위해 비밀경찰을 광범위하게 활용했다.

- 정부의 전매 물품을 계속해서 늘렸고, 은행 업무와 같은 여러 사업은 정부가 경영하도록 바꾸었고, 이러한 범위를 계속 확대해나갔다.

왕전제

주나라의 정전제를 모범으로 삼아, 모든 토지를 국가의 소유, 즉 왕전으로 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고르게 분배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은 전한 중기 이후 점차 확대되어 온 대토지 경영의 폐단에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것이었으며, 중국 최초의 토지 균분제, 혹은 국유제의 실시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그의 이상적인 개혁은 관념적이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현실에서 힘을 얻기 어려웠고, 결국 3년 만에 폐지되었다.

대외 정책

왕망은 대외 정책 면에서 중화사상을 내세워 주변 제국의 왕들을 후로 격하시킴으로써, 각국의 이반을 초래하고 사회 혼란을 가중했다. 고구려를 하구려로 바꿔 부른 것 때문에 고구려와 충돌하기도 했고, 한동안 잠잠하던 흉노를 격분시켜 북방에는 다시금 전운이 감돌기도 했다. 왕망은 3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흉노 정벌을 감행했는데, 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했고, 민심이 돌아서는 계기가 되었다.

신의 멸망

반란과 신의 멸망

신(新) 말기에 왕망에 대한 불만이 터지면서 왕망에 반대하는 봉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먼저 18년에 산둥에서 적미(赤眉)의 난이라는 굶주린 농민의 반란이 일어났다. 호북의 녹림산에서도 여러 지방의 유민들이 모여 왕광과 왕봉을 지도자로 ‘녹림당’을 만들었다. 한나라 황실의 후예인 유연(劉縯)과 그의 아우 유수(劉秀)도 용릉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앞서 봉기한 반란군이 모두 유연 등의 군사에 합류해서 따랐다. 유연은 녹림병과 함께 유현을 한 황제로 추대하여 연호를 경시(更始)라 하고, 완(宛)에 도읍을 정하였다. 유수의 군대는 23년에 곤양(昆陽)에서 1만여명의 부하를 이끌고 백만 대군의 왕망의 군대와 맞서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중국 전쟁 사상 최소의 병력으로 엄청난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해진 ‘곤양의 싸움’이다. 이후 유수의 군대가 왕망을 죽임으로써 신은 16년만에 멸망되었다.

적미군과 녹림당

적미군과 녹림당으로 대표되는 농민 반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번승을 우두머리로 한 북방의 농민군은 눈썹을 붉게 칠해 관군과 구별했기 때문에 적미군으로 불렸는데, 도가적 경향이 강한 비밀 결사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왕광, 왕봉이 이끄는 농민군은 호북성 녹림산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녹림당으로 불렸다.

평가

오늘날 왕망은 음흉하고 위선적인 찬탈자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지만, 이상주의자, 개혁가, 혁명가, 최초의 국가 사회주의자라고 떠받들어지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그의 개혁 내용을 위주로 평가한 사람들과 그의 즉위 과정을 위주로 평가한 사람들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본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이윤섭, 『왕망』 , 아이필드

레이 황, 『중국, 그 거대한 행보』 , 경당

안정애,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풍국초, 『중국사 상하오천년사(1)』, 신원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