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정권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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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6년 조예의 즉위

5월, 조비가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병을 얻었고, 조예를 황태자로 책봉한다. 위문제는 조진, 진군, 조휴, 사마의 등으로 하여금 조예를 보필하게 하고, 17일에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6월, 조예는 조비의 손에 죽은 견씨에게 문소황후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 견씨의 친족들을 중용하는 등 어머니의 죽음을 늘 신경 쓰며 살았다.

  • 239년 조방의 즉위

조예는 병이 위독해지자, 조우를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후헌, 조상, 조조, 진랑으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였다. 그러나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던 유방, 손자 등은 자신들이 숙청될 것을 우려하여 조예에게 그들을 쓰지 말 것을 간언하였고, 조예는 평소에 총애하던 유방과 손자의 의견을 따라 조우 등을 파면하고, 조상을 대장군으로 임명하며 사마의가 정치를 이끌도록 하였다.

[1]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오자, 조예는 병상에 누워 사마의의 손을 잡고 말하였다. “짐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그대를 기다리느라 죽음을 참고 견디었소. 그대는 조상과 함께 이 아이를 보좌해 주시오.” 사마의는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폐하께옵서는 선제께서 신께 폐하를 부탁한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렇게 조예는 36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조방이 3대 황제로 즉위한다. 당시 조방의 나이는 8살이었다.

  • 249년 사마의의 정권 장악

조상이 하안, 등양 등과 더불어 전횡을 일삼자 사마의는 은밀하게 이들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조상 등이 사마의가 방비하는 것을 의심하자, 248년 형주자사로 임명된 이승이 사마의를 방문하였을 때 사마의는 병이 깊어 위독한 체 하였고, 이승은 그것을 그대로 믿어 조상에게 사마의가 완전히 노쇠하였다고 보고했다.

[2]

그리하여 조방이 고평릉을 참배하러 나가는 길에 방심한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나서자 사마의는 성내의 무기고를 장악한 채 낙수의 부교에 진을 친 채 조상의 죄를 낱낱이 상주하였다.

“선제(즉 명제)께서 폐하와 진왕(秦王-조순), 그리고 신을 불러 어상에 오르게 해 신의 팔을 잡고 이르길 ‘심히 뒷일을 염려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은 고명을 저버리고 나라의 제도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람되게 스스로를 윗사람에 견주고 밖으로는 위엄와 권력을 전단하고 있습니다. 백관의 요직에는 모두 자신과 친한 사람을 두고 예전부터 숙위하던 자들은 모두 내쫓겼습니다. 조정에 뿌리를 내리고 점거해 서로 결탁하니 그렇게 제멋대로 방자하게 구는 것이 날로 심해졌습니다. 또한 황문(黃門)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삼고 오로지 함께 결탁하며 신기(神器)를 정탐하니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마다 두려움을 품게 되었습니다. 폐하가 다만 기좌(寄坐-남에게 빌붙어 있음, 손님의 지위에 있음) 하니 어찌 오래도록 안전하겠습니까? 이는 선제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御床)에 오르게 한 본뜻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늙고 쇠약한 몸이나 어찌 감히 지난 날 선제의 말씀을 잊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전횡하니 진(秦)나라가 이 때문에 망했고, 여씨와 곽씨를 일찍 끊어냈기에 한나라 제업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가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전대의 일이며 지금은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공경 군신들이 모두 이르길 조상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지녔고 그 형제가 군사를 거느리며 숙위(宿衛)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하여 황태후께 상주하니 상주한 대로 시행하라고 황태후께서 명하셨습니다. 주관하는 자와 황문령(黃門令)에 신이 임의로 명해 조상, 조희(曹羲), 조훈(曹訓)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기 원래 관직과 후(侯)의 신분으로 사저로 돌아가게 하고, 만약 황제의 수레를 계속 억류시킨다면 군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습니다. 신이 병든 몸으로 임의로 군사를 거느리고 낙수 부교(浮橋)로 온 것은 비상사태를 살피기 위함입니다.”

환범이 조상을 돕기 위해 달려가자 장제가 이를 제지하려 하였으나 사마의가 말리며 말하길,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駑馬戀短豆-노마연단두)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이오.” 사마의의 예상대로 환범은 조상에게 황제를 허창으로 데려갈 것을 진언하였지만 조상은 환범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결국 조상은 허윤과 진태의 설득에 스스로 죄를 받겠다고 한 뒤 파면되었고, 하안, 등양 등과 함께 처형당한 뒤 삼족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조상 등이 처형당한 후 사마의는 하후현을 수도로 불러들이고, 대신 곽회를 정서장군 직에 임명한다. 평소에 조상에게 후대받았으며, 곽회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하후패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하후현에게 같이 촉으로 망명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하후패가 촉으로 가던 중 길을 잃고 기진해있을 때 촉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맞이하였고, 하후패는 촉에서 거기장군직을 수여받는다.

  • 왕릉의 반란

사공 왕릉과 연주자사이자 그의 외조카인 영호우는 조방의 나이가 어려 천자의 지위를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여, 조조의 아들이며 재능 있는 초왕 조표를 천자로 세우려고 비밀스럽게 모의하였다. 9월, 영호우는 장식을 조표에게 보내 서로 묻고 왕래하였다. 11월, 영호우는 왕식을 보내 또 조표를 만나게끔 하였는데, 그가 돌아오기도 전에 질병으로 사망한다.

250년, 왕릉은 별을 보고는 “남두 가운데 화성이 있으니, 갑작스럽게 고귀하게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라며 뜻을 정하였다.

251년 1월, 오나라의 군대가 도수를 막자, 왕릉은 이를 이용해 거사를 일으키려는 마음을 먹고 오를 토벌하도록 요청하는 상주를 올렸지만 허락받지 못하였다. 왕릉은 양홍을 파견하여 폐립하는 일을 연주자사 황하에게 알리도록 하였으나, 둘은 사마의에게 왕릉의 계략을 밀고한다. 4월, 사마의는 직접 중군을 이끌고 왕릉에게 갔으니, 왕릉은 하급관원인 왕욱을 보내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반납하였다. 왕릉은 자신을 묶게 한 뒤 그들을 맞이하였으나, 사마의는 포박을 풀고 그를 수도로 송환한다.

[3]

6월, 사마의는 영릉과 가규가 자신을 섬기는 꿈을 꾸고 난 뒤 찝찝해하다가 8월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마의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사마사가 정권을 잡는다.

  • 254년 조모의 즉위

이풍은 맑고 청렴하며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하여, 오나라에까지 명성이 퍼진 인물이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였는데,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봉급을 받을 수 있는 날짜만을 출석한 뒤 수십 일을 결근하기가 일쑤였고, 아들 이도가 공주의 남편감으로 뽑혔을 때 겉으로는 사양하는 척 하였지만 속으로는 꺼리지 않았다. 또, 두 아우가 군수 직을 역임하면서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도 꾸짖지 않았다. 이풍은 조상과 사마의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적절하게 권력을 유지했다. 사람들은 “조상은 끓는 물과 같고, 사마의는 차가운 물과 같으며, 이풍은 작은 틈으로 새어드는 빛과 같다.”고 이풍을 비웃었다. 이풍은 조방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자주 나눴고, 사마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물어보았지만 이풍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때 이풍은 조상이 죽은 이후로 억압받던 하후현과 딸이 황후가 되어 실권을 잃은 장집 등이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을 알고, 사마사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하후현을 앉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풍의 계획은 들통났고, 사마의가 이풍을 불러놓고 비난하자 이풍은 “경의 부자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사직을 기울게 하고 있소. 나는 애석하게도 힘이 부족하여 그것을 막지 못했을 뿐이오.” 라고 하였다. 분노한 사마의는 이풍을 때려죽였고, 이풍, 하후현, 장집의 삼족을 멸하였다.

9월, 사마사는 조방을 폐위시키기 위해 황태후를 찾아갔다. 황태후는 조서를 내려 조방을 폐하니 이 때 조방의 나이 23세였다.

“황제 조방은 이미 성년이 되었지만, 국가의 정무를 직접 처리하지 않고, 부인에게 탐닉하고 여색에 빠져 매일 배우들을 불러들여 추악한 유희를 즐기고 있고, 후궁 여자들을 맞아 내전에 머물게 하여 인륜의 질서를 파괴하고 남녀의 정절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소. 공손함과 효도하는 마음은 날마다 줄어들고, 도리에 역행하는 오만함만이 점점 심해져 하늘이 명한 대업을 잊고 종묘를 받들 수 없게 되었소. 겸태위(兼太尉) 고유에게 간책(簡冊)을 받들어 종묘에 제사지내어 보고하고 조방을 제나라로 돌려보내 옛날대로 번왕을 담당하도록 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시오.”

사마사는 팽성왕 조거를 황제로 세우려고 하였으나, 황태후가 조거가 자신의 숙부라는 것을 꺼려하였기 때문에 조비의 손자인 조모가 즉위하게 되었다.

  • 260년 조환의 즉위

조모는 사마소가 제위를 찬탈하려 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왕침, 왕경, 왕업 등과 함께 사마소를 죽일 것을 논의하였다. 왕침과 왕업은 사마소에게 그것을 밀고하였고, 불과 수백을 이끌고 거병한 조모는 가충과 맞서다가 그의 부하인 성제의 칼에 찔려 사망한다. 사마소는 “저는 이 소식을 들은 후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슬프고 애상하여 어느 곳에서 이 생명을 끊어야 될지를 몰랐습니다. 법률에 따르면 임금에게 대역무도한 죄를 지으면 그 부모와 처자를 모두 죽인다고 합니다. 성제는 흉악모두한 반역자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여 주살되는 것을 용서받지 못할 만큼의 죄를 지었습니다. 즉시 시어사에게 명하여 성제 일족을 체포하고 정위로 넘겨 그들의 죄를 판단하도록 하십시오.” 라며 성제의 삼족을 멸하며 사건을 수습하였다. 그리하여 5월에 조모가 사망한 뒤, 6월에 조환이 제위에 올랐다.

  1. 명제는 연왕 조우를 대장군으로 삼고, 영군장군(領軍將軍) 하후헌(夏侯獻), 무위장군(武衛將軍) 조상(曹爽), 둔기장군(屯騎校尉) 조조(曹肇), 효기장군(驍騎將軍) 진랑(秦朗)에게 섭정하도록 했다. 중서감(中書監) 유방(劉放)과 손자(孫資)는 오랫동안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진랑 등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래서 혹시 진랑 등에게 해를 입을까 두려워 하여 조우 세력을 제거할려고 몰래 꾸미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조우가 황제 곁에 있어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갑신(甲申)일에, 황제의 의식이 혼미해지자 조우는 조조(曹肇)와 상의할 일이 있다며 궐 밖으로 나가서 안 들어왔고, 황제는 얼마 동안은 오로지 조상(曹爽)하고만 같이 있게 되었다. 유방은 이것을 알고 손자와 불러서 음모를 꾸몄다. 손자가 말했다. "지금 나서는 것은 불가합니다." 유방이 대답했다. "함께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게 생겼는데 어찌 불가능한 게 무엇이 있겠소?" 하고는 곧바로 황제 앞으로 달려가서 엎드려 울면서 말했다. “폐하께서 이처럼 쇠약하시니 만약 피할 수 없는 일이 생긴다면 장차 천하를 누구에게 부탁하시렵니까" 황제가 말했다. "경은 연왕을 대장군으로 임용한 사실을 듣지 못했는가" 유방이 말했다. "폐하께서는 선제의 조칙을 잊으셨습니까? 선제께서는 번왕(籓王)은 정사를 보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막 병이 심해지시자 조조(曹肇)와 진랑(秦朗) 등이 곧바로 입궁해 궐내의 재인(才人)을 데리고 놀고 병수발을 드는 궁녀들을 말로 희롱했습니다.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또 연왕(燕王)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스스로 남면하고는 조신들은 전각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조고(趙高)와 마찬가지로 국권을 훔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황태자께서 유약하시어 정사를 통할할 수 없는데 바깥에는 강하고 난폭한 도적들이 있고 안에는 노역으로 인해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멀리 존망을 생각하시지 아니하시고 옛정과 온정에 얽매여 조종의 기업을 이 두세 사람에게 위탁하려 하십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신지 며칠 동안 안팎에 차단되어 사직이 위태로운 지경이나 이를 알지 못하시니 이는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까닭입니다.” 황제는 유방의 말을 듣자 크게 노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그럼 누가 태자를 보필할 만하오?" 유방과 손자는 이내 조상(曹爽)이 조우를 대신할 수 있다고 하면서 말했다. "마땅히 사마선왕을 불러들여서 상의하십시오." 황제는 이 말에 따르기고 했고, 유방과 손자는 밖으로 나왔다. 조조가 다시 황제에게 와서 울면서 간하였고, 황제는 다시 조조에게 명하여, (방금 전에 행했던) 칙서를 정지시키도록 하였다. 조조가 물러갔다. 유방과 손자가 다시 재빨리 들어와 황제를 다시 설득했다. 황제가 다시 유방의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유방은 황제에게 말했다. "마땅히 친필로 쓴 칙서를 만드십시오." 황제가 말했다. "나는 힘이 없어서 만들 수 없소." 유방이 즉시 천자의 침상 위로 올라가 조예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조서를 쓰게 했다. 유방은 조서 쓰기를 마치자 옥새를 내와 조서에 찍고는 큰 소리로 외쳤다. "연왕(燕王) 조우 등의 관직을 면하라는 조서가 있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이렇게 하여, 조우, 조조, 하후헌, 진랑등은 모두 울면서 집으로 되돌아갔다. <한진춘추>
  2. 조상 등은 이승에 명해 선왕(宣王-사마의)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며 그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선왕은 이승을 접견할 때, 이승은 스스로 별다른 공로도 없이 특은을 입어 본주(本州-이승이 형주 남양 출신이기에 형주를 본주라 일컬음)에 부임하여 작별인사를 드린다 했다. 선왕은 두 명의 계집종에게 부축하게 하고 옷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옷자락이 흘러내렸다. 또 위로 입을 가리켜 목마르다고 하자 계집종이 죽을 올리는데 선왕은 죽그릇을 손에 쥐고 먹는데 모두 흘러내려 가슴팍을 적셨다. 이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주상이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명공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공의 옛 풍질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가 이 지경일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선왕은 느릿느릿 호흡을 가다듬어 겨우 말을 이었다, “나이들고 병에 걸려 죽음이 눈앞에 닥쳤소. 군이 병주(幷州)로 가거든 호(胡)와 가까우니 그들을 잘 방비해야 할 것이오.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렵소이다.” 이승이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본주로 돌아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닙니다” 이에 선왕이 또 혼동하며 말했다, “군이 병주에 도착하거든 노력해서 자신의 몸을 잘 지키시오.” 혼동하여 헛소리를 계속 하자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스럽게도 병주가 아니라, 형주(荊州)입니다” 이에 선왕이 잘못을 깨닫고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었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위말전>
  3. “저 왕릉에게 죄가 있으면 공이 서신을 보내 저를 부르면 되지 어찌하여 몸소 오셨습니까!” 선제가 말했다, “그대는 서신으로 불러서는 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이오.” 왕릉은 수도로 가는 길에 가규의 무덤에 들러 “가양도! 나 왕릉이 대위(大魏)의 충신임을, 그대의 신령이 있다면 잘 알 것이오!” 라고 한 뒤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조표는 죽음을 당하고, 왕릉과 영호우의 무덤이 파헤쳐졌으며, 이 일에 관련된 이들의 삼족이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