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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유정, 「中國 新時期 傷痕文學 硏究」,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 교육학과 중국학교육 2008. 2 | + | *김유정, 「中國 新時期 傷痕文學 硏究」,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 교육학과 중국학교육, 2008. 2 |
− | *김진공, 「현대 중국의 傷痕文學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중국현대문학 | + | *김진공, 「현대 중국의 傷痕文學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중국현대문학 (47), 2008 |
− | *유민희, 「논문(論文) : 포스트 문혁기 문학 속에 나타난 | + | *유민희, 「논문(論文) : 포스트 문혁기 문학 속에 나타난 “5.4” 징후 읽기 -상흔(傷痕)문학, 반사(反思)문학을 중심으로」, 中國語文論叢(JOURNAL OF CHINESE LANGUAGE AND LITERATURE) Vol.58, 2013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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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28일 (화) 22:00 기준 최신판
상흔문학
‘상흔문학’은 1978년 8월 상하이 ≪문회보(文匯報)≫에 발표된 단편소설 <상흔(傷痕)>이 계기가 되어 그 명칭을 얻게 되었는데, 문혁시기 수난과 고초를 당했던 일군의 작가들이 문혁이 종결된 후 다시 문단으로 돌아와 문혁 기간 동안 자신들이 겪었던 경험들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자전적 성격의 소설을 일컫는다. 문학계가 '5.4 신문학'의 전통을 다시 살려내겠다고 분발하는 중에 1977년 11월 호 『인민문학』지에 류신우(劉心武, 1942~)의 문제작인 단편소설 「반주임(班主任)」이 실렸다. 문화대혁명 때 젊은이들이 입은 정신적인 상처가 작품의 주제여서 이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문예게에 큰 자극을 주었다. 류신우는 연이어 같은 성질의 「강의를 끝내지 못한 과목(没有講完的课)」,「누런 겉옷을 입은 청년(穿黄色大衣的青年)」등을 발표하였는데, 1978년에는 루신화의 「상흔(傷痕)」, 머잉펑(莫應豐)의 「대나무 잎(竹葉子)」등 같은 성격의 작품들이 연이어 나와 '상흔문학'이란 말이 생겨났다. 상흔문학은 출현과 동시에 널리 확산되면서 대단한 열풍을 일으켰고, 곧 ‘반사문학’, ‘개혁문학’으로 빠르게 발전되어 갔다. ‘상흔’, ‘반사’, ‘개혁’이라는 문학조류가 이처럼 빠르게 형성되어 발전해갔다는 점은, ‘반문혁’을 모태로 하는 이들 문학의 내적 에너지가 현실 비판 및 현실 개혁 의지와 맞닿아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문혁을 철저히 부정하고 폭로하며 극복할 것을 주지(主旨)로 하는 이들 문학은, ‘개혁’ 혹은 ‘변화’에 대한 시대적 갈망이 가시화되어 나타난 결과라 할 수 있다.
배경
1976년 9월에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사인방>이 같은 해 10월에 체포되면서 문화대혁명이 완전히 종결되고 문예계에는 새로운 <백화제방>의 새 봄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문화대혁명 기간에 거세되었던 수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복권되고, 수많은 문예지들이 복간되었다. 그리고 문혁기간에 해체되었던 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와 중국작가협회 등도 재조직되었다.
건국 이후부터 문예계는 국가의 통제 아래에서 문예 활동을 해왔고, 만약 국가의 문예방침에 어긋날 경우에는 비판과 숙청을 받았다. 실제로 이미 마오쩌둥시대에 많은 작가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억울하게 우파(右派)로 규정되어 희생됨에 따라 창작활동을 공식적으로 중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문혁을 비판하고 문혁이 남긴 상처를 묘사하는 상흔문학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상흔문학의 입지를 강화시켜 준 것이 ‘3중전회’와 ‘제4차문대회’이다. 상흔문학이 권력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첫 번째 계기는 ‘3중전회(1978.12.18-12.22)’이다.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당권을 장악하고 사개현대화와 개혁개방정책의 강력한 실천을 발표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문예계에도 현대화 실천조항이 만들어졌다. 문예계 현대화 6개항은 ① 쌍백방침(雙百方針)의 관철, ② 실사구시, ③ 사상해방, ④ 금기 타파(禁區打破), ⑤ 민주정신 발양, ⑥ 극좌노선 시정 등이다. 이 회의로 말미암아 문혁이 끝났지만 양개범시(兩個凡是)로 인해 위축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의 사상이 해방되었다.
정책적 지원
- 상흔문학 작품이 한두 편으로 끝나지 않고 신시기초기에 많은 수의 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정책적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정권의 후원을 얻어 발전하게 된 주요 경로는 상흔문학이 당 기관지를 비롯한 많은 대형 문학 간행물에 발표되는 것과 전국 우수 중․단편소설 상을 받는 제도이다. 신시기에 이르러 많은 대형 문학 간행물이 복간되거나 창간되었다. 문혁기간 중에 입은 피해를 고발하고 현대화 정책에 호응하는 상흔문학작품들은 당의 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와 중국 작가 협회 기관인 문연(文聯)의 간행물인 《문예보》(1978년 5월 복간) 그리고 그 외 대형 문학 간행물인《인민문학》(1976년 1월 복간), 《시월》(1978년 8월 창간), 《화성》(1979년 4월 창간), 《당대》(1979년 7월 창간), 《청명》(1979년 7월 창간) 등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당의 중앙기관지인 《인민일보》와 그 밖에 전국에서 영향력 있는 대형 문학 간행물에 상흔문학작품이 실렸다는 사실을 통해 정부에서 상흔문학을 적극 지지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78년부터 소설 분야에 상을 수여하는 제도가 만들어졌다. 상흔문학이《인민문학》과《문예보》에서 주관한 전국 우수 중․단편소설과 마오둔(茅盾)문학상을 휩쓸었다. 중요한 점은 전국 우수 소설 상 선출에 있어 상흔문학작품을 빼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설 분야에 이전에 없었던 상을 수여하는 제도를 만들어 공식적으로 상흔문학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은 그 문학이 가지고 있는 주제와 내용을 인정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대표적 작품
1979년 이후로는 문혁 때 '상흔'을 입은 대상이 젊은이들에만 그치지 아니하고 사회운동이 남긴 온 사회 여러 면에 걸쳐 남긴 '상흔'의 추구로 발전하였다. 루지줸(茹志鵑)의 「잘못 편집된 얘기(剪輯錯了的故事)」, 츤꿔카이(陳国凱)의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我應該怎麽辨)」, 꾸화(古華)의 「푸른 등나무로 덮힌 나무 집(爬满青藤的木屋)」, 루엔조우(魯彦周)의 「천운산전기(天雲山傅奇)」, 루야오(路遥)의 「인생(人生)」, 숭푸(宗璞)의 「진흙 속의 해골(泥淖中的頭顱)」등 여러 가지가 쏟아져 나왔다. 1980년을 전후하여 왕멍(王蒙)이 「포례(布禮)」, 「나비(蝴蝶)」, 장셴(張弦)이 「기억(記憶)」, 가오샤오셩(高嘵聲)이 「리슌이 크게 집을 짓다(李順大造屋)」, 「츤환셩이 도시로 나오다(陳奐生上城)」, 장셴량(張賢良)이 「형노인과 개의 얘기(邢老黄和狗的故事)」, 「영과 육(靈舆肉)」등의 소설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일으키었다.
평가
1970년대 말, 상흔문학의 성행은 문학이론비평계 내에서 ‘상흔문학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 논쟁은 상흔문학의 정당성에 대한 정치적 측면의 찬반 입장이 반영된 신시기의 첫 번째 문학 논쟁이었다. 당시 중국 문예계 내에서 문학을 평가하고 접근하는 방식은 여전히 정치적인 측면에 편향되어 있었다. 이는 건국 이후 정치와 문예가 이상적으로 일체화를 이루는지를 검열하는 문예계의 내부적인 통제가 고착화되면서 신시기까지 이어진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상흔문학을 비판하는 글들이 잇따라 발표되자, 많은 비평가들이 상흔문학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 ‘제4차문대회’가 열릴 때까지 논쟁이 계속 진행되는 중에도, 중국 작가 협회 기관인 문연(文聯)의 간행물《문예보》의 지지에 힘입어 상흔문학작품들은 꾸준히 발표되었다. 1979년 10월에 열린 ‘제4차문대회’에서 과거 1942년부터 지속되어 왔던 “문예는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문예방향을 “문예는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사회주의를 위해 봉사한다.”로 당의 문예정책을 수정하여 신시기문예의 방향을 확립하였다. 또한 1980년 1월 23일부터 2월 13일까지 열린‘극본창작좌담회’에서 당은 문예계에 대해 다시 한번 사상해방과 창작의 자유를 약속하였다. 이로써 상흔문학논쟁에서 문제시되었던 ‘문예와 정치의 관계’는 일단락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1981년에 상흔문학작가 바이화(白樺)가〈고연(苦戀)〉으로 인해 비판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고, 1983년에 ‘정신오염 철저 제거운동’이 전개되면서, 문예계의 창작의 자유는 다시 억압되었다. 이로 인해 문예계는 상흔문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긍정적 평가
- 상흔문학을 둘러싸고 문예계 내에서 일어난 논쟁은 정부 차원에서 상흔문학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림으로써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긍정적 평가 역시 문학을 정치적 수단으로 여기는 입장에서는 부정적 평가와 차이가 없었다. 이미 3중전회에서 ‘사상 해방’과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선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정부 및 당에 소속된 문인들의 문예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문학은 정치선전의 도구’라는 의식형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1980년 2월 12~13일에 열린 극본창작좌담회연설에서 당 총서기 후야오방은 신시기문학창작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 "최근 3년여 동안의 문예는 전반적으로 좋은 영향을 파급시켰는데, 그 중 린뱌오와 사인방이 특권을 누리고,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고 속이고, 잘못된 정책을 실시한 것을 폭로하는 작품이 특히 그러하다. 나는 이러한 작품의 대부분을 좋은 작품이라 여긴다. 이것은 문예계가 자국의 인민에게 공헌한 것이며, 역사의 전진을 촉진하는 작용을 한 것이다. (三年來的文藝, 總的來說起了很好的作用, 其中特別是寫了大量揭露林彪、‘四人幇’的東西, 包括批判他們搞特權, 搞冤、假、錯案的作品. 我覺得這些作品的絶大部分是很好的, 是文藝界對我國人民的貢獻, 起了推動歷史前進的作用.)
- 중국작가협회(약칭 작협) 당 조직 서기이자 부주석이었던 장광녠(張光年)은 ‘중국작가협회 제4차 대표대회(1984.12.28-1985.1.5)’에서 1976년 10월부터 1984년 12월까지의 문학창작의 성과를 결산하면서 후야오방이 상흔문학에 대해 내린 긍정적인 평가를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상흔문학의 발생과 발전을구체적으로 탐구하였고, 더 나아가 상흔문학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기도 하였다.
- “소위 ‘상흔문학’이란, 내 생각에는 바로 신시기문학 발전 과정 중에 가장 먼저 용감하고 타협하지 않는 자세로 철저하게 ‘문화대혁명’을 부정한 문학이다. (상흔문학은) 당과 인민의 생명을 지키고 적극적으로 사상해방운동에 헌신하고, 혼란했던 시대를 바로 잡는 임무를 실현한 문학이다.”(所謂‘傷痕文學’, 依我看, 就是在新時期文學發展進程中, 率先以勇敢的、不妥協的姿態徹底地否定‘文化大革命’的文學; 是遵奉黨和人民之命, 積極之投身思想解放運動, 實現拔亂反正的時代任務的文學.)
- 1978년 12월 광동성문학창작좌담회에서, 저우양(周揚)역시 상흔문학을 긍정하였다. 저우양은 “화극〈단심보〉와 단편소설〈방주임〉등의 작품들은 모두‘사인방’을 반대한 투쟁을 쓴 것이며 이것은 모두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에 대해 설령 그 중 몇 몇 작품이 부족함 점이 있더라도, 이를 낮게 평가하거나 혹은 부정적인 태도로 보는 것은 부적절하다. 우리는 린뱌오와 ‘사인방’을 폭로하는 작품을 더욱 많이 필요로 한다.”고 말하였다. 후야오방, 장광녠, 저우양의 평가를 살펴보면, 주로 정치적 입장에서 상흔문학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린뱌오와 사인방의 잘못을 고발하는 문학작품에 큰 의의를 두고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것은 문학으로 하여금 린뱌오와 사인방의 잘못을 고발하게 함으로써 정치적 과오나 책임을 그들에게 전가시키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 또한 상흔문학에는 이런 정치적 의도 외에도 문혁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선구적인 목소리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경직된 문예규범에 따라 틀에 박힌 영웅의 형상을 찍어내던 것에서 벗어나 보통 사람들의 삶과 운명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신시기 창작의 주요한 특징을 앞당겨 보여주었다고 하는 평가이다. 또한 비교적 유치하고 미숙한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생생한 체험에서 우러나온 솔직한 감정 표현은 이후 신시기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장점으로 간주된다. 중국 사회 전체가 10년 동안 이상향의 탐구에 모든 동력을 소진하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온 특수한 상황에서, 문학사의 다른 국면에서는 표현될 수 없는 적나라한 감정의 굴곡이 창작을 통해 여과 없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부정적 평가
- 신시기초기 상흔문학이 역사의 상처를 폭로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마오쩌둥사상에 젖어 있는 보수적 작가들이었다. 이 작가들은 상흔문학을 ‘폭로문학’이라고 비난하였다. 문학의 정치적 효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상흔문학을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나치게 폭로하여 정치․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문학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 이런 상흔문학을 비난하는 최근의 관점 또한 존재한다. 중국의 작가 한샤오궁(韓少功)은 상흔문학에 대해 '바로 얼마 전 중국작가들이 쓴 꽤 정치적인 상흔문학 작품은 그 철학적 빈곤과 심미적 졸렬함으로 인해 이제는 서가에 꽂기조차 멋쩍다.'고 비판한다. 상흔문학이 표방하는 바와 제재로 삼았던 대상을 감안할 때, 그에 대한 가장 뼈아픈 비판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 철저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혁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비판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자기합리화에 그쳐버렸다는 지적은 상흔문학의 존재 근거 자체를 불안하게 만든다. 흔히 상흔문학의 작가는 세 가지 부류로 요약된다. 하나는 50년대에 정치적 비판을 받고 밀려났던 이른바 우파 작가들이며 둘은 문혁 시기에 '혁명의 주력부대'였다가 일거에 '재교육 대상'으로 위상이 급전직하하여 산간벽지에서 힘겨운 노역에 종사했던 작가들이다. 세 번째는 문혁이 끝난 후 중년이 된 나이에 비로소 창작을 시작한 작가들이다. 이 세 부류는 출신성분이나 성향에서 각각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혁에 대한 기억이라는 측면에서는 중요한 공통점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모두가 지식인의 시각으로 문혁을 바라보고 경험한 이들이라는 점이다. 즉 이들에 의해 창작된 상흔문학이란 결국 지식인들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해석하고 재구성한 기억이다. 이는 일반 대중들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 기억을 밀어낸 가상의 사회적 공감대라 비판받는다.
참고문헌
- 김유정, 「中國 新時期 傷痕文學 硏究」,학위논문(석사)-- 인하대학교 교육대학원 : 교육학과 중국학교육, 2008. 2
- 김진공, 「현대 중국의 傷痕文學의 성격에 대한 재검토」, 중국현대문학 (47), 2008
- 유민희, 「논문(論文) : 포스트 문혁기 문학 속에 나타난 “5.4” 징후 읽기 -상흔(傷痕)문학, 반사(反思)문학을 중심으로」, 中國語文論叢(JOURNAL OF CHINESE LANGUAGE AND LITERATURE) Vol.58, 2013
-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