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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5일 (일) 01:41 판
모공정(毛公鼑)
- 명 칭 : 모공정(毛公鼑)
- 시 대 : 중국/서주(西周) B.C 827~B.C 782 추정
- 재 질 : 청동(靑銅)
- 용 도 : 정(鼑)/기념품(紀念品)
- 크 기 : 높이 53.8cm, 상부의 구경 47.9cm, 내부 깊이 27.2cm, 무게 34.7kg
- 소재지 : 대만(臺灣)/국립고궁박물원(國立故宮博物院)
모공정(毛公鼑)의 유래
모공정(毛公鼑)은 청(淸) 도광(道光) 말년 기산(岐山)에서 출토된 서주(西周)후기의 대표적 기물이다. 명문이 32행으로 모두 497자가 수록되어 있다.[1] 모공정이 만들어진 시대는 서주(西周)의 후기 선왕(宣王: 재위 B.C 827~B.C 782) 무렵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며, 명문은 난해하나 전체적인 내용은 당시 꽤 혼란한 상태였던 정치를 부흥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주왕(周王)이 모공(毛公)이란 사람에게 정치를 전면적으로 맡기고, 수레, 말, 옷가지 등을 고마움에 대한 상으로 내린 기념으로 이 정(鼑)을 만들었다고 한다. 글자체는 정연하고 일사불란하며 훌륭한 풍격(風格)을 갖추고 있어 주대(周代) 금문(金文)의 최고 걸작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다.[2] 모공정은 아름다울뿐만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정중의 정이라고 불리는 모공정은 중국 청동기 명문 중 가장 긴 문장을 이루며 자체는 힘있고 장중하다. 청말 유명한 서예가였던 李端淸은 “모공정은 周의 묘학(廟學) 문자로서, 바로 상서(尙書)였다. 모공정을 배우지 않는 것은 마치 유생이 상서를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여 그 가치를 한껏 높였다.[3]
문서로서의 명문(銘文)
모공정의 명문처럼 긴 문장을 청동기에 쓴 것은 청동기의 내구성에 착안하면 문장을 언제까지나 보존하려고 한 것이다. 결국 모공정의 명문은 신이나 조상의 영혼에게 바치는 말은 아니고 제작자의 자손 등에게 읽히고 후세에 전하기 위한 기록문서다. 따라서 문체는 고대의 성인이나 왕의 말씀을 기록했다고 하는 『서경(書經)』가운데에서도 주대에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여러 편의 문장과 매우 비슷하다. 무릇 현재까지 전해져오는 고대 문헌의 직접적인 원형은 실은 이같은 청동기의 명문이었다.[4]
박물원 모공정 전시 영상
중국의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자 중국인들의 자부심인 모공정은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에 소재되어 있다. 박물원에서는 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모공정의 명문을 스크린에 출력하고, 현대 중국어로의 번역을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