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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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鄭和)

출생 1371년
운남성(雲南省)
사망 1434년
생존시기 중국 영락제(永樂帝) 시기
관련 활동 외교, 탐험

정화(중국어 간체: 郑和, 정체: 鄭和, 병음: Zhèng Hé, 1371년~1434년)는 중국 대의 환관이자 탐험가, 외교관이다. 정화의 본성(本姓)은 마(马)씨이고 이름은 삼보(三保)이다. 마(马)는 이슬람의 예언자 무함마드의 중국식 한자이다. 영락제(永樂帝)의 신임을 받아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太監)이 되었다. 이에 정화는 삼보태감(三保太監/三寶太監)으로 알려져 있다. 정화는 영락제의 명을 받아 일곱 차례의 대원정을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생애

유년시절

대 초, 정화의 조상들이 운남(云南)으로 이사한 것은 원대 운남왕 휘하의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정화는 모험정신이 강하고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조부와 부친 모두 멀고 고된 여정인 메카 순례를 마쳤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현지 백성들로부터 '합지'라는 높임을 받았다. 이는 곧 '순례자'라는 의미이다. 정화의 모친은 성이 온(温)씨였고, 매우 어질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형제자매는 형 1명, 누이 2명으로 화(和)는 2남 2녀 중 막내였다. 그의 가정은 현지에서 매우 존경 받는 집안이었다. 1381년, 주원장이 운남에서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는 원나라 세력을 멸하기 위해, 수하의 부우덕, 남옥 등을 파견,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운남전을 일으켰다. 당시 겨우 11살이었던 정화는 전란 중에 명(明)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세당하고 환관이 되었다. 그 후 남경궁중에 들어가 14세 때 북평의 연왕부에 가 연왕을 섬겼다. 연왕 주디가 보기에 정화가 똑똑하고 영리하여 더욱 곁에 두었다. 연왕의 심복이 되어 곁에서 일하는 측근과 수행원들의 문화수준을 높이기 위해, 주디는 학식이 풍부한 관리을 선발하여 수업을 진행했다. 게다가 그들에게 관 내에 많은 장서들을 자유롭게 읽도록 했다. 자질이 총명하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공부했던 정화는 금새 학식이 깊고 넓어졌다.


정난의 변과 정씨 하성

정화는 체구가 우람하고 지식이 풍부하며 사고력이 빨랐기 때문에 연왕이 임명하여 파견한 그의 사명을 훌륭하게 완성했다. 이에 연왕 주디의 신임을 얻어, “내시 중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특히, 1399∼1402년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으며, 연왕이 조카 혜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렇듯 연왕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정화가 큰 공을 세워 더욱 인정을 받았다. 영락제 2년(1404년) 정월 초하루, 주디가 성(姓)을 하사하고 관직을 임명하는 방식으로 공신에게 하사품과 은총을 베풀었을 때, 정화는 '정(郑)'씨 성을 받았다. 동시에 정 4품 관리와 같은 환관의 우두머리 격인 내관감 태감직에 올랐다. 역사상 삼보태감(三寶太監)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정화가 자신의 거세된 음경과 불알을 보석으로 장식된 작은 궤에 넣고 몸에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 즉, 삼보태감(三寶太監)이라는 별명은 세 가지 보물(음경, 불알, 궤)을 지니고 다닌다고 해서 붙여졌다. [1]내관감은 환관들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황실 일족의 사생활을 보좌하고 각종 토목과 건축 공사, 집기 구매 등 궁내의 다양한 업무를 관장하는 실세였다.


남해대원정과 죽음

정화의 항해 일생을 보면, 영락 원년에 시암(태국의 옛 명칭), 일본(영락 2년), 이어서 7회에 걸친 서양 원정 항해의 칙명을 받들었다. 이를 모두 합하면 아홉 차례 외국으로 나간 것이다. 1433년(선덕 8년 계축년)) 제7차 마지막 ‘하서양’을 마치고 귀국하던 중 62세로 객사하였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랜 원정으로 인한 ‘과로사’라는 설이 있다. 어쨌든 인도 캘리컷에서 사망했으며, 그곳에서 죽은 후 중국 난징 중화문 밖 뉴서우산(牛首山) 자락에 묻혔다고 전해진다.


신앙

이슬람교

정화는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다. 그의 조부와 부친 모두 독실한 무슬림 순례자여서 일찍이 메카 순례를 했다. 정화는 일찍이 천주시 영산에서 이슬람교 선현의 무덤에 분향하고 예배를 올렸다. 천주 남안에 이르러서는 9일 동안 이슬람교 사원에서 기도했다. 영락 11년(1413년), 정화는 시안 이슬람 사원을 재건했다.


불교

정화는 도연스님 보살계 제자이다. 스스로 이르기를: “명나라 불교신자 내관 태감 정화, 법명은 속남불타, 즉 복이 길하다”, “진심으로 삼가 재물, 목숨, 공로를 바쳐 대장경을 만들어 총 635함을 운남 오화 사당에 헌납하여 영원히 장생을 공양한다.” 서쪽 바다로 가는 도중, 정화는 불교국가가 있을 때마다 사원에 헌물했다.


도교

선원 대다수가 도교와 중국 민간신앙을 믿었기 때문에, 특히 해신(海神) 마조신에 대한 신앙이 더욱 독실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풍습에 따라, 정화는 늘 마조신 사당에 헌금했고, 또한 전당을 증축했다.


사적

외교사절로 시암에 가다

영락원년(1403년), 태감정화 등은 시암(지금의 태국)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광저우 대성양(大星洋)을 거쳐 갑자기 풍랑을 만났을 때, 정화는 마조신(중국 동남부 연해 지역의 전설 속에서, 항해를 관장한다는 여신에게 기도하여 풍랑이 잔잔하였다. 출사(出使) 과정 중에 정화 함대의 주사(舟师)는 길을 따라 자주 침로(針路), 천체도안, 섬의 수세(水勢)와 산형(山形)을 바로잡아 도면을 완성하였다. 정화가 시암에서 돌아온 후, 명령을 받들어 마조신의 묘를 정리하였다.


외교사절로 일본에 가다

정화가 외교사절로서 일본에 파견된 것은 명 왕조의 우호적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다. 명 건국 초기부터 계속된 왜구의 침략과 약탈 행위는 명-일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교류, 나아가 하서양 준비에도 방해가 되었다. 정화는 명 성조에 의해 일본 교토에 파견되었고, 우호협상을 통한 중일관계 전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외교사절로 서양에 가다

제1차 원정

영락 3년 6월 5일(1405년 7월 11일), 천자의 명을 받아 외교사절로 서양에 갔다. 그 해 겨울, 남경 용강항에서 출항하여 태창을 거쳐 바다로 나갔다가 영락 5년 9월 초 이튿날(1407년 10월 2일) 귀국했다. 기록에 의하면, 첫 번 째 하서양에 동원된 사람은 27800명이었다.


제2차 원정

영락 5년 9월 13일(1407년 10월 13일)에 출발하여 브루나이, 태국, 캄보디아, 인도 등지에 갔다가 실론산에서 부처의 치아 사리를 배편으로 가져왔다. 영락 7년 여름(1409년)에 돌아왔다. 두 번 째 하서양에 동원된 인구는 27000명이라고 기록되었다.


제3차 원정

영락 7년 9월(1409년 10월) 태감정화와 왕경홍, 후현 등은 관병 2만 7천 여 명을 거느리고 보주 48호를 운항하여 서양으로 출사하였다. 비신, 마환 등은 9월에 태창 유가항에서 출항하여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 등지에 갔다가 귀국 도중 실론산에 방문하였다. 영락 9년 6월 16일(1411년 7월 6일)에 돌아왔다.


제4차 원정

영락 11년 11월(1413년 11월)에 출발하여 통역관 마환과 함께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서 최초로 동부 아프리카의 말린디를 항해하였다. 영락 13년 7월 초파일(1415년 8월 12일) 귀국했다. 같은 해 11월, 말린디 특사가 중국에 와서 기린을 조공으로 바쳤다. 제4차 하서양에 동원된 인구은 27670명으로 기록되어있다.


제5차 원정

영락 15년 5월(1417년 6월)에 출발하였다. 승려 혜신을 수행원으로 취엔저우를 거쳐 점성, 자바에 도착하였다. 가장 멀리 도달한 것은 동부 아프리카의 모가디슈, 바라와, 말린디 등의 국가였다. 영락 17년 7월 17일(1419년 8월 8일)에 귀국했다.


제6차 원정

영락 19년 정월 30일(1421년 3월 3일)에 출발하였다. 방글라데시로 향할 때 역사에 이렇게 기록되었다.
“일본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중에 함대가 강풍을 만나 전복되어 물에 빠지려 할 때, 배 안에서는 울음소리로 요란했다. 급히 신에게 머리를 조아려 도움을 구하고, 말 소리가 끝나지 않았다. …… 바람이 고요해지고 파도가 잠잠해졌다.”
결국 중도에 돌아와야 했고, 영락 20년 8월 18일(1422년 9월 2일) 귀국했다. 영락 22년, 명 성조는 세상을 떠났고, 인종이 즉위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하서양 활동을 중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제7차 원정

선덕 5년 윤달 12월 초 엿새(1431년 1월), 용강관(오늘날 남경 하관)에서 출항하여 귀항하기 시작한 후 정화는 과로로 인해 선덕 8년(1433년) 4월 초 인도 서해안 캘리컷에서 객사하였다. 시신은 캘리컷에 매장되었고, 함대는 태감 왕경홍이 통솔하여 귀항하였다. 선덕 8년 7월 초 엿새 (1433년 7월 22일) 남경에 돌아왔다. 제7차 하서양에 동원된 사람은 17550명으로 기록되어있다.


대원정 중단 이유

정화의 대원정이 중단된 가장 큰 이유는 국가 재정 때문이었다.[2] 남송 이후 화폐 경제의 발달로 의 수요가 점점 늘어났고, 명대에 이르러서는 국가 재정과 지배층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은이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은의 수요에도 불구하고 원대의 제도를 이어 명대에도 명목상 지폐인 교초를 계속해서 발행하였다. 이에 더해 영락제의 정화의 대원정을 포함한 대규모 정복사업으로 국가 재정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인종은 외정으로 인한 국고 낭비를 피하고자 외교 정책을 수정하였고, 그 아들인 선덕제도 이러한 외교정책을 이어나갔다. 외국과의 교류가 점점 없어지자 아쉬움을 느낀 선덕제가 조공을 받기 위해 정화를 파견한 것이 대원정의 마지막이 되었다. 이후 여러 내우외환을 겪으며 긴축 재정을 위해 대외 팽창 정책은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고, 정화의 항해 기록과 문서가 모두 불태워짐과 함께 대원정도 중단되었다.


하서양의 동기

  • 건문제의 종적을 찾기 위한 조치
    명 성조가 행방불명된 건문제를 찾아내기 위해 정화를 파견하였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정난의 변을 통해 황제에 오른 명 성조가 건문제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해외에서 건문제를 중심으로 자신에 대항하는 세력이 형성될까 우려하였다. 이에 성조는 사람을 파견하여 건문제의 종적을 찾게 하였고, 동시에 다른 나라에 병력을 과시하여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는 일석 이조의 효과를 노렸다.


  • 내환을 없애기 위한 정치적 조치
    명 성조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왕권을 강화를 통한 정치 안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견문제 지지자들의 반역 도모를 위한 이주와 염상의 탈세를 목적으로 한 도피 및 왜구와의 결탁 등은 사회적 불안을 초래하여 명 조정의 통치에 방해만 되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를 안정시키 위해 명 성조는 이들을 귀순시켜 선대를 조직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정화를 중심으로 한 하서양 활동에 동원하여 원양 탐험활동에 종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것이 정화 하서양의 동기를 설명하는 또 다른 주장이다.


  • 주능(朱能) 대군(大軍)의 베트남 정벌 지원 조치
    “본분을 지키고 위반하지 말며, 소국을 깔보지 말고, 약자를 얕보지 말라”라는 외교 원칙을 가졌던 명 성조는 베트남 왕 여창(黎蒼)의 침략확장정책에 반대하였다. 수 차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벌인 여창의 독주를 막기 위해 명 성조는 주능으로 하여금 군대를 통솔하여 베트남을 정벌하게 하였다. 또한 여창이 도주할 길을 차단하기 위해 정화를 파견하였다. 이것이 정화 하서양 추진 동기의 세 번째 주장이다.


평가

외교 성과

30년 간 일곱 차례에 걸친 하서양 기간 동안 각국의 국왕과 사신들이 명에 방문하여 조공을 바쳤다. 뿐만 아니라 외국 상인과 유학생 등도 남경에 와 만 여 명에 달한 적도 있을 만큼 대외교류가 활발했다. 이러한 외교적 성과는 정화 개인의 역량과 당시 명의 정치경제적 상황에서 평가할 수 있다. 먼저, 정화의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전투 경험에서 나온 처세 능력 등은 외교 재능으로써 외교적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국력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명초의 상황과 성조의 적극적인 우호적 외교 정책이 그러한 외교 성과를 낳게 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대원정의 역사적 의의와 한계

정화(鄭和)의 원정대는 “디아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회항했으며,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고, 쿡 선장보다 300년 먼저 호주를 탐사했고, 남극과 북극은 최초의 유럽인보다 400년 앞서, 아메리카는 콜럼버스보다 70여 년 먼저 탐사했다.”[3]

정화의 대원정을 통해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중국의 공예품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 종교와 문화 등이 세계로 전파되었고, 특히 농작물의 이동은 인류 전체에 큰 혜택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정화의 대원정은 소위 퍼주기식 외교로, 실리를 얻지 못하여 경제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 당시 대원정의 목적이 실리적 외교나 무력을 통한 대외 팽창에 있다기 보다는, 조공 관계를 바탕으로 한 평화공존의 원칙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당시 중국이 외국에 하사했단 비단, 자기, 차 등은 조공으로 들어오는 물건보다 훨씬 가치가 높았다. 또한 막대한 비용이 들었던 대원정 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으로 근대적인 관점에서 정화의 대원정은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 대원정 이후 중국에 거대한 변화가 있었다거나, 이를 발전시킨 무언가가 생겨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정화의 대원정의 목적이 무엇이었든 그 형태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띄고 있어 백성의 삶의 질 향상과는 무관하였다. 이는 그저 명 왕조를 위한 일이었으며 민간 무역을 통한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정화의 대원정은 그저 서양인들의 원만한 항해를 위한 길을 닦아주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문화적 영향

미국의 수학가이자 소설가인 Vernor Steffen Vinge의 소설 《A Deepness in the Sky》에서 무역가 조직이 정화라고 명명되었다.


개인작품

  • 실크로드 대지도
    실크로드는 역사상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을 잇는 상업무역의 노선이자 문화교류의 통로이다. 실크로드는 육상과 해상을 모두 포함한다. 명대 《실크로드 대지도》는 간쑤성 자위관에서부터 중동의 메카까지 수천 킬로미터 노선의 주요 성지와 산천지형을 묘사하였다. 게다가 중국어로 자국 내 211개의 다양한 언어를 음역하여 명대 지명을 표시하였다. 또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대륙의 10여 개 국가와 지역을 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궁정화가가 오문화파의 청록산수기법으로 제도하고 완성하여 고대 천리강산도의 모범이라 할 만 하다.


  • 발심서사금자경(发心书写金字经)
    해상 실크로드와 밀접하게 관련된 국보급 예술품은 정화의 서예작품 《발심서사금자경(发心书写金字经)》이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고 현존하는, 정화의 두 번 째 서예이다. 영락제 3년(1405년)에서 선덕제 8년(1433년)에 이르기까지, 정화는 성조와 선종의 명을 받들어 일곱 번의 하서양을 함으로써 중국, 더 나아가 세계의 항해 역사 상 기적을 만들었다.


드라마/영화/소설


관련 페이지

참고문헌

  • 신성곤∙윤혜영,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서울 : 서해문집, 2004, ISBN 9788974832100.
  • 개빈 멘지스,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조행복(역), 파주 : 사계절, 2004, ISBN 8958280123.
  • 우에스기 치토시, 《1421 세계 최초의 항해가 정화》, 임진호(역), 서울 : 이치, 2007, ISBN 9788991215597.
  • 신웬어우, 《중국의 대항해자 정화의 배와 항해》, 허일∙김성준∙최운봉(편), 서울 : 심산, 2005, ISBN 8989721415.
  •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서울 : 궁리출판, 2011, ISBN 9788958202172.


각주

  1. 개빈 멘지스,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조행복(역), 파주 : 사계절, 2004, p. 50.
  2. 조관희, 《조관희 교수의 중국사 강의》, 서울 : 궁리출판, 2011, p. 281.
  3. 개빈 멘지스, 《1421: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 조행복(역), 파주 : 사계절, 2004, p. 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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