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홍양의 유가 비판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염철회의에서의 상홍양은 다음과 같이 유가에 대해 비판하였다.[1]

1.“文學이 聖스럽고 지혜롭다고 칭송하는 孔子는 魯를 다스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였고, 齊에서는 쫓겨나고 衛에서도 기용되지 않았으며, 匡에서는 포위되고 陳과 蔡에서는 곤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무릇 자신이 기용될 수 없는 때임을 알고서도 유세하며 다닌 것은 억지를 부린 것이고, 곤란함을 알고서도 그만두지 않은 것은 탐욕을 부린 것이며, 자신을 속인 줄도 모르고서 간 것은 어리석었기 때문이고, 곤욕을 당하면서도 죽지 않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이 같은 네 가지 일은 보통 사람도 하지 않을 터인데, 하물며 군자란 사람이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상앙은 景監을 통해서 왕을 만날 수 있었고, 범저는 王稽에 의해 천거되었습니다. 따라서 士는 士를 통해 천거되고, 여자는 중매쟁이를 통해 시집갑니다. 그러나 여자가 시집간 뒤에 총애 받고 士가 천거된 뒤에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중매쟁이나 추천자의 힘 때문이 아닙니다. 孔子가 남의 추천을 받아 각 국의 군주를 만날 수 있었으면서도 끝내 중용되지 못하였던 것은, 그가 賢士도 아니고 才女도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大夫曰:文學所以稱聖知者, 孔子也, 治魯不遂, 見逐于齊, 不用于衛, 遇圍于匡, 困于陳⋅蔡. 夫知時不用猶說, 强也; 知困而不能已, 貪也; 不知見其而往, 愚也; 困辱不能死, 恥也. 若此四者, 庸民之所不爲也, 何况君子乎. 商君以景監見, 應侯以王稽進. 故士應士, 女因媒. 至其親顯, 非媒士之力. 孔不以因進見而能往者, 非賢士才女也.)

2.“말은 잘 하여도 시세의 변화를 모르면 논설을 잘 한다고 할 수없습니다. 그림쇠를 들고서 曲尺이 잘못 되었다고 하고 수평기를 잡고서 먹줄이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처럼, 하나의 구멍에만 통하고 하나의 이치만 알 뿐 전체를 저울질 할 줄 모릅니다. 자기가 보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마치 매미가 눈을 모르는 것과 같고, 고집스럽게 옛 문장에만 근거하여 현재의 일에 임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辰星과 參星이 서로 엇갈리는 것과 같으며, 비파에 雁足을 붙여놓고 비파의 음을 고르려는 식이니, 완고하여 다른 사람의 뜻과 부합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孟軻가 제후에게 천대받았던 이유입니다.” (大夫曰: 善言而不知變, 未可謂能說也. 持規而非矩, 執准而非繩, 通一孔, 曉一理, 而不知權衡, 以所不睹不信人, 若蟬之不知雪, 堅據古文以應當世, 猶辰參之錯, 膠柱而調瑟, 固而難合矣. 孔子所以不用于世, 而孟軻見賤于諸侯也.)

3. 무릇 仲尼의 문하에 있었던 칠십 명의 제자들은 부모를 떠나고 집을 버린 채, 책을 짊어지고 공자를 따라다니며 농사도 짓지 않고 학문을 배웠지만, 사회의 혼란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옥 부스러기가 상자에 가득하다고 해서 보물이 있다고 할 수는 없고, 詩ㆍ書를 외우고 책 상자를 짊어졌다고 해서 도가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국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데 있을 뿐이지, 번잡한 문장이나 많은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仲尼之門, 七十子之徒, 去父母, 吸家室, 負荷而隨孔子, 不耕而學, 亂乃愈滋. 故玉屑滿篋, 不爲有寶; 詩書負笈, 不爲有道. 要在安國家, 利人民, 不敬繁文衆辭而已.)

4.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은 구부러집니다. 그러므로 子路는 그 강함 때문에 죽었고 宰我는 그 유약함 때문에 살해되었습니다. 만일 이 두 사람이 공자에게 배우지 않았다면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과신하여 자기의 능력을 자랑하고, 작은 지식을 가지고도 큰 임무를 맡았고,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따르기를 바라면서도 자기는 다른 사람을 따르지는 못하고, 아무도 보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자기 혼자 드러내려고 하고, 아무도 사려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 자기 혼자 자신의 몸값을 높이니, 이것이 그들이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는 그 몸이 젓갈이 된 까닭입니다. (剛者折, 柔者卷. 故季由以强梁梁宰我以 柔弱殺. 使二子不學, 未必不得其死. 何者? 矜己而伐能, 小知而巨牧, 欲人之從己, 不能以己從人, 莫視而自見, 莫賈而自貴, 此其所以身殺死而終菹醢也.)

5. “허, 당신네 유생들은 재주는 용렬하여 행하는 바도 없고, 말은 많지만 쓸 만한 것이 없으니, 실제와 겉모습이 부합되지 않습니다. 남의 담장에 구멍을 뚫거나 담을 넘거나 하는 도적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근심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魯나라 군주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평생 세상에 등용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행동에는 의심이 많아 결단력이 부족하고 주장은 시의에 동떨어져 정치에 요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秦始皇은 그들의 경전을 불살라 없애 세상에 통용시키지 않았으며, 渭水 유역에서 그들을 매장하고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하니 어찌 입과 혀를 움직이고 얼굴을 피고 눈썹을 치키면서 조정의 논의에 참가하여 국가의 대사를 왈가왈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大夫曰: 嘻, 諸生闒茸無行, 多言而不用, 情貌不相副. 若穿逾之盜,自古而患之. 是孔丘斥逐于魯君, 曾不用于世也. 何者? 以其首攝多端, 迂時而不要也. 故秦王燔去其術而不行, 坑之渭中而不用. 乃安得鼓口舌, 申顔眉, 預前論議, 是非國家之事也?)

6. “당신들의 말은 마치 고아가 孝에 대해 말하고, 앉은뱅이가 지팡이를 논하며, 가난한 사람이 仁에 대해 말하고, 비천한 사람이 정치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와 무관한 일은 쉽게 말할 수 있고, 옆에서 논의하기 쉽지만, 정작 일을 맡게 되면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과거 公孫弘은 베옷을 입고 倪寬은 흰 비단으로 된 검소한 도포를 입었는데, 입는 것은 하인이나 하녀의 것과 같았고 먹는 것은 일꾼의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淮南王이 모반을 꾀하고, 밖에서는 蠻夷가 폭동을 일으켰을 때, 도적들이 그치지 않았고, 사치하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마치 역병이 돌 때 무당들이 단지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것과 같아서, 어찌 국가의 어려운 재정을 어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大夫曰: 孤子語孝, 躄者語杖, 貧者語仁, 賤者語治. 議不在己者易稱, 從旁議者易是,其當局則亂. 故公孫弘布被, 倪寬練袍, 衣若僕妾, 食若庸夫. 淮南逆于內, 蠻⋅夷暴于外, 盜賊不爲禁, 奢侈不爲節. 若疫歲之巫, 徒能鼓口舌, 何散不足之能治乎)

7. “전에 千乘郡 출신 倪寬이 《尙書》를 익혀 그 지위가 九卿 이상까지 오른 예로부터 우리가 듣거나 본 천거된 유생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발탁되고 승진하여 정사에 참여할 정도로 그 지위가 매우 높았지만, 그러나 아직까지 식견이 출중하여 국가를 위해 적체된 것을 해결하고 공을 세운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大夫曰: 自千乘倪寬以治《尙書》位冠九卿, 及所聞睹選擧之士, 擢升贊憲甚顯, 然未見絶倫比, 而爲縣官興滯立功也.)

8. “당신들 문학은 말은 잘 하지만 행하지는 못하고, 아래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헐뜯고, 가난한 처지에 부자를 비난하고, 큰 소리는 치지만 따르지는 못하고, 고상한 척 하지만 행동하는 것은 비천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을 비방하고 트집만 잡으면서 이런 수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명성을 구하고 칭찬을 받으려 합니다. 대체로 봉록이 한 움큼도 못되는 사람은 정치를 말하기에는 부족하고, 집안에 식량이 한 석도 못되는 사람은 국사를 의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유생들은 모두 가난하고 초라하여 의관도 온전히 갖추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국가의 정책과 정부의 일을 알겠습니까.” (大夫曰: 文學能言而不能行, 居下而訕上, 處貧而非富, 大言而不從, 高厲而行卑, 誹譽訾議, 以要名釆善于當世. 夫祿不過秉握者,不足以言治, 家不滿檐石者, 不足以計事. 儒皆貧羸, 衣冠不完, 安知國家之政,縣官之事乎? 何斗闢造陽也)

9. “무릇 속은 비뚤어졌지만 입으로는 옳은 말을 하고, 욕심이 없는 것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 이것이 유생의 본 모습 아닙니까. …… 지금 당신들은 안으로는 가족들을 부양할 능력도 없고 밖으로는 칭찬받을 일을 하지 못하면서,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처지에 이러쿵저러쿵 따지기를 좋아하니, 비록 仁義를 말하지만 역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大夫曰: 夫懷枉而言正,自托于無欲而實不從, 此非士之情也? …… 今內無以養, 外無以稱, 貧賤而好義, 雖言仁義, 亦不足貴者也.)

  1. 박성진 한국중문학회, <중국문학연구> 51권0호 (2013), pp.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