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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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한 혜제(惠帝)(한 효혜황제 유영)(간체: 汉孝惠皇帝刘盈)(번체: 漢孝惠皇帝劉盈)는 전한 2대 황제로,한 고조 유방의 차남이자 적자 중 장자이며, 모친은 고황후 여씨(여태후)이다. 기원전 210년에서 211년 사이 출생하여 기원전 188년 9월 1일 사망하였다. 재위기간은 BC 195년 ~ BC 188년으로 약 7년간 재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 여태후의 영향력 아래 친정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요절한 비운의 황제로 알려져있다.

유영(刘盈)

출생 기원전 210~211년 경
사망 B.C 188년 9월 1일
전임자 한 고조
후임자 한 소제


생애

한 건국 이전

혜제 유영은 기원전 210년 유방과 여치의 장남으로, 진나라의 사천군 풍읍 중양리의 사람이다.위로는 유방이 외부인(外婦) 조씨에게서 얻은 이복형 유비가 있었다. 사기 고조 본기에 따르면 유방의 관상을 마음에 들어했던 여치의 부친 여공이 부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딸을 유방에게 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영와 노원공주를 낳았다고 한다. 또 고조 유방이 정장이었던 어느 때, 지나가던 노인이 당시 어린아이였던 유영과 노원공주의 관상을 보고 귀인이라 말하였으며, 유영이 장차 여후를 귀하게 만드는 까닭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원전 202년 4월, 항우가 보낸 군대가 패현에 머물던 유방의 가족들을 사로잡도록 했다. 유방의 가족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도망쳤는데, 혜제와 노원공주가 길 위에 있는 것을 본 유방이 그들을 수레에 태웠다. 그러나 곧 초나라 병사들이 유방을 뒤쫒기 시작하자 유방은 더 빨리 추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혜제와 노원공주를 수레 밖으로 밀어 떨어트렸다. 이렇게 혜제는 누이와 함께 부친에 의해 수레 밖으로 3번이나 밀쳐졌으나, 당시 유방을 모시던 하우영이 "비록 위급한 상황이고 말을 빨리 몰 수 없긴 하지만, 어찌 자제분들을 버리십니까?"라고 말하며 항상 내려가 그들을 다시 끌어올려 다시 수레에 태웠으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 건국 이후

기원전 202년 말, 유방이 마침내 항우를 깨트리고 를 함락시키면서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 후 여덟 명의 이성 제후왕과 장수가 함께 한왕 유방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부친 유방의 즉위와 함께 혜제 유영 역시 적자인 장자로서 황태자에 봉해졌다. 그러나 유방은 황태자 유영을 그다지 흡족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이는 유영의 나약하고 부드러운 성품 때문이었다. 온화한 성품을 가진 혜제 유영을 두고 고조는 자신을 닮이자 않았다 여겼고, 대신 스스로 자신과 많이 닮았다고 여겼던 3남이었던 유여의를 내심 황태자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유여의의 모친이었던 척씨(척희)는 당시 유방이 총애하던 부인이였는데, 이 척부인은 고조를 따라 관동지역에 가서 밤낮으로 소리를 내어 울면서 유영 대신 자신의 아들을 태자에 올려달라고 곡하였다. 이 때에 유영의 모친 여후(훗날여태후)는 나이가 많아 항상 머물러 지키며 황제를 만날 기회가 드물었기에, 황제에 가까이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기원전 198년, 유영의 외삼촌 여택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유여의가 조왕으로 봉해지고 나자, 상황은 더욱 심화되어 혜제 유영은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위기를 여러번 넘겼으며, 많은 대신들이 이 문제에 대해 논쟁하였다. 이 때 장량이 계책을 내었고, 혜제는 그의 계책을 따라 당시 고조 유방이 간곡히 요청했으나 출사하지 않은 상산의 네 은자를 초청해 냈다. 이 일로 황태자 유영을 좋게 평가한 고조는 마음을 바꾸었고, 결국 유영은 황태자 지위를 사수할 수 있었다.

즉위 이후

[고조 12년] 4월 갑신일, 고조 유방이 장락궁에서 붕어하자, 태자였던 유영은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아 즉위하였다. 유영의 형이지만 적자가 아니었던 유비는 제왕이 되었고, 혜제의 태자 자리를 위협했던 유여의는 조왕이, 이 외 유방의 아들 다섯 모두 왕의 칭호를 받았다.

자신의 아들인 여태후는 혜제가 즉위하자마자 지난날 혜제의 자리를 위협했었던 조왕 유여의를 해치고자 했다. 그래서 혜제를 폐하고 자신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 수십번 곡하였던 척부인을 영향에 가두고는, 조왕 유여의를 불러들였다. 그러나 조나라의 승상 건평후 주창은 병을 핑계로 사자를 돌려보냈으나, 여태후는 주창을 불러오게 한 후 조나라에 다시 사신을 보내 주창이 없는 틈을 타 조왕을 불러오도록 했다. 이때, 인자하고 온화한 성품의 혜제는 모후의 분노를 잘 알고 있었고, 조왕이 여태후를 만나기 전 패상에서 몸소 이복형제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함꼐 궁궐도 들어가 조왕과 함께 기거하였고, 음식도 함께 먹었다. 때문에 여태후는 조왕을 죽이려고 해도 죽일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조왕은 잠시동안 여태후의 분노를 피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혜제는 이복형제의 목숨을 비호했다.

[효혜제 원년] 12월, 혜제가 활을 쏘기 위해 새벽에 자리를 비웠다. 이때, 조왕은 아직 나이가 어려 일찍 일어날 수가 없었고, 혼자 혜제의 궁에 남아있었다. 여태후는 조왕이 혜제과 같이 있지 않고 혼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을 시켜 짐독을 탄 술을 가지고 가서 조왕에게 먹이도록 했다. 날이 밝을 무렵 활쏘기를 마친 혜제가 다시 거처로 돌아와 보니, 조왕은 이미 죽어있었다. 이에 곧 화양왕 유우를 옮겨 조왕으로 삼아 대신하게 했다.

여태후가 끝내 척부인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게 하는 약을 먹여 돼지우리에 살게 하였으며, 그를 '사람돼지(인간 돼지)'라고 부르게 했다. 며칠이 지나 혜제를 불러 이 '사람돼지' 를 구경하게 했는데, 혜제는 보고 묻고나서야 이 처참한 꼴을 한 이가 척 부인임을 알고 큰 소리로 울었다. 이날로 혜제는 이 일로 인하여 병을 얻었고, 1년이 넘도록 일어나지 못하였다.

혜제는 여후에게 사람을 보내 간청하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태후의 아들로서 결국 천하를 다스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혜제는 이날로 부터 술을 마시고 음란한 즐거움에 사로잡혀 살았다. 또한 스스로 말한 대로 정사를 듣지 않았으며, 병을 가지고 살았다.

[효혜제 2년] 초 원왕 유교와 제 도혜왕 유비가 조회를 위해 왔다. 10월, 혜제는 제왕 유비와 함께 여태후 앞에 연회를 열었다. 이때 술자리에서, 비록 이복형이며 적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제왕을 형으로 여긴 혜제는 제왕을 윗자리에 앉게 하였고, 황제의 법이 아닌 집안사람의 예에 따라 주연을 즐겼다. 이에 여태후는 진노하여 짐독을 탄 술 두잔을 제왕 앞에 놓도록 명하고, 제왕으로 하여금 일어나서 장수를 기원하는 인사를 하도록 했다. 제왕이 일어나 인사를 하려 하는데, 혜제가 함께 일어나 함께 인사하고 술잔을 들려 하였다. 이에 여태후는 두려워하며 직접 손을 들어 술잔을 쳐 버렸고, 혜제는 이날의 사건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이날의 일을 두려워한 제왕은 자신이 가진 봉토를 태후에게 바쳤고, 그 다음으로는 태후소생의 공주를 높여 겨우 제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효혜제 3년] 장안성 축조가 시작되었다.

[효혜제 4년] 장안성의 절반이 지어졌다.

[효혜제 5-6년] 장안성이 완공되었다. 제후들이 조회를 위하여 왔다. 10월, 조회에서 혜제가 치하하였다.

[효혜제 7년] 가을, 8월 무인일, 혜제가 붕어하였다. 발상하는 동안 태후는 눈물없이 소리내어 곡했다.


평가

사마천은 사기를 기록할 때에 2대황제인 혜제 유영을 본기에 넣는 대신 그 모친인 여태후를 주인공으로 넣었다. 때문에 그렇게 작성된 '여태후본기'에는 초반에만 혜제의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주로 혜제 사후 여후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내용이 주로 담겨있다.

사마천은 사기 여태후본기에 마지막에 혜제와 당대에 대해 이와 같이 덧붙였다.

"효혜황제와 고후의 재위 시절, 백성들은 비로소 전국시대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군주와 신하가 전부 쉬면서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혜제는 팔짱만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고후가 여주인으로 황제의 직권을 대행에 정치가 방안을 벗어나지 않았어도 천하는 편안했다. 형벌이 드물게 사용되어 죄인이 드물었다. 백성이 농사에 힘쓰니 옷과 음식은 더욱 풍족해졌다."


참고문헌

관련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