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회(李悝)
출생 B.C 455
사망 B.C 395
생존시기 전국시대

개요

이회(李悝)의 悝는 리, 회, 괴로 읽히는데, 이회 또는 이괴로 불린다. 悝는 보통 kui로 읽으므로 중문은 lĭkuī로 발음한다. 이회(BC455~395년)는 하남(河南) 복양(濮陽) 사람이다. 그는 전국시대 위나라의 변법을 주재하였던 정치가이며 법가의 대표인물이다. 그는 다양한 정책을 통해 백성들의 생산활동을 장려하였으며, 흉작에 대비하여 다양한 종류의 경작물을 재배하도록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법치를 실행하여 귀족들의 특권인 세경제록(世卿世祿)제도를 폐지하였으며, 국가에 공을 세우는 자에게 상을 주었다. 그의 이러한 시도로 인해 위나라는 전국초기에 강대국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는 각국의 법률을 모아 <법경>(法經)을 편성하였으며, 이는 고대 중국 최초의 완성도 있는 법전이다. 그의 중농(重農)과 법치(法治) 사상은 상앙한비자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회의 법가 사상

예법을 반대하다

이회는 법을 중시하지만, 유가의 “예법”을 반대하는 입장이다. 당시 신흥 지주 계급이 경제와 정치적 이익을 독점하는 세습 특권에 반대하여 토지의 사유와 노동, 재능에 따라 공평한 방법으로 관직을 수여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귀족의 특권을 보호하는 국가 규정의 예법을 낙후되고, 불공평한 것으로 여겼다.

법의 역할

이회가 중시하는 법의 역할은 두개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 역할은 정분지쟁(定分止爭), 명확한 소유권이다. 소유권이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있다면, 더 이상 쟁탈할 수 없고, 쟁탈하려 하더라도 법에 위반되기 때문에 제제를 받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역할은 흥공구폭(兴功惧暴),공로자를 흥하게, 폭도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다. 즉, 전장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을 격려하면서 법을 따르지 않는 폭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이다. 공로자를 흥하게 하는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부국강병과 통일을 위한 전쟁의 승리를 얻기 위한 것이다.

이회의 변법

변법 시행의 배경

이회가 살았던 시기는 전국 초기로써, 노예제가 저물고 봉건제가 새롭게 떠올라, 사회 경제 생활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위와 같은 전면적인 경제 기반의 변화는 곧 사회 고위층의 변화를 의미했다. 봉건제를 기반으로 수립된 새로운 정권은 노예제 귀족 세력의 거센 반대를 직면해야 했다. 경제 기반을 공고히 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과 노예제 귀족의 복권 운동을 저지하고 신흥 지주 계급의 정치를 확보의 일환으로 전국 초기의 각 국가들이 변법 운동을 전개했다.
변법 시행 이전, 위나라 밖으로는 제후 간의 전쟁 양상이 나날이 치열해지면서 외부의 군사 압력이 날로 커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위나라 경제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어 개혁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다. 위 문후는 대내외적 문제를 해결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이회를 재상으로 삼고, 이회는 적극적으로 전국 단위의 변법 운동을 전개한다.

정치적 개혁

이회는 정치적으로 세습 귀족의 특권 폐지와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골라 등용하는 방식, 공정하고 명확한 기준에 따라 상벌을 주는 제도를 도입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食有勞而祿有功,使有能而賞必行,罰必當”
(음식은 노동을 하여 얻는 것이고 녹봉은 공로가 있어야 얻는 것이다, 유능하면 반드시 상을 받아 하고 벌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이회는 일하지 않으며 녹봉을 먹는 자를 방종한 자(淫民)으로 칭하며 비판하고, 부패하고 낙후된 세습 제도에 반발한다. 세습 제도의 폐지로 부정부패를 누리던 특권층들이 쫓겨나고, 지주 출신의 일반인들이 능력이나 재능으로 선발되어 정계에 입문하여 신흥 지주 계급을 형성하면서 지주 계급 대 노예제하의 기존 귀족의 대립이 시작된다.

경제적 개혁

이회는 경제적으로 토지의 활용의 극대화와 평적법을 강조했다. 이는 중농정책중 하나로써, 토지의 힘(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어 활용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회의 농업 개혁으로 위 나라의 농업 생산은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토지를 최대한 활용하라

이는 사마천사기》 <화식열전>에 ‘무진지력(務盡地力)’으로 요약되는 개혁법으로써, 토지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뜻이다. 이는 자연 조건인 토지의 잠재력과 인간의 적극적인 능동성을 보태어 생산력에 대한 최대한의 효율을 끌어내자는 것이다.
당시 사회는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는데, 이회의 농업 개혁은 이런 사회적 배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농업 경제는 당시 사회 경제에서 주도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풍년이 들면 사회가 안정되고 부유했고, 흉년이 들면 그 반대였다. 하지만, 전쟁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전국 시대 초기에 각 나라의 통치자들은 경제의 중요성보다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거나, 세금을 많이 걷어 국가 재산을 늘리는 데만 혈안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이회의 변법은 매우 획기적이었던 것이었으며, 경제 발전을 기반으로 나라의 힘을 키운 나라는 위나라가 유일했다. 이회는 경제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이해하여 위나라의 재상이 된 뒤, 적극적으로 개혁에 힘쓴다. 이회의 개혁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각 지역에 대한 조사와 위 나라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 낸 결과였다.

"제방을 막아서 사방 100리 땅을 9만 경(頃)으로 만들고, 산과 택지, 읍 가운데 3분의 1을 제거하여 밭 600만 무(畝)를 만들었다. 밭을 부지런히 가꾸면 한 무마다 3 승(升)을 더 수확할 수 있고, 부지런히 하지 않으면 그만큼 덜 수확하게 된다. 그리하면 사방 100리의 땅에서 늘거나 줄어드는 수확량을 다 합쳐 계산하면 180만 석(石;차액)이 된다."                    – 반고,《한서》의 <식화지> 중


이를 통해 이회의 개혁이 상상 속에 있는 것,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행정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회는 생산 조건과 경작 가능한 토지를 세밀히 조사하여 개혁법을 생각해냈다. 또한, 그가 대자연인 토지의 잠재력을 인지하고, 그 힘을 인간이 능동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지했다는 점은 그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그의 경제 전략은 생산에 있어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적극적이고 최대한의 작용을 중시하고 있다. 토지를 최대한 활용하라는 이론은 봉건 사회의 농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평적법

농업생산은 곧 군사력을 의미하고, 이는 나라의 국력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생산량은 경제발전에서 중대한 과제였다. 이회는 단순히 세금을 많이 걷어 농민을 핍박하게 하는 방안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생산량을 파악하여 농업의 현실을 제고한 후, 이를 바탕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평적법이란 곡식을 수요 공급에 맞추어 적절하게 사들인다는 뜻으로써, 쌀 값을 어느 정도 선에서 통제하는 방식으로 백성과 농민을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간단하게 쌀 수매 정책으로 볼 수 있다.

"곡식의 가격이 높으면 백성이 손해를 보고, 낮으면 농민의 이득을 해치는 데, 백성이 손해를 보면 도망치거나, 여기저기로 떠돌고, 농민이 손해를 보면 나라가 가난해진다. 곡식 값이 아주 비싸거나 싸서 일어나는 피해는 마찬가지이므로, 나라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전체적으로 고려하여 백성이 피해 보지 않도록 하면서도, 농사 짓는 이들이 더욱 부지런히 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 반고, 《한서》의 <식화지> 중


이회의 평적법은 땅을 최대한 활용하는 무진지력을 실현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농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종합적인 방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계층 간의 모순을 조정하고 완화하여 안정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방안이었다.
이회는 경제를 탄탄히 하여 나라를 튼튼하게 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불경기에 곡식의 가격이 폭등하면 강제로 곡식의 가격을 떨어뜨리거나, 농민을 압박하여 세금을 더 내게 하는 방법으로 국고만 채우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 현황을 조사하고, 경제 상황이 나빠지고 곡식의 가격이 폭등한 원인을 찾아내어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기 전이었던 전국 시대 초기에 평적법은 경제를 조절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생산을 촉진하는 수단이 되었다. 평적법은 이후 진, 한 시기 봉건 왕조의 균수법(均輸法)(한 무제)이나, 상평창(常平倉)등과 같은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

법제 개혁

이회는 변법을 더욱 더 공고히 하기 위해, 각 국의 형전을 종합하여 <법경>이라는 책을 저술한다. 위 문후는 이를 공포하여 법률로 만들어 봉건 법권을 세우고, 변법을 법으로 보호한다. 법경은 여섯 편으로 나누어지는데, 도법(盜法), 적법(賊法), 수법(囚法), 포법(捕法), 잡법(雜法), 구법(具法)이다. 이는 중국 최초의 성문법으로써, 위 나라가 줄곧 사용하다가 이후, 진나라의 상앙이 이를 바탕으로 진의 율법을 제정했고, 한의 율법은 또 진 율법을 계승하여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이회의 법경이 고대 중국 법률 역사에서 지닌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차이위치우, 김영수 역, 《5000년 중국을 이끌어온 50인의 모략가》
  •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외부링크

百度百科_李悝
搜狗百科_李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