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까오량 가족』의 주제의식과 인물 간 이해관계 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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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막장>
고건한 우정한 김경민 신지현 이성은 이하림 최나연



서론

1930년대 후반, 40년대 중반까지의 중국은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외부적으로 “군국주의 일본의 시도는 1931년 만주를 장악함으로써 시작되었고, 1937년에서 1945년까지는 전면적 침략으로 이어졌다.” 내부적으로 이러한 일본의 침략에 대해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둥의 공산당은 장기적으로 대항했다. 그와 동시에 자신들만의 입지를 다져나가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국공합작, 국공내전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은 이와 같은 공산당과 국민당의 이해관계를 잘 보여준다.
중국인민의 주권확립, 군벌 타도, 민족의 통일 등을 지향한 1차 국공합작과는 달리 2차 국공합작은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침략에 대해 중국인민들의 절실한 요구에 따라 항일민족전선 차원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하지만 ‘항일민족전선’이라는 대의 안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각각의 실질적인 이해관계가 숨겨져 있었다. 국민당은 공산당을 상대로 토지개혁의 중지, 소비에트 정부 해체 등을 원했고, 공산당은 국민당을 상대로 공산당의 합법적인 지위 인정, 정치범 석방, 국민당 1당 독재에서 벗어나 공산당을 비롯한 다른 당파의 참여를 주장하였다.
한편 일반적으로 역사적 사건들은 당, 국가 등 정치적으로 거대한 주체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 그러나 당시 중국을 이끌어가는 주체 세력이 국민당 혹은 공산당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세력 외에도 중국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했던 또 다른 주체는 바로 민중이었다.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국가 내 주류 정치집단들과 달리 민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오직 ‘민중’으로서 그들의 삶과 역할을 계속해오고 있다. 비록 역사의 서술은 당과 국가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지만 그들의 삶이 밑바탕이 되지 못한 기술은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중국이라는 한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적 사건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주요 세력의 정치적 활동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삶과 문화를 체득하고 실천하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소설과 같은 문학세계에선 실제로 민중이 주체로 묘사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러한 경향은 문화대혁명이 끝난 이후, 지식인들이 하방(下放) 시기 겪었던 농촌의 토속적인 경험과 ‘항일’이라는 시대적 경험을 바탕으로 민중들의 삶을 문학 작품으로 써내려가면서 더욱 부각되었다. 이는 일종의 뿌리 찾기 문학(尋根文學)의 일종으로, 근대화와 항일, 공산화, 그리고 문혁을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중국 민족만의 전통적 정신과 가치로의 회복을 그 핵심주제로 하고 있다.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는 당시의 이러한 문학적 경향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홍까오량 가족』에서 민중의 모습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무력하게 일본군의 만행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수동적인 모습과 일본군에 능동적으로 대항하는 위잔아오로 대표되는 토비(土匪)세력의 독립지향적인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사회의 근대사회로의 전환과 그 과정 속에서 빚어진 국가적 환난과 사회적 혼란은 기존의 지방 토비세력들의 확대와 재생산을 도왔고 사회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정부를 대신하여 일본군에 대항하고 지역을 수호하는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물론 그들의 행위는 어떤 고매한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단순히 그들의 생존과 세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들이 지역사회에 끼쳤던 영향은 적지 않았다. 이 때 생각해 볼 것은 이념정당인 국민당이나 공산당과 구분되는 토비의 민중의식뿐만 아니라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항일’이라는 합치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자신의 세력을 넓히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 위잔아오로 대표되는 민병세력은 그들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에 대항했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민중이 되어 항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일’이라는 틀에 갇힌 나머지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는 민중의식과 개개의 집단 속의 농민들의 삶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전체적인 배경의식에 가려져 쉽게 넘길 수 있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민중의식’으로 나타난 주제의식의 구체적 양상

『홍까오량 가족』은 작가 모옌이 자신의 가족과 조상으로부터 내려온 문화적 요소에 영향을 받아 쓴 작품으로, 단순히 항일에 대한 혁명적 의식만을 드러내고 있지 않다. 모옌은 당시 중국의 민속 문화를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전설처럼 전해오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또한 작품 속에서 이러한 민속 문화를 향유하는 민중은 현실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저항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점은 중국 민초들의 민중의식을 더욱 사실적으로 부각시킨다.
특히 『홍까오량 가족』에서는 기존에 다른 작가들이 다루었던 농촌과 민족 등의 전통 지향적인 소재와는 다른 특징의 소재를 발견할 수 있다.
본 절에서는 이러한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의식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상징적 자연물과 붉은 색채의 연결

『홍까오량 가족』은 주 배경인 ‘수수밭’이라는 자연물을 상징적인 소재로 삼아 ‘붉은’ 색채와 결합함으로써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붉은 수수밭’은 그 자체의 존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다른 붉은 빛을 띠는 소재와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보여줌으로써 ‘수수’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더욱 효과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즉, 모옌은 상징적인 ‘자연물’과 ‘붉은색’의 결합이라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민중의식을 표현해 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의 생명력

위잔아오는 큰 도롱이를 벗어버리고 발로 수십 개의 수숫대를 밟아버렸으며, 그리고 그 수수들의 시체 위에다 도롱이를 깔아놓았죠.그는 할머니를 도롱이 위에 안아다 눕혔습니다. [1]

위와 같이 따이펑리옌과 위잔아오의 야합(野合)이 이루어지는 배경은 ‘수수밭’이다. 두 사람은 기존의 유교적인 제도와 의식에 저항하고, 인간의 내재되어 있는 본능적인 욕망에 더 주목한다. 인간은 자신을 속박하고 있는 예법과 규율을 제거하고 본래의 자유로운 원시상태로 돌아갈 때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충만해질 수 있는데,[2] 여기서 말하는 생명력은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속박된 정신과 대결하는 자유의지의 발현이다. 니체에 의하면 “삶 그 자체는 힘에의 의지”이다. 그러므로 자유정신이 속박된 정신을 극복하는 과정은 힘과 힘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자유정신은 삶의 한가운데에 존재한다.[3] 따이펑리옌과 위잔아오는 중국의 전통적‧봉건적 유교관례가 속박하고 있던 그들의 내재적인 자유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은 중국 대지에서 오랫동안 억압받아왔던 민중들의 생명력을 회복하고자 하는 주체적 의지인 동시에 근본적인 역량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의미의 생명력은 목숨으로 규정되는 것뿐만이 아닌, 선대와 후대를 잇는 강인한 연결고리이다. 오래 전부터 신화 속의 생명체라고 지칭할 수 있는 존재들은 대지에서부터 잉태되어 왔다고 전해진다.[4] 이러한 탄생의 모티브를 『홍까오량 가족』의 주제의식과 연결시켜 본다면 ‘붉은 수수밭’은 곧 민중의 생명력이 탄생하는 공간이자, 원초적인 민중의식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이처럼 원초적인 탄생의 거점이자 근본적인 의지의 시발점인 ‘수수밭’에서의 그들의 야합(野合)은 단순히 그들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이어갈 후손을 태동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붉은’과 ‘수수밭’의 의미적 결합은 기존의 전통적 가치에 대항해 현실 속의 민중들이 바라는 삶의 이상향과 인간성, 내적 의지 등을 상징화한 것이다.

민중의 저항의식

1939년은 이미 옛날 엽서처럼 팔월 초아흐렛날의 태양이 이미 다 소모되었고 그 여운으로 천하의 만물이 붉게 물들었으며, 아버지는 온 하루의 격렬한 전쟁 끝에 더욱 말라 보이는 얼굴에 자홍색 흑빛이 더한층 굳어 있었죠. [5]

『홍까오량 가족』에서 나타나고 있는 또 다른 주제의식은 ‘항일정신’이다. 당시 일제의 만행은 민중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위협하였고, 실제로 까오미 둥베이향은 일본군에 의한 온갖 착취와 부역 등에 시달렸다. 이러한 중국의 처참한 현실에서 비롯된 민중의 항일투쟁은 단순히 국가적 차원에서 발현된 애국심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의식주와 같은 삶의 현장의 붕괴 등으로 인한 민중의 분노에 의한 것이었다. 즉, 그들을 부추기던 투쟁의 동력은 민족을 존속시키고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가문과 그들의 전통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인 것이다. 이러한 가족 차원에서 비롯된 저항의식은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항일보다 더 적극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겨우 남은 수수 싹들은 들풀이 무성한 황량한 벌판 가운데를 억세게 뚫고 예리한 머리끝을 내밀고 있었는데, 수수 줄기와 잎사귀, 풀들로 조성된 어두운 그림자들은 녹이 슨 누런 탄피들을 가려주었습니다. [6]


그들은 정규 군대처럼 체계적인 전술과 전략을 토대로 싸울 수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희생을 대가로 치러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민중들이 흘리는 피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항쟁 속에서 잃어가는 생명력으로 이어지면서, 격렬했던 민중의식이 표출된 것이다. 또한 이 피로 점점 물들어가 붉은 색이 짙어지는 수수밭은 이러한 민중의 모습을 대변해주는 동시에 황폐화된 민중의 삶을 보듬어주는 삶의 터전이다.

민중의 전통적 토템 의식

수수는 실제로 산동 지방 사람들의 주(主) 식량이었다. 따라서 수수는 이 지역 민중들에게는 어떤 곡식보다도 밀접한 관계의 존재였고, 작품 안의 수수 역시 단순한 자연물 그 이상의 존재이다.

‘고생도 많고 재난도 많은 수수들은 달빛 아래에서 엄숙하게 선 채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따금 수수 알갱이들이 검은 흙 위에 떨어질 뿐이었죠. 그 수수 알갱이들은 반짝이는 눈물과 흡사했습니다.’ [7]


‘수수’는 민중과 공감하고 그들의 의식을 대변하는 정서적 대상이다. 항일의 과정에서 수수는 일본군에 의해 끊임없이 짓밟히고 꺾이지만 그런 역경의 끝에는 검은 흙에서 새로운 수수의 싹이 트는 자연의 순환이 뒤따른다. 수수의 의인화는 민중의 희로애락을 자연물에 이입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결론적으로 수수를 인간사의 모든 고초와 슬픔, 환희와 고뇌를 함께 겪고 결실을 맺기를 기다리는 존재로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불현 듯 수수들이 영혼을 가진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답니다.……위로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알고 있었답니다. 수수의 붉은 색상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수수 때문에 가려져 있던 지평선에서 해가 드러나고 그 해가 수수를 온통 처연한 붉은빛으로 달구어놓았다는 걸 깨달았답니다. [8]

한편으로 수수는 정서적 공동체의 개념을 넘어 토템의 요소로써 신성한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할머니의 무덤을 만들 때 수숫대로 할머니를 감싸주는 모습처럼 장례의식에서의 수수의 등장은 민중이 믿고 있던 민간신앙 의식을 보여준다. 이렇게 민중에게 토템으로 기능한 수수는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의식적으로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루어한 큰할아버지는 다른 일꾼더러 집으로 가서 고량주 반병을 가져 오게 하고는, 온몸에다 바르고 나서 물굽이에 뛰어들었다. [9]

이러한 수수가 발효되어 고량주로 빚어질 때 역시 민중의식이 드러난다. 위의 장면들은 거사를 하기 전에 치르는 하나의 의식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이러한 전통의식은 오래전부터 지켜 내려온 것이며 후대에도 전승해야 할 의무가 있는 대상이다. 따라서 수수밭이 짓밟히고 고량주 공장이 파괴되는 것은 더 이상 붉은 수수로 고량주를 만들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전통 문화의 실종과 더불어 선대와 후대의 단절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민중들이 필사적으로 일제에 대항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오랜 세월 지켜온 전통의식(토템)을 보존하기 위함이다.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여성상 ― 따이펑리옌(戴鳳蓮)

『홍까오량 가족』의 여주인공인 따이펑리옌(戴鳳蓮)은 대담하고 독립적인 모습으로 신여성상을 보여준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30년대 전후 여성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봉건적인 가부장제에 억압되어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홍까오량 가족』에서는 여성의 모습을 독특하게 구성하고 있다.
그녀는 원시적 욕망에 충실하다. 따라서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를 문둥병 환자에게 시집을 보내려 할 때 위기감을 느낀다. 따이펑리옌은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처럼 생명력이 충만한 위잔아오와 함께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러한 행동은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봉건적 유교관념에 대한 강력한 반발인 셈이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인 산동성(山東省)은 공자의 출생지인 곡부가 있는 곳으로 여느 지역보다 유교적 특징과 봉건적 전통이 선명하고 강하게 남아있는 지역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따이펑리옌 역시 기존의 미신에 의존하며 실질적인 반항을 하지 못하는 농촌 여성에 불과할 수도 있었지만 모옌은 작품 속 따이펑리옌을 기존과는 다른 여성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영웅성의 기점을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내재되어 있는 영웅성은 작품 내에서 환상적 리얼리즘을 통해 구현된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란 인물의 사실적 묘사를 신화, 자연적 요소들과 결합한 것을 말한다. 환상적 리얼리즘 문학은 현실을 왜곡하거나 상상의 세계를 창조하지 않으므로 환상문학이나 심리 소설과 다르고, 꿈을 주요 모티브로 사용하지 않으므로 초현실주의나 신비주의 문학과도 구분된다.[10]


이 술 속에는 루어한 백부의 피가 들어 있다니까. 남자라면 마셔요. 그리고 모레 함께 일본 놈들의 차량과 싸워요. 그리고 당신들은 각자 갈 길을 가고 서로 상관하지 말아요. 할머니는 사발을 들고서 꿀꺽꿀꺽 마셨습니다. [11]


그녀가 위잔아오로 하여금 루어한 백부의 피가 들어있는 고량주를 마시게 하며 일제에 맞서 싸우라는 장면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잘 보여준다. 피가 들어간 고량주는 일종의 민간 신앙적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이는 일제에 의해 희생된 루어한의 피와 붉은 고량주의 이미지를 연결시켜 강렬한 항일정신을 보여준다. 따라서 붉은 고량주를 마시는 따이펑리옌의 행위는 그녀의 주체적인 저항정신과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인 것이다.

비록 나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서남 방향으로 가서 극락세계로 가시라고 환송했지만, 할머니는 원하지 않았고, 할머니가 할아버지네 대열들을 위해 차삥을 날라다 주었던 구불구불한 강 언덕을 따라서 가다가 다시 서고 다시 가기를 반복하면서 수시로 머리를 돌려 주시했습니다. [12]


위에 묘사되는 바와 같이 ‘나’의 할머니의 죽음은 환상적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요소는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도 영웅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일으킨다. 서남방향은 불교에서 극락세계로 가는 길을 의미하는데, 그녀는 죽은 후에도 서남방향이 아닌 위잔아오 대열이 싸우고 있는 곳으로 간다. 이는 그녀의 꺼지지 않는 저항의식을 보여준다. 모옌은 ‘나의 할머니’라는 캐릭터를 신여성의 전형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나는 결코 현실 속의 일반 여성을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며, 내가 묘사하려는 것은 내 자신의 상상력 속에서 재탄생된 여성인 것이고, 여기서의 ‘나의 할머니’는 상상속의 인물인 것이다.”라고 설명했다.[13] 이렇게 그는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민중의식을 독창적으로 나타내었다.

후대에 식은 선대의 불타는 의식

모든 수수 알갱이는 깊이 있는 적색으로 성숙한 면모를 드러냈죠. 그런 수수들의 모습은 하나의 드높은 사상적 경지를 형성한 그 어떤 집합체라고 일컬을 수 있었습니다. [14]


여기에서 ‘붉은 수수’는 전쟁을 치르기 전 대원들의 저항 의식이 구체화된 소재이다. 그러한 의식이 강해질수록 붉은 빛이 더 강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투박하고 거친 면과 같은 민중 의식이 수수가 익는 것처럼 성장한다. 이러한 민중 의식은 지식인이나 전문 군대처럼 전문성을 띄거나 다듬어지지 않는 날 것과도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정신보다도 깊고 고고하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으면서까지 조국에 충성을 바쳤고, 그들이 연출했던 용감하고 비장한 한 편 한 편의 장면들은 이렇게 살아 있는 우리 같은 불초한 자손들의 모습을 부끄럽게 만들곤 했기 때문에, 저는 모든 종(種)은 진화와 동시에 퇴화한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15]


문제는 위와 같이 위잔아오와 따이펑리옌 세대를 통해 구현되었던 민중의식이 후대에서는 퇴색한다는 것이다. 선대의 정신은 표면적으로 거친 것으로 보이지만 자신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저항정신으로 성숙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대의 정신은 후대에까지 온전히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퇴화’한다. 작품 속 화자는 이를 부끄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둘째 할머니의 무덤을 에워싸고 있는 수수는 잡종 수수들이었다. 내가 반복해서 노래한 붉은 피바다 같은 수수는 자취를 감추고 존재하지 않았고, 그 수수를 대신한 것은 잡종 수수들이었다.…(중략)… 나는 잡종 수수를 원망한다.[16]


후손들이 선대의 정신을 가지지 못한 것은 모옌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현실이다. 민중 의식이 표출되면서 희생이 발생하였지만 민중과 공감대를 이룬 핵심소재인 수수는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후에 이를 대신한 수수는 하얀 분이 묻어있는데 이는 후손들의 정신이 그만큼 시들었다는 뜻이다. 또한 둘째 할머니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했는데, 이는 후손들이 선대의 정신을 보존할 의지조차 부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후손들의 무관심과 퇴색하는 정신을 모옌은 원망한다. 또한 화자는 ‘잡종 수수들은 영원히 성숙치 못할 것이다’라고 언급하는데,[17] 그것들이 성숙할 수 없는 이유는 이전의 검붉은 수수들이 가지고 있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영혼과 품위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붉은 수수의 짝퉁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선대의 정신을 온전히 유지하고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후손이 나온다면 다시 붉은 수수밭이 태양을 맞이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잡종 수수들에 포위되어 있고, 뱀 같은 그 녀석들의 잎사귀들이 내 몸을 친친 감싸고 있으며, 그 녀석들의 몸에서 흐르는 짙은 녹색의 독소가 내 사상을 독살하고 있다.[18]


위의 묘사는 후손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현실을 비유적으로 제시한다. 잡종 수수가 독소를 내뱉는 것은, 시들어가는 정신이 후손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후손들이 다시 의지를 드러내기에는 선대의 정신이 이미 심하게 황폐해졌음을 보여준다. 또한 설령 의지가 생긴다고 해도 이미 퇴색한 정신이 후손들에게 남아있을 일말의 살아있는 정신까지 죽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모옌은 민중 정신이 시든지는 오래이며 이를 다시 살리는 것이 제 3세대에게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를 한탄한다.


개인 간 대립되는 이해관계 분석

위와 같이 작품의 전반적인 주제의식은 ‘민중의식과 생명력’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외부적으로 보이는 통일적인 ‘항일’정신과는 달리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민중 사이의 갈등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당시 중국의 혼란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인다.
이하에서는 작품에서 드러나는 개인 간의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중국의 시대상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 것이다.

개인 간의 대립되는 이해관계

렁(冷) 곰보

렁 대장의 하얀 얼굴과 코 주위에는 수십 개의 검은 곰보 얼룩이 있었습니다.[19]

렁 곰보는 이 작품에서 국민당의 이익을 대변하며, 위잔아오와 직접적인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인물이다. 그는 따이펑리옌(화자의 할머니)의 중재로 일본에 대한 매복전에서 위잔아오와의 협력을 약속했지만 위잔아오의 민병들이 일본군과의 격렬한 전투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은 후에야 뒤늦게 등장한다. 이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위잔아오의 세력을 줄이고 일본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신의 세력을 더욱 확대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목적만을 위한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이다. 또한 공산당을 대변하는 자오까오 대대의 장샤오자오와도 직접적인 갈등관계를 가지고 있다.

자오까오(膠高) 대대의 장샤오자오(江小角)

자오까오 대대장은 장(江) 씨였는데, 키가 크고 발이 작았기에 사람들은 그를 장샤오자오(江小角)라고 불렀답니다.…장 대장은 허리에 모제르 총을 차고 있었고, 머리에는 기와 색상의 거친 헝겊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으며 모자 변두리에는 검은 단추 두 개가 박혀 있었답니다. 그는 하얀 이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다지 숙달되지 않은 베이징 말로 말했답니다.…(중략)…저는 중국 공산당 빈해 특별위원회의 부탁을 받고 위 사령관과 상담을 하러 왔습니다. 중공 빈해특별위원회는 위 사령관이 이번의 위대한 민족해방전쟁 중에 보여준 민족적인 열정과 희생정신에 대해 적극 찬양합니다. 빈해특별위원회는 저더러 위 사령과과 연락을 취해서 서로 화합하고, 함께 항일을 하여 민주연합 정부를 건립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20]


팔로군 소속 자오까오 대대의 대장 장샤오자오는 공산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로서, 국민당의 렁 곰보를 타도하면서 위잔아오와의 연대감을 구축하려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위잔아오가 아닌 위잔아오가 가지고 있는 무기이다. 또한 겉으로는 항일 민주연합 전선이라는 이념적 목표를 앞세우지만, 그럴만한 실질적인 역량은 턱없이 부족하고, 렁 곰보와 대립하는 등의 세력다툼만을 일삼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부족한 재원을 얻기 위해 위잔아오의 철판회가 따이펑리옌의 장례식을 주관하는 와중에 기습해 무기를 탈취하려고 시도한다.

위잔아오(餘占鰲)

할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답니다. “나, 위(餘) 모는 한자 이백 자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을 죽이고 방화를 하는 일이라면 아주 쉽게 할 수 있지만, 나라니 당파니 하는 것을 말하라면 나를 아예 죽이는 편이 통쾌할 거요!” “그럼 일본 놈들을 쫓아내고 나서 중국의 천하는 누구의 손에 넘겨주면 좋을까요?” “그건 나와 상관없는 일이오. 아무튼 누구도 내 것을 빼앗아가지는 못할 거요!”[21]

위잔아오는 이 작품의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핵심인물로서, 앞서 다뤘던 수수의 생명력, 중국 민족의 전통성, 그리고 지역적 토속성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일본군의 침략에 대응하여 보여준 그의 적극적인 투쟁은 그가 애국심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보다는, 일본인들의 만행 그 자체가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 여겼기 때문이며, 더불어 그들의 고량주 공장을 비롯한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의 투쟁은 그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나타나는 민족적 특성을 전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민족을 존속시키고 가문과 그들의 전통을 스스로 보호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킨다. 또한 그들에게 생명이란 타인의 삶과 죽음이 아니라 가족의 차원, 가족의 존속이다.

빨강둥이는 아버지를 물어뜯었지만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니 아버지는 속바지를 두 개나 입은 덕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사나워서 아버지의 고추를 꿰뚫었으며, 불알을 물어뜯어 타원형의 메추리알만 한 알 하나가 떨어졌으며, 한 가닥의 가느다란 선만이 원래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답니다. 할아버지가 건드리자 그 검붉은 색상의 물건이 아버지의 바짓가랑이 속에 떨어졌습니다.…(중략)…”끝장이구나……진정 끝장이야……“ 할아버지는 자신의 나이와 상당한 차이가 있고, 나이 티가 나는 늙은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할아버지는 총을 꺼내더니 큰 소리로 말했답니다.”넌 나를 망쳤다! 이 개놈아!“[22]

따라서 그러한 생명의 의무는 모든 가족 구성원에게 적용되는 것인 동시에 나아가 후대에 반드시 전승되어 그들의 민족과 가문이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23]

위잔아오에게 있어서 생명의 의무는 아들 또우관(豆官)의 생식능력의 보존을 통한 가문의 지속과 그들의 삶의 터전의 보호와 전승이다. 평소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성격을 가진 그이지만, 자신의 아들이 남성으로의 기능을 잃을 뻔한 위기에 닥쳤을 때 처음으로 그는 인간적인 반응을 하는데, 이는 그에게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24]


까오미 동베이향과 전통, 그리고 생명력

위잔아오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 까오미 둥베이향이란 단순히 그들의 삶의 터전일 뿐만 아니라, 생명, 전통, 그리고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 그 자체인 땅이다. 이곳은 어떠한 문화적, 도덕적 비판을 받지 않는 땅으로 위잔아오의 수많은 살인과 부정행위가 정당화되고, 과격하고 무식한 그의 행위들이 영웅적 기개로 승화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또한 이곳은 중국이 그동안 쌓아왔던 그들의 역량과 문화를 바탕으로 미래를 위한 질 좋은 원료, 즉 붉은 수수를 길러내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붉은 수수밭에는 언제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료, 힘을 갖고 있다.[25] 하지만 봉건사회와 근대사회 사이에서의 혼란함과 괴리감,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내부적으로 발생한 전쟁, 20세기 중반 이념투쟁 등 이 모든 것들은 모두 수천 년간 이어온 중국의 모든 문화유산의 전승과 민족과 국가를 위협하는 요소들이다.[26] 이러한 대내외적 어려움 속에서 위잔아오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그들만의 천국을 지켜내고자 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 분석

토비(土匪)

늙은이는 땅에 꿇어앉아서 애걸했답니다. ”팔로군 어른, 살려주십시오. 팔로군 어른, 부디 살려주십시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난 팔로군도 아니고, 구로군도 아니다. 나는 산도적 위잔아오다!“[27]


소설 속에서 위잔아오는 얼핏 보기에는 단순히 항일과 구국을 목표로 하는 민병 집단의 대장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위잔아오는 일본의 침략이 있기 전부터 둥베이향 지역 토비 세력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는 그 지역 토비들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흰목을 처단함으로써 지역 내에서 주요 인물로 떠올랐고, 또한 이 일을 계기로 전향적으로 토비세력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가 이러한 집단을 이끌게 된 것은 어떤 특별한 포부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그의 사적 욕구, 즉 삶과 터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가 일본군에 대항하는 것 역시 특별한 항일정신으로부터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위잔아오는 겉으로만 대의를 위한 각각의 ‘이념’을 주장하는 다른 무장 세력들과는 달리 ‘자신의 이익’, 더 나아가서는 지역(세력)의 이익을 추구한 토비 우두머리에 더 가깝다. 그가 공산당이나 국민당 세력에의 합류를 거부한 반면, 철판회의 가입을 받아들인 것도 이러한 기본적인 욕망의 차이에 있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을 거치면서 토비 출몰지역은 기존의 하남지역에서부터 산동, 호북, 하북 등 주변 성(省) 지역으로 점차 확대되었다.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민군(民軍) 또는 민군임을 자처한 토비들이 세를 넓혀갔고, 이에 청조(淸朝)는 이러한 민군 집단을 아우르고 이와 함께 혁명세력들을 붕괴시키기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지를 이동시켰다.

현장 차오멍지우의 묘책은 나의 할아버지가 우두머리로 있는 까오미 둥베이 마을의 악당 무리를 일망타진한다는 것이었고,… [28]


작품 속에서 지방의 토비세력을 진압하려는 정부를 상징하는 차오멍지우 현장(弦長)과 지 역에서 큰 세력을 구축하고 있는 위잔아오 간의 대립은 위잔아오가 외부적으로도 토비의 성격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당시의 전국적인 토비세력 진압은 지역사회의 치안 공백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토비들은 오히려 더 큰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는 지역수탈과 민군의 영향에 따른 사회 불안 요인을 더욱 증대시켰고, 이러한 상황을 발판으로 지방의 토비 세력들은 한 지역을 아우르는 독립적인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나아가 혁명을 꾀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렀다.[29]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자.

“…그때가 되면 옌쉐이 강물에서 도를 세우고, 철판회 깃발을 내세우며 당신이 바로 철판회 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에 세 갈래로 병마들을 파견해, 자오현과 까오미, 핑두를 진공해, 공산당과 국민당과 일본 놈들을 모두 몰살해버리고 나서 세 개의 성을 세우고 나면 천하는 원칙적으로 정해지는 겁니다!”[30]


실질적 이해관계 대립

지역 토비세력을 대표하는 위잔아오, 국민당의 렁 공보, 공산당의 자오까오는 각각 자신들의 이념과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대립한다. 렁 곰보와 자오까오는 겉으로는 각 당의 이념을 내세우며 추상적인 대의를 표방하는 듯하지만, 이들 또한 실질적으로는 지역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을 뿐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그러한 힘을 얻기 위해서 무엇보다 ‘총’을 기본으로 하는 무력 수단의 확보를 중시했다.

“동지들! 돌격해서 무기를 빼앗으시오!“ 팔로군은 사람들 무리에서 이렇게 고함을 질렀습니다.

“나를 상관 말고 어서 쫓으시오! 총을 빼앗아야 하오! 총 한 자루라도 놓쳐서는 안 되오! 돌격! 동지들!“……(중략)…… ”회장님! 그들을 건드리지 맙시다. 그들을 다만 총만 가지려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돌려주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서 수수나 심겠습니다.“

렁 대장의 대대는 연달아 다리를 넘어왔으며, 그들은 자동차와 일본놈들의 시체에 덮쳐들었어요. 그들은 기관총과 보총, 탄알과 탄갑과 총칼과 칼집과 가죽 벨트와 가죽 부츠와 지갑과 수염 깎는 칼 등을 가져갔답니다.[31]


총기의 유무는 토비세력 역시 출세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지표로 작용했다. 실탄에 대해 그 뾰족한 모양을 따서 ‘釘子’라고 지칭한 것 이외에 ‘귀중하다’라는 의미에서 ‘白米’ 또는 ‘一粒金丹’이란 흑화를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따라서 토비는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가운데 한 방법은 약탈을 통하거나 값비싼 비용을 감수하고 구매하는 것이었다.[32]


그 작은 전면전은 회원들 사이에서 할아버지의 우두머리 직위를 굳건하게 해주었습니다. 수십 명에 달하는 회원들의 비참한 죽음은 흑안의 그 요술을 뒤집어놓았습니다. 회원들은 매일 반드시 진행하던 신령한 무쇠의식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총, 그들은 총이 필요했습니다. 아무리 신비한 그 어떤 마술도 총알을 막을 수 없었답니다. [33]


위에서 보는 것과 같이 토비세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물리적인 힘이 필요하다고 깨닫게 되었고, 그러한 자신들의 이익을 충족시켜줄 수단은 바로 ‘총’이었다. 이와 같이 ‘총’이라는 무기를 사이에 두고, 국민당, 공산당, 토비세력의 이해관계는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즉, 장샤오자오의 공산당, 렁곰보의 국민당은 위잔아오에게 있어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것을 빼앗으려는 적에 불과했다. 다음의 문장에서는 이러한 국민당과 공산당에 대한 토비의 증오심이 잘 나타나 있다.

“나는 네 누나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야! 그 여자는 이미 죽었으니 울어도 되살아나지 못해. 나는 우리들 때문에 우는거야. 우리는 원래 이웃에 사는 이웃사촌들이니까 언제든지 만났고, 친척이 아니면 오랜 친구였는데, 왜 오늘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 말이다! ……(중략)…… ”개새끼들아! 너희들 재간이 있으면 어서 가서 일본 놈들과 싸워라! 어서 가서 누런 껍데기들과 싸워! 우리 철판회와 싸워서 뭘 하겠다는 거야! 이 첩자 놈들아! 외국과 소통하는 스파이들아! 진회(秦檜) 같은 놈들아……“ [34]


장샤오자오, 렁곰보, 위잔아오의 이러한 대립되는 이해관계는 후에 큰 전투로 발전하였다. 철판회의 ‘총기’를 강탈하려는 두 집단과 그러한 시도로부터 자신의 것을 지키려는 철판회 간의 혈전은 그들의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사람들의 대립되는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한 싸움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은 ‘개’라는 상징을 사용하기도 한다.

빨강둥이는 조용히 엎드려 눈으로 초록둥이를 흘겨보았죠. 초록둥이는 번개 같은 속도로 달려들어 한창 희롱하고 있는 검둥이를 강가에서 눌러버렸답니다. …(중략)…그놈은 일어섰지만 격렬한 아픔이 놈의 온몸을 떨게 만들었답니다. 놈은 버럭 화가 났죠. 놈은 초록둥이의 공격이 개의 도리를 완전히 위반한 짓이라고 여겼습니다. 암암리에 손을 쓰는 것은 사내가 아니며, 이겨도 영광스럽지 못하다! 검둥이는 미친 듯이 짖어대면서 머리를 낮추고 초록둥이의 앞가슴으로 갑자기 달려들어 입을 한쪽으로 하고, 초록둥이의 가슴 부위 가죽을 물었답니다. …(중략)…초록둥이는 자기의 주둥이 밑에서 패배한 검둥이를 흉악한 눈길로 바라보면서 예리한 개 이빨을 오만하게 드러내고 소리를 지르다가, 곁눈질로, 얼굴에 유월의 서리가 내려앉아 있는 빨강둥이의 기다란 얼굴을 바라보고서는, 반사적으로 온몸을 다 떨었죠. 빨강둥이는 정신을 집중하고 웃더니, 앞으로 공격하면서 본능적인 습관으로 상처 입은 초록둥이를 땅에다 뒤집어 놓았답니다. …(중략)…개들은 빨강둥이를 가운데 두고 하얀 이빨을 드러냈고, 보기 힘든 맑은 하늘의 창백한 태양을 향해 경축하는 듯한 소리를 질러댔답니다. [35]


이처럼 한 때 한 가족이었던 다른 개들을 무참히 물어뜯는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개의 행태는 마치 당시 대립하던 세 집단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계속되는 이들의 대립은 각 집단이 겉으로 표방하는 이념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 간의 갈등은 이념보다는 항상 ‘총’으로 대표되는 무력이나 지역 내 패권의 확보에 불과했다. 결국 이렇게 단순히 연합과 분열만을 계속하는 중국 내의 불협화음은 ‘일본군’이라는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하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결론

『홍까오량 가족』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책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일제에 강렬히 저항했던 선대 민중의 의식을 기억하자’라는 내용으로 파악하기 쉽다. 그리고 끝에 그 이미지의 잔상이 깊게 남게 된다. 사실 주제의식을 파악하는 것은 책을 읽음에 있어서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 있는 배경에만 주목하다보면 ‘작품에 나타난 주제의식의 구체적인 양상’과 ‘인물들에 대한 탐구’에 자칫 소홀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요소들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을 중요시해야 한다.
작품 전체에 등장하는 ‘붉은 수수’는 『홍까오량 가족』에서 주(主)된 상징적 요소로 민중의 생명력, 저항의식, 민간신앙(토템)을 의미한다. 먼저 ‘붉은 수수밭’은 할머니(따이펑리옌)와 할아버지(위잔아오)가 봉건적·유교적 예법에서 탈피하여 사랑을 나누는 장소로서 전통에서 자유로운 원시상태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또한 소설 속에서 수수가 피로 물드는 장면은 항쟁 속에서 잃어가는 생명력에 굴하지 않는 민중들의 저항의식을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둥베이 마을사람들에게 있어서, 붉은 수수는 주(主) 식량 공급원이자 고량주의 원료이고, 그들 생계의 일부이다. 둥베이 민중들은 수수를 그들의 정서적 공동체로 삼을 뿐 아니라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기댈 수 있는 토템의 요소로 생각했다.
따이펑리엔의 여성상 또한 모옌의 작품에서 눈여겨 볼 수 있는 환상적 리얼리즘 요소이다. 그녀는 당시 평균적인 농촌의 여성상과 달리 주체적이고 남성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으며, 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유교적 세계관과 전통에 반항하는 등 개성적 면모를 보인다. 더 나아가 모옌은 이 행동의 사실적 묘사를 신화적 요소와 결합하여 환상적 리얼리즘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이 또한 이 소설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상 전반적으로 소설에서 민중의식이 나타나는 구체적인 양상을 살펴보았다면 다음으로 ‘소설 속 인물들’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본론2>의 분석에 따르면 위잔아오는 자기의 부락을 지키기 위해서 일본에 대항하는 토비를 대표한다. 국민당의 렁 곰보와 공산당의 장 샤오자오는 자신의 소속에 따라서 항일을 행하는 부대들이다. 이들의 항일 목적은 자신들의 세력 확 장과 무기 탈취이다. 크게 보면 이들은 모두 일본과 싸우는 존재들이고, ‘항일’은 이 소설의 하나의 통일된 배경의식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이들은 다 각자의 삶의 목적을 위해 이런 공통된 행동을 할 뿐이다. 토비에 가까운 위잔아오가 공산당의 회유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고 국민당과 협력하지 않는 것은 각자 속으로 다른 이해관계에 놓인 공산당과 국민당 모두일제와 다름없이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는 이들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홍까오량 가족』의 한 목차를 구성하는 ‘개’로도 알 수 있다. 개들에 대한 묘사를 보면 그들은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대항할 때도 있지만 결국 서로의 무리의 이익을 더 중시해 분열하게 된다. 당시 중국의 시대상과 소설의 인물과 연결시킨다면, 항일을 하는 듯 했으나 각자의 이익만을 중시해 분열될 수밖에 없었던 허울뿐인 애국심을 드러낸다고도 할 수 있다.
모옌은 이 소설에서 많은 것을 드러내고자 했다. 자신들의 터전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선대의 민중의식, 민중의식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그 당시의 오염되지 않은 민중의식으로의 회귀의 필요성 등 주제의식들이 소설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모옌이 구성한 상징적인 자연물, 색채, 인물들의 특성과 관계와 같은 세부적인 장치들에 의해 도출된다. 소설을 통해, 이 장치들의 사례가 바로 본론에서 다룬 수수, 붉은색, 소설을 대표하는 인물들, 그리고 토비와 공산당, 국민당의 관계들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홍까오량 가족』 전반에 내포되어 있는 항일의식을 단일한 주제의식으로 중요하게 보아야 한다고 단정하기 쉽다. 그러나 모옌이 나타나고자 했던 것은 그 주제의식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배경의식에 너무 집중해서 모옌이 나타내고자 했던 바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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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옌, 박명애 옮김, 『홍까오량 가족』, 문학과 지성사, p. 134.
  2. 閆蘭娜, 李書萍, <論莫言小說中的酒神精神>,《山花》10期, 2009年,p. 145.
  3. 전성택, “니체의 자유정신에 대한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논문, pp. 38~57.
  4. 김선자, 제 4장 돌 변형신화전설, 중국 변형신화의 세계, 범우사, 2001, p. 263.
  5. 모옌, 위의 책, pp. 170~171.
  6. 모옌, 위의 책, p. 423.
  7. 모옌, 위의 책, p. 308.
  8. 모옌, 위의 책, p. 31.
  9. 모옌, 위의 책, p. 226.
  10. 이카와 타쿠미, 「상징성을 내포한 환상적 리얼리즘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pp. 12~19.
  11. 모옌, 위의 책, pp. 61~62.
  12. 모옌, 위의 책, p. 466.
  13. 모옌, 위의 책, p. 9.
  14. 모옌, 위의 책, pp. 55~56.
  15. 모옌, 위의 책, p. 20.
  16. 모옌, 위의 책, p. 654.
  17. 모옌, 위의 책, p. 655.
  18. 모옌, 위의 책, p. 655.
  19. 모옌, 위의 책, p. 63.
  20. 모옌, 위의 책, pp. 346~347.
  21. 모옌, 위의 책, pp. 516~517.
  22. 모옌, 위의 책, pp. 388~389.
  23. 이수정, “莫言 소설 《紅高粱家族》 연구”,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p. 51.
  24. 이수정, 위의 글, pp. 51~52.
  25. 이수정, 위의 글, p. 52.
  26. 이수정, 위의 글, pp. 52~53.
  27. 모옌, 위의 책, p. 321.
  28. 모옌, 위의 책, p. 520.
  29. 손승회, “중국 토비・비밀결사와 혁명”, 『대동문화연구 제43집』,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2003, pp. 9~12.
  30. 모옌, 위의 책, p. 518.
  31. 모옌, 위의 책, p. 479, 486, 151.
  32. 손승회, “20세기 초 중국의 토비은어[黑話]와 토비문화”, 『역사문화연구21』, 2004,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p. 24.
  33. 모옌, 위의 책, 2007, p. 542.
  34. 모옌, 위의 책, pp. 550~551.
  35. 모옌, 위의 책, pp. 379~3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