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 백가쟁명
목차
백화제방ㆍ백가쟁명의 어원
쌍백운동
백화제방(百花齊放)이란 온갖 꽃이 만발하여 수많은 학설이 자유롭게 토론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말하며, 백가쟁명(百家爭鳴) 또한 수많은 학자나 학파가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중국 역사상 사회적,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웠던 춘추전국시대때 등장한 제자백가들이 서로 토론하고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백화제방ㆍ백가쟁명은 1950년대 마오쩌둥에 의해서 중국사회에 다시 등장하게 되며 쌍백운동(雙百運動)으로도 불린다.
백화운동(白話運動)
백화제방ㆍ백가쟁명과 비슷한 의미로 보이지만 백화운동(白話運動)은 중화민국 초기의 문학운동으로 지식인이 독점해 온 문어문(文語文)을 배제하고, 구어문(口語文)인 백화문(白話文)으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려던 운동이며 문학혁명으로도 불리었다.
쌍백운동의 배경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
1949년 10월 3일, 신중국은 소비에트 연방(소련)과 국교를 수립하게 되고, 1950년 2월 14일에는 마오쩌둥과 스탈린이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中蘇友好同盟相互援助條約)'을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양국은 우호 협력 정신을 가지고 소비에트 연방과 중국과의 경제적 및 문화적인 제휴를 강화하고 상호간 가능한 모든 경제원조를 제공하며, 아울러 경제적으로 필요한 협력을 하기로 약속한다.' 따라서 이 조약은 중국과 소련이 신중국 초기부터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고, 중국이 제1차 5개년계획의 계획안을 수립할 때 소련이 중국의 계획안 작성과 수정에 상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소련식 공업화와 제1차 5개년계획의 결과
중국의 제1차 5개년계획은 소련의 경제계획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소련의 제1차 국민경제 5개년 발전계획은 공업화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이 공업화 과정에는 다른 국가들이 50~100년을 소요했던 과정을 10년 동안에 극복하고 기술적인 면에서 이들 국가를 따라잡는 다는 과제가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급진적인 경제계획, 공업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앙집권적인 계획경제가 수반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중앙집권적 계획경제는 국가와 사회의 관료화와 규칙화를 전제로 한다. 따라서 이러한 소련의 경제계획에 영향을 받은 중국의 제1차 5개년계획은 국가와 사회의 관료화와 규칙화, 그리고 권력의 집중과 같은 문제를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행정기구가 복잡해지고 점점 더 전문화 되었으며, 혁명정당의 간부들은 행정가와 기능적 관료로 바뀌었다. 또한 대규모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키고 효율적으로 운영하려면 고도로 전문화된 분업체계가 필요하였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숙련된 공장 관리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공장 관리자의 역할은 위로부터 내려온 중앙정부의 지시를 책임지고 이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제1차 5개년계획은 경제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끝났을지 모르나, 중국사회의 모습은 중앙집권화와 수직적인 관료주의가 지배하는 소련의 국가구조를 매우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에 의한 쌍백운동의 등장
소련의 기술적 경제적 원조를 기반으로 한 제1차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면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중국이 거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해가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사유재산이 폐지되고, 국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통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한 사회주의 사회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사회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은 마오쩌둥의 관점에서 볼 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 제1차 5개년계획기간 동안 대규모 공업을 급속히 발전시키고 효율적으로 통제하면서 고도로 전문화된 분업체계가 발달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엘리트가 출현하게 되었고, 국가와 당 조직구조가 혁명적 조직구조에서 관료적 지배구조로 바뀌게 된 것이다. 즉, 사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관료국가기구의 성장이 마오쩌둥의 입장에서는 진정한 사회주의 국가로의 이행에 반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보수적이고 관료화 된 당 지도부와 당 기구는 마오쩌둥이 주장한 급진적 사회경제정책에 점점 더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마오쩌둥은 점점 보수화되고 관료주의로 퇴행하는 당의 혁명 정신을 부활시키는 방법으로 당 외부에서 당을 비판하도록 하였고, 그 임무를 인텔리겐치아인 지식인들에게 맡겼다.
쌍백운동의 전개
"百花齊放, 百家爭鳴" 슬로건의 등장
1955년 후반 당 지도자들은 공업화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자신들의 계획을 순탄하게 이끌어줄 지식인 계층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오쩌둥 또한 자신의 새로운 농업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이 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百花齊放, 百家爭鳴"이라는 슬로건이 등장하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1956년 1월 당 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저우언라이는 <지식인 문제 관한 보고>를 통해 당은 그간 사회주의 사회에서 모호한 위치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에게 계급적 지위를 부여하고 불필요한 의심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마오의 입장에서는 저우언라이의 연설이 또다시 새로운 계층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으나, 지식인에 대한 당의 새로운 움직임이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을 줄이는데 필요하다는 생각은 일치했다.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당 관료들은 지식인들을 경제적인 목적을 위한 것으로 생각한 것에 비해, 마오쩌둥은 경제적인 목적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이용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지식인들을 자신이 즐겨쓰는 대중운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마오의 계획은 흐루시초프 보고의 여파로 1955년 "百花齊放, 百家爭鳴" 슬로건 등장 이후 1956년 5월 2일 최고국무회의에서 그 슬로건이 다시 부활할 때까지 미루어 졌다.
제한적 자유의 쌍백운동
1956년 5월 2일 마오쩌둥은 최고국무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언급하였다. 사실 마오쩌둥이 "백화제방, 백가쟁명"을 다시 부활시킨 이유는 지식인들에게 사상적, 정치적 자유를 부여하려는 의도보다는 지식인들의 비판을 통해 관료주의로 물든 당의 활력을 회복시키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중앙위원회 선전부장 루딩이(陸定一)는 5월 26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연설에서 지식인들에게 독립적인 사고의 자유, 논쟁의 자유, 창작과 비평의 자유, 자기의 의견을 발표·견지·유보할 수 있는 자유를 선언했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자유는 작품의 사회적·정치적 내용까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는 아니었다.
백화제방과 백가쟁명을 하나로 묶어서 보지만 둘은 분명히 구분된다. 백가쟁명은 과학자에게, 백화제방은 작가와 예술가에게 적용되는데 백가쟁명은 주로 자연과학을 다루기 때문에 계급성 문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반면에, 백화제방은 작품형식, 제재 선택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완전한 자유가 허락된 것이 아니었다. 훗날 반우파투쟁에서도 주로 탄압을 받은 것은 백화제방의 작가와 예술가들이었다.
그러나 루딩이의 연설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은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루딩이의 연설은 인민과 반혁명분자의 구분이 모호했으며 지식인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는 비판으로 인해 훗날 반혁명분자로 분류될 것을 걱정하였다. 또한 지식인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당 관료들은 백화운동에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비판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지식인
사실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입장에서 가장 개조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계층이었다. 그래서 해방직후부터 지식인들은 당의 노선을 따르도록 끊임없는 사상개조를 받았고, 개조되지 않는 지식인들은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지식인들에게 당을 비판하라는 마오쩌둥의 선언은 지식인들의 마음을 쉽게 열리 없었다. 또한 당 기관과 고위관료는 처음부터 백화운동에 반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상 업무에서 당 관료들은 지식인들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백화운동 초기의 지식인들의 당 비판은 지식인들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였다.
마오쩌둥의 연설과 쌍백운동의 확산
1956년 "百花齊放, 百家爭鳴" 슬로건이 재등장하자 그해 여름 지식인들이 관료주의의 병폐 등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비판과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당 자체에 대한 비난도 그 중 일부이다. 이렇듯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당 관료와 기관은 이 운동에 반대하였고, 그들은 지식인들을 우경주의로 비판하였다.
1956년 말 당이 지식인들을 우경주의로 비판하자 백화운동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1957년 2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올바르게 처리하는 문제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발표하였다. 이 연설에서 마오쩌둥은 공산당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인민대중이 당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속에서도 계급투쟁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이는 사상투쟁의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하였다. 이 연설을 통해 마오쩌둥은 인민의 대표로서 당의 외부에서 당을 바판하는 입장이 되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이미 적대화 되어 있는 지식인들은 마오쩌둥의 요구에 거의 움직이지 않았고, 이에 마오쩌둥은 중앙위원회에 백화운동을 공식적으로 승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당 관료들과 간부들에게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에 간섭하지 말라는 명령이 하달되자 소극적이었던 지식인들의 의사표시는 다시 점점 더 대담해졌고 당과 고위 관료들에 대한 비판의 수위가 더 높아졌다. 처음에는 온건하고 사소했던 비판의 내용들이 나중에는 당원 개개인에 대한 책임추궁 뿐만 아니라 당 제도 까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생들은 더욱 투쟁적으로 그들의 의견을 표시하였다. 학생들은 대학교 사무실을 점거하고, 정부와 당의 건물을 공격하고 또한 당 관료를 인질로 잡았다. 부활한 백화운동에서 당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공산주의가 사회주의의 원칙을 실천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전제를 지키지 못하고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여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개하였다는 것이다.
쌍백운동의 결말 - 반우파투쟁
마오쩌둥이 지식인들에게 요구한 것은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의 당과 고위 당원들에게 만연해 있는 관료주의의 모습을 비판해달라는 것이지, 당의 체제 자체를 비판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1957년 6월 8일 『인민일보』에서 지식인들의 신랄한 비판을 듣고 있던 당 기관은 사회주의 체제 자체를 비판한 지식인들을 ‘우파’로 규정하면서 ‘우파’가 사회주의와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자유를 남용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마오쩌둥도 2월 연설의 수정본을 6월에 출판하여 “향화와 독초”를 구별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지식인들의 비판이 허용 가능한 범위를 벗어났다고 하였다. 인민일보의 사설과 마오의 수정본은 백화운동의 종말과 함께 우파 척결을 위한 반우파투쟁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백화운동에 참여했던 지식인들과 특히 민주정당의 지도자들에게 신랄한 자기비판을 강요하였다. 5월과 6월에 백화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가했던 학생들은 이전 사회에 잔존했던 옛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으로 약한 처벌을 받았다. 일부 학생지도자들이 노동을 통한 개조를 위해 농촌으로 보내졌을 뿐 대부분은 당의 감독 아래 학교에 남을 수 있었다. 이후 각 신문사에는 우파를 비판하는 사설이 계속해서 실렸으며, 백화제방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문인들이 숙청되었다. 마오파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당내 우경 기회주의자들을 숙청하고 당을 장악하였다.
쌍백운동을 바라보는 관점
마오쩌둥은 “백화제방, 백가쟁명”이라는 구호 아래 지식인들을 비판의 장에 끌어들였다. 하지만 결국 마오쩌둥은 자신이 끌어들인 지식인들을 ‘우파’로 규정하며 오히려 그들을 다시 비판하고 탄압하였다. 이 과정을 두고 마오쩌둥이 중국 사회에 남아있는 ‘우파분자’들을 척결하기 위해 일부로 백화운동을 실시하였는지, 아니면 마오쩌둥 본인도 지식인들의 비판의 수위를 예상하지 못하여 결국 백화운동의 종말을 고하였는지의 마오쩌둥의 의도에 대한 관점이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또한 확인하기 매우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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