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造物主,怯弱者,羞惭了,于是伏藏。天地在猛士的眼中于是变色。
 
造物主,怯弱者,羞惭了,于是伏藏。天地在猛士的眼中于是变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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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은 「『들풀』영역본 머리말」에서 “돤치루이(段祺瑞) 정부가 맨손의 민중에게 발포한 일이 있은뒤에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를 지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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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핏자국 속에서」에서는 겁쟁이와 비겁자의 신이며, 그에 맞서 일어나는 ‘반역의 사나운 용사’가 등장한다. ‘반역의 용사’의 등장은 주어진 삶의 조건과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안주하는 비겁한 양민들, 그리고 그들을 존속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세상을 유지해나가던 비겁한 조물주는 숨게 된다. 다시 말해 용사는 세상을 완전히 다른 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는 불요불굴의 반항과 투쟁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br>
‘하늘의 벌을 받은 자’의 원문은 ‘천지륙민’(天之僇民), 하늘의 징벌을 받은 사람, 즉 죄인이라는 뜻이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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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루쉰은 「『들풀』영역본 머리말」에서 “돤치루이(段祺瑞) 정부가 맨손의 민중에게 발포한 일이 있은뒤에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는 루쉰 자신의 현실로, 사회적 자리에로 복귀하는 결단의 선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동안의 허무와 암흑, 죽음에 대한 고뇌를 하던 실존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이러한 루쉰의 의지는 이틀 후 쓰여진 「[[각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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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금) 17:05 기준 최신판

원문

——记念几个死者和生者和未生者

目前的造物主,还是一个怯弱者。 他暗暗地使天变地异,却不敢毁灭一个这地球;暗暗地使生物衰亡,却不敢长存一切尸体;暗暗地使人类流血,却不敢使血色永远鲜秾;暗暗地使人类受苦,却不敢使人类永远记得。 他专为他的同类——人类中的怯弱者——设想,用废墟荒坟来衬托华屋,用时光来冲淡苦痛和血痕;日日斟出一杯微甘的苦酒,不太少,不太多,以能微醉为度,递给人间,使饮者可以哭,可以歌,也如醒,也如醉,若有知,若无知,也欲死,也欲生。他必须使一切也欲生;他还没有灭尽人类的勇气。 几片废墟和几个荒坟散在地上,映以淡淡的血痕,人们都在其间咀嚼着人我的渺茫的悲苦。但是不肯吐弃,以为究竟胜于空虚,各各自称为“天之僇民”,以作咀嚼着人我的渺茫的悲苦的辩解,而且悚息着静待新的悲苦的到来。新的,这就使他们恐惧,而又渴欲相遇。 这都是造物主的良民。他就需要这样。 叛逆的猛士出于人间;他屹立着,洞见一切已改和现有的废墟和荒坟,记得一切深广和久远的苦痛,正视一切重叠淤积的凝血,深知一切已死,方生,将生和未生。他看透了造化的把戏;他将要起来使人类苏生,或者使人类灭尽,这些造物主的良民们。 造物主,怯弱者,羞惭了,于是伏藏。天地在猛士的眼中于是变色。

해제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에서는 겁쟁이와 비겁자의 신이며, 그에 맞서 일어나는 ‘반역의 사나운 용사’가 등장한다. ‘반역의 용사’의 등장은 주어진 삶의 조건과 부조리의 세계 속에서 안주하는 비겁한 양민들, 그리고 그들을 존속함으로써 자신들만의 세상을 유지해나가던 비겁한 조물주는 숨게 된다. 다시 말해 용사는 세상을 완전히 다른 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이는 불요불굴의 반항과 투쟁정신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루쉰은 「『들풀』영역본 머리말」에서 “돤치루이(段祺瑞) 정부가 맨손의 민중에게 발포한 일이 있은뒤에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를 지었다”고 하였다. 이를 종합하여 보면 「흐릿한 핏자국 속에서」는 루쉰 자신의 현실로, 사회적 자리에로 복귀하는 결단의 선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 동안의 허무와 암흑, 죽음에 대한 고뇌를 하던 실존적 자아에서 사회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이러한 루쉰의 의지는 이틀 후 쓰여진 「각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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