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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싱은 한족 출신으로 본명은 쩐(轸)이나 후에 싱(兴)으로 개명했으며, 자는 크어치앙(克强) | + | 황싱은 한족 출신으로 본명은 쩐(轸)이나 후에 싱(兴)으로 개명했으며, 자는 크어치앙(克强)이다. 중국의 근대민주혁명운동가로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지휘했으며 우창봉기에서는 혁명군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이후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 대총통 쑨원 밑에서 육군총장(육상)에 취임했으며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크어치앙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쑨원과 함께‘쑨황(孙黄)’이라고 불렸다. 저서로는 《황극강선생전집(黄克强先生全集)》, 《황흥집(黄兴集)》, 《황흥미간전고(黄兴未刊电稿)》 및 《황극강선생서한먹적(黄克强先生书翰墨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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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 ||
+ | 본명은 황쩐(黃軫), 자는 크어치앙(克强)으로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 곳의 이름난 서당 훈장이었다. 가정교육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청나라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잘 알고 있었으며 평소에 양수청, 홍수전 등 태평천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즐겨 보고 태평천국 잡사(雜史)를 찾아보고 해 어렸을 때부터 반청 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학과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1902년 호남성 총독 자리에 있는 장즈둥(張之洞)에게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이 유학시절은 황싱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일본에서 머무르는 동안 서양의 지식과 혁명 이론을 당시 중국의 상황과 결합시켰으며,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패한 봉건통치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혁명적 인생길을 걷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1905년 8월, [[쑨원]]이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창립하자 황싱은 집행부 서무가 되어 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 다음에는 중국 광동으로 넘어가 광저우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11년에 발생한 무창봉기에도 참가해 북양군과 한양을 쟁탈하는 격전을 벌였고 결국 청 정부의 봉건 통치는 종말을 고했으며 난징에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황싱은 육군부 총장자리에 취임되지만 이후 [[위안스카이]]가 총통이 되면서 13년에 이에 반대하는 제2혁명에 참가했지만 실패하면서 미국으로 망명가게 된다. 1916년 7월에 황싱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쑨원]]과 함께 혁명 활동을 준비하지만 이미 지칠만큼 지쳐 병에 들게 되고 같은 해 10월 상하이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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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요 업적== | ||
+ | ===화흥회(华兴会) 조직=== | ||
+ |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조직된 반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혁명단체로, 황싱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장사(長沙)에서 천티엔화와 장사 출신 일본 유학생 500여명을 모아 조직했다. 화흥회는 호남성(湖南省)의 비밀결사와 협력해 장사에서 무장봉기를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실패했다.비록 화흥회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화흥회는 중국 내륙에서 첫 번째로 조직된 지역성을 띄고 있는 자본계급혁명단체로 기타 혁명 단체 조직을 촉진시켰으며 전국 통일의 자본계급혁명정당의 조직을 마련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 역할을 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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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동맹회(中国同盟会) 참가=== | ||
+ | 1905년 7월 30일, 쑨원과 황싱은 각 성(省)에 사람을 보내 혁명에 관심 있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진행하는 통일혁명 단체 조직 기획회의에 초대했다. 여기에는 흥중회(兴中会)와 화흥회(华兴会), 광복회(光复会) 및 일본에서 유학중인 기타 조직에 참가 중인 구성원들 등 70여명이 포함되어있었다. 회의에서는 중국동맹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고, 쑨원은 “만주족을 내쫓아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창립하며 지권을 균등하게 할 것.(驱除鞑虏,恢复中华,创立民国,平均地权)”을 목적으로 삼았다. 황싱은 당시 회의에서 혁명의 대의를 강력하게 외쳤으며 동맹회 규약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 ||
+ | 같은 해 8월 20일, 동맹회는 정식적으로 도쿄에서 성립되었으며 이는 저항운동 비밀결사의 이름으로 한족(漢族)의 애국지사, 사회주의 활동가, 공화주의자들이 공동의 목표 아래 백여 명이 참가했다. | ||
+ | 1906년 싱가포르에 지부가 결성되었고 나중에 1911년 청조(淸朝)가 타도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설립되자 1912년 8월 중국 국민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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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저우(广州)봉기 지도=== | ||
+ |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을 포함한 중국동맹회 지도층이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여명으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1911년 3월 29일 황싱이 선봉대를 이끌고 광저우봉기를 일으켰는데 사전에 청나라 정부는 밀정의 보고에 의해 혁명파의 움직임을 면밀히 탐지했기 때문에 혁명파의 결사대가 총독관서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수많은 병사가 그물을 쳐놓고 있었다. 결국 황싱은 광저우봉기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의복을 갈아입고 그의 부인의 도움으로 홍콩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광저우봉기가 실패하면서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포로로 잡혀서 살해된 사람까지 총 86명이었다. 4일 후에 사람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사건', 혹은 '72열사 사건'이라고 부른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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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창봉기(武昌蜂起) 참가=== | ||
+ |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武昌)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군은 신속히 우창, 한양(漢陽), 한커우(漢口)를 해방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안스카이]]가 관군을 끌고 와서 이들을 포위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상하이에서 한커우로 온 황싱은 총사령이라는 어려운 직책을 맡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11월 20일 황싱은 군민들을 지휘하여 북양군과 한양을 쟁탈하는 격전을 벌였다. 황싱의 지휘 하에 한양보위전은 24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청나라군의 대부분을 흡인하게 되었다. 결국 이 우창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신해혁명]]의 불길이 앞당겨져 약 한달 만에 14성(省)이 이에 호응,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성(省)으로 확대되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다. 우창봉기는 우창기의(武昌起义), 우창수의(武昌首义), 제 1차 혁명이라고도 불린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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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민국 임시정부 육군부 총장 취임=== | ||
+ | 1911년 12월 2일 혁명군은 중국 남부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그곳을 혁명세력의 수도로 삼았으며 같은 해 12월 14일 지방 혁명정부를 구성한 대의원들은 황싱을 새 공화국 총통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황싱은 총통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며, [[쑨원]]이 귀국하자 그를 임시 대총통으로 뽑았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황싱은 육군부 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와의 갈등 때문에 [[쑨원]]은 임시 총통직을 사임하고 그에게 양보했으며 수도는 난징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겨갔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황싱에게 총리와 군사령관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계속 거절했다. 이렇게 난징의 임시정부가 철소되자 황싱은 외국으로 떠났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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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가== | ||
+ |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쑨원]]이 사상가였다면 황싱은 그의 사상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가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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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안스카이]]는 일찍이 [[쑨원]]과 황싱에 대해 '''"[[쑨원]]의 패기와 견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으며 단순 그것을 주장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그쳤다. 황싱은 성품이 매우 곧으며 직접 실천하여 결과를 낼 수 있었지만 아는 것이 짧고 담이 작은 것을 면치 못해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기만을 받기 쉬웠다."'''<ref name="추가설명번역">孙氏志气高尚,见解亦超卓,但非实行家,徒居发起人之列而已。黄氏性质直,果于行事,然不免胆小识短,易受小人之欺。</ref>.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br> | ||
+ | *장타이옌(章太炎)은 그의 죽음을 기리며 '''"당신이 없었으면 중화민국도 없었을 것이며, 역사에는 필히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ref name="추가적설명번역">无公乃无民国,有史必有斯人。</ref>.라고 말한 적이 있다.<br> | ||
+ | *리수청(李书城)은 '''"그는 가장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직무를 맡았을 때에는 공을 세우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정정당당했으며 전투를 할 때에는 늘 앞장을 섰다. 비판을 받았을 때는 해명하려 하지 않았으며 해를 입었을 때는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본인의 장점을 내세우지 않았다."'''<ref name="추가적번역">克强总是个最平实的人,做事有功不居,光明磊落,作战身先士卒,受谤不言诠,受害不怨尤,不道人之短,不说己之长。</ref>.라고 황싱을 평가했다.<br> | ||
+ | *펑즈요(冯自由)는 '''" 세상 사람들은 [[쑨원]]과 황싱을 개국 공신이라고 칭하며 그는 그러한 칭호와 영예를 받기에 부끄럽거나 부족한 점이 전혀 없다."'''<ref name="추가로번역함">世称孙、黄为开国二杰,克强诚当之无愧矣。</ref>.라고 말한 적이 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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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물 관련 유적 == | ||
+ | ===황싱묘(黄兴墓)=== | ||
+ | 42세에의 젊은 나이로 상하이에서 병사한 그의 묘를 다음해인 1917년에 그의 고향인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웨이루산(岳麓山)으로 이장하였다. 무덤은 총 3층으로 지어져 약 100 여 개의 돌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고 무덤 앞에는 공양물을 올리는 단과 돌의자가 있으며, 마치 탑과 같이 우뚝 솟은 비석이 있다. 비석의 높이는 약 10m로 “황공극강의묘(黃公克強之墓)”라고 새겨져 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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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싱공원(黄兴公园)=== | ||
+ | 상하이에 조성된 공원으로 복단대학교, 외국어대학교, 재경대학교 등의 대학교가 밀집해있는 오각장 부근에 위치하고있다. 약 600만평으로 신해혁명의 주요인물이자 중화민국 개국에 힘 써준 황싱의 이름을 따서 공원 이름을 황싱공원이라고 지었다. 입장은 무료이며 개방시간은 계절마다 다르지만 약 5시부터 7시가 되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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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싱보행길(黄兴路步行街)=== | ||
+ | 황싱보행길은 황싱의 고향인 창사에 위치한 제일 번화한 길로 2002년에 상업거리로 조성된 길이다. 총 838m의 길이를 자랑하며 넓이는 23에서 26m, 보행길 안에는 황싱광장도 포함되어 있다. 쇼핑, 오락, 음식 등 즐길거리가 다양한 종합성 번화가이다. 보행길 중간에는 황싱 동상도 세워져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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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물 관련 작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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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border="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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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
+ | |드라마 《辛亥革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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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
+ | |영화 《第一大总统》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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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 | ||
+ | |영화 《辛亥革命》 | ||
+ | |- | ||
+ | |2011 | ||
+ | |영화 《建党伟业》 | ||
+ | |} | ||
+ | |||
+ | ==참고자료== | ||
+ | |||
+ | 1) 펄벅 저, 은하랑 옮김,『청년쑨원』, 길산, 2011 <br> 2) 배경한 저,『동아시아 역사 속의 신해혁명』, 한울아카데미, 2013 <br> 3) 풍국초 저, 이원길 옮김, 『중국상하오천년사』, 신원문화사, 2008<br> 4) 龙海燕,彭平一저,⌜近二十年来黄兴思想研究综述⌟,『湖南工业大学学报(社会科学版)』, 中国社会出版社, 2004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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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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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ferences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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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부링크== | ||
+ | * [http://baike.baidu.com/item/%E9%BB%84%E5%85%B4/794390?fr=aladdin 바이두백과]<br> | ||
+ | * [http://v.ifeng.com/documentary/history/201302/bfe93756-e006-4d4c-8e5d-59efc2480756.shtml 황싱특집동영상] |
2016년 12월 7일 (수) 21:56 기준 최신판
황싱(黃興) | |
---|---|
| |
출생 |
1874.10.25. 호남성 장사(湖南省 長沙) |
사망 |
1916.10.31. 강소성 상해(江蘇省 上海) |
민족 | 한족(漢族) |
별칭 | 극강(克强) |
관련 활동 | 혁명운동가 |
목차
개요
황싱은 한족 출신으로 본명은 쩐(轸)이나 후에 싱(兴)으로 개명했으며, 자는 크어치앙(克强)이다. 중국의 근대민주혁명운동가로 여러 차례의 무장봉기를 지휘했으며 우창봉기에서는 혁명군 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이후 1912년 성립된 중화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 대총통 쑨원 밑에서 육군총장(육상)에 취임했으며 신해혁명을 이끌었던 지도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크어치앙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쑨원과 함께‘쑨황(孙黄)’이라고 불렸다. 저서로는 《황극강선생전집(黄克强先生全集)》, 《황흥집(黄兴集)》, 《황흥미간전고(黄兴未刊电稿)》 및 《황극강선생서한먹적(黄克强先生书翰墨绩)》이 있다.
생애
본명은 황쩐(黃軫), 자는 크어치앙(克强)으로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 곳의 이름난 서당 훈장이었다. 가정교육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청나라 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잘 알고 있었으며 평소에 양수청, 홍수전 등 태평천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즐겨 보고 태평천국 잡사(雜史)를 찾아보고 해 어렸을 때부터 반청 의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학과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1902년 호남성 총독 자리에 있는 장즈둥(張之洞)에게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이 유학시절은 황싱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그는 일본에서 머무르는 동안 서양의 지식과 혁명 이론을 당시 중국의 상황과 결합시켰으며,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부패한 봉건통치를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혁명적 인생길을 걷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1905년 8월, 쑨원이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창립하자 황싱은 집행부 서무가 되어 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데 일조했다. 그 다음에는 중국 광동으로 넘어가 광저우무장봉기를 일으켰다. 1911년에 발생한 무창봉기에도 참가해 북양군과 한양을 쟁탈하는 격전을 벌였고 결국 청 정부의 봉건 통치는 종말을 고했으며 난징에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황싱은 육군부 총장자리에 취임되지만 이후 위안스카이가 총통이 되면서 13년에 이에 반대하는 제2혁명에 참가했지만 실패하면서 미국으로 망명가게 된다. 1916년 7월에 황싱은 다시 상하이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쑨원과 함께 혁명 활동을 준비하지만 이미 지칠만큼 지쳐 병에 들게 되고 같은 해 10월 상하이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주요 업적
화흥회(华兴会) 조직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조직된 반청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주의적 혁명단체로, 황싱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장사(長沙)에서 천티엔화와 장사 출신 일본 유학생 500여명을 모아 조직했다. 화흥회는 호남성(湖南省)의 비밀결사와 협력해 장사에서 무장봉기를 기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돼 실패했다.비록 화흥회가 오랫동안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그 영향력은 대단했다. 화흥회는 중국 내륙에서 첫 번째로 조직된 지역성을 띄고 있는 자본계급혁명단체로 기타 혁명 단체 조직을 촉진시켰으며 전국 통일의 자본계급혁명정당의 조직을 마련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 역할을 했다.
중국동맹회(中国同盟会) 참가
1905년 7월 30일, 쑨원과 황싱은 각 성(省)에 사람을 보내 혁명에 관심 있는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도쿄에서 진행하는 통일혁명 단체 조직 기획회의에 초대했다. 여기에는 흥중회(兴中会)와 화흥회(华兴会), 광복회(光复会) 및 일본에서 유학중인 기타 조직에 참가 중인 구성원들 등 70여명이 포함되어있었다. 회의에서는 중국동맹회를 조직할 것을 결정하였고, 쑨원은 “만주족을 내쫓아 중화를 회복하고, 민국을 창립하며 지권을 균등하게 할 것.(驱除鞑虏,恢复中华,创立民国,平均地权)”을 목적으로 삼았다. 황싱은 당시 회의에서 혁명의 대의를 강력하게 외쳤으며 동맹회 규약을 마련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같은 해 8월 20일, 동맹회는 정식적으로 도쿄에서 성립되었으며 이는 저항운동 비밀결사의 이름으로 한족(漢族)의 애국지사, 사회주의 활동가, 공화주의자들이 공동의 목표 아래 백여 명이 참가했다.
1906년 싱가포르에 지부가 결성되었고 나중에 1911년 청조(淸朝)가 타도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이 설립되자 1912년 8월 중국 국민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광저우(广州)봉기 지도
1910년 10월 쑨원과 황싱을 포함한 중국동맹회 지도층이 비밀회의를 열고 자금을 모집해 동맹회원 500여명으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고 광저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1911년 3월 29일 황싱이 선봉대를 이끌고 광저우봉기를 일으켰는데 사전에 청나라 정부는 밀정의 보고에 의해 혁명파의 움직임을 면밀히 탐지했기 때문에 혁명파의 결사대가 총독관서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완전히 비어 있었고 수많은 병사가 그물을 쳐놓고 있었다. 결국 황싱은 광저우봉기에서 오른쪽 손가락을 두 마디나 잘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싸웠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의복을 갈아입고 그의 부인의 도움으로 홍콩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광저우봉기가 실패하면서 봉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고, 포로로 잡혀서 살해된 사람까지 총 86명이었다. 4일 후에 사람들이 나서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체를 72구 찾아 황화강(黃花岡)에 집단 안장했는데 이를 ‘황화강사건', 혹은 '72열사 사건'이라고 부른다.
우창봉기(武昌蜂起) 참가
1911년 10월 10일에 우창(武昌)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봉기군은 신속히 우창, 한양(漢陽), 한커우(漢口)를 해방시켰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안스카이가 관군을 끌고 와서 이들을 포위했다.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 상하이에서 한커우로 온 황싱은 총사령이라는 어려운 직책을 맡고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11월 20일 황싱은 군민들을 지휘하여 북양군과 한양을 쟁탈하는 격전을 벌였다. 황싱의 지휘 하에 한양보위전은 24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청나라군의 대부분을 흡인하게 되었다. 결국 이 우창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신해혁명의 불길이 앞당겨져 약 한달 만에 14성(省)이 이에 호응, 궐기했고 12월 말에는 17성(省)으로 확대되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였다. 우창봉기는 우창기의(武昌起义), 우창수의(武昌首义), 제 1차 혁명이라고도 불린다.
중화민국 임시정부 육군부 총장 취임
1911년 12월 2일 혁명군은 중국 남부 난징(南京)을 점령하여 그곳을 혁명세력의 수도로 삼았으며 같은 해 12월 14일 지방 혁명정부를 구성한 대의원들은 황싱을 새 공화국 총통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황싱은 총통직을 수락하지 않았으며, 쑨원이 귀국하자 그를 임시 대총통으로 뽑았다. 1912년 1월 1일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황싱은 육군부 총장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와의 갈등 때문에 쑨원은 임시 총통직을 사임하고 그에게 양보했으며 수도는 난징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겨갔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황싱에게 총리와 군사령관직을 맡아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계속 거절했다. 이렇게 난징의 임시정부가 철소되자 황싱은 외국으로 떠났다.
평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쑨원이 사상가였다면 황싱은 그의 사상을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실행가였다고 한다.
- 위안스카이는 일찍이 쑨원과 황싱에 대해 "쑨원의 패기와 견해는 뛰어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으며 단순 그것을 주장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그쳤다. 황싱은 성품이 매우 곧으며 직접 실천하여 결과를 낼 수 있었지만 아는 것이 짧고 담이 작은 것을 면치 못해 지위가 낮은 사람들의 기만을 받기 쉬웠다."[1].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
- 장타이옌(章太炎)은 그의 죽음을 기리며 "당신이 없었으면 중화민국도 없었을 것이며, 역사에는 필히 당신같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2].라고 말한 적이 있다.
- 리수청(李书城)은 "그는 가장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직무를 맡았을 때에는 공을 세우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정정당당했으며 전투를 할 때에는 늘 앞장을 섰다. 비판을 받았을 때는 해명하려 하지 않았으며 해를 입었을 때는 원망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았고 본인의 장점을 내세우지 않았다."[3].라고 황싱을 평가했다.
- 펑즈요(冯自由)는 " 세상 사람들은 쑨원과 황싱을 개국 공신이라고 칭하며 그는 그러한 칭호와 영예를 받기에 부끄럽거나 부족한 점이 전혀 없다."[4].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물 관련 유적
황싱묘(黄兴墓)
42세에의 젊은 나이로 상하이에서 병사한 그의 묘를 다음해인 1917년에 그의 고향인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웨이루산(岳麓山)으로 이장하였다. 무덤은 총 3층으로 지어져 약 100 여 개의 돌계단을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고 무덤 앞에는 공양물을 올리는 단과 돌의자가 있으며, 마치 탑과 같이 우뚝 솟은 비석이 있다. 비석의 높이는 약 10m로 “황공극강의묘(黃公克強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황싱공원(黄兴公园)
상하이에 조성된 공원으로 복단대학교, 외국어대학교, 재경대학교 등의 대학교가 밀집해있는 오각장 부근에 위치하고있다. 약 600만평으로 신해혁명의 주요인물이자 중화민국 개국에 힘 써준 황싱의 이름을 따서 공원 이름을 황싱공원이라고 지었다. 입장은 무료이며 개방시간은 계절마다 다르지만 약 5시부터 7시가 되겠다.
황싱보행길(黄兴路步行街)
황싱보행길은 황싱의 고향인 창사에 위치한 제일 번화한 길로 2002년에 상업거리로 조성된 길이다. 총 838m의 길이를 자랑하며 넓이는 23에서 26m, 보행길 안에는 황싱광장도 포함되어 있다. 쇼핑, 오락, 음식 등 즐길거리가 다양한 종합성 번화가이다. 보행길 중간에는 황싱 동상도 세워져있다.
인물 관련 작품
년도 | 작품명 |
---|---|
2001 | 드라마 《孙中山》 |
2003 | 드라마 《走向共和》 |
2011 | 드라마 《辛亥革命》 |
2011 | 영화 《第一大总统》 |
2011 | 영화 《辛亥革命》 |
2011 | 영화 《建党伟业》 |
참고자료
1) 펄벅 저, 은하랑 옮김,『청년쑨원』, 길산, 2011
2) 배경한 저,『동아시아 역사 속의 신해혁명』, 한울아카데미, 2013
3) 풍국초 저, 이원길 옮김, 『중국상하오천년사』, 신원문화사, 2008
4) 龙海燕,彭平一저,⌜近二十年来黄兴思想研究综述⌟,『湖南工业大学学报(社会科学版)』, 中国社会出版社,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