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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일을 전하는 사람의 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나라 성왕이 오동잎을 어린 아우에게 주며 장난으로 말하였다. “이로써 너를 봉하노라.” 주공이 입궐해 축하하니, 왕이 말하였다. “장난이었다.” 이에 주공이 말하였다. “천자는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우는 당나라에 봉해졌다. <br> | 옛 일을 전하는 사람의 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나라 성왕이 오동잎을 어린 아우에게 주며 장난으로 말하였다. “이로써 너를 봉하노라.” 주공이 입궐해 축하하니, 왕이 말하였다. “장난이었다.” 이에 주공이 말하였다. “천자는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우는 당나라에 봉해졌다. <br> | ||
나는 그 이야기가 그릇 전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성왕의 아우를 제후로 봉해야 하였다면, 주공은 적당한 때에 왕께 말씀드렸을 것이다. 그런 농담을 기다렸다가 축하하며 그 말을 이루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해서는 안 되는 경우였다면, 주공이 도리에 맞지 않는 장난의 말을 이루어 땅과 백성을 어린 사람에게 주어 주인이 되게 하였으니, | 나는 그 이야기가 그릇 전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성왕의 아우를 제후로 봉해야 하였다면, 주공은 적당한 때에 왕께 말씀드렸을 것이다. 그런 농담을 기다렸다가 축하하며 그 말을 이루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해서는 안 되는 경우였다면, 주공이 도리에 맞지 않는 장난의 말을 이루어 땅과 백성을 어린 사람에게 주어 주인이 되게 하였으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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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辨)은 ‘판별한다’의 뜻으로, 시비를 가려서 참되고 거짓됨을 판별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변은 『[[맹자]](孟子)』,『[[장자]](莊子)』 등과 같은 글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유종원]], [[한유]]가 가장 먼저 창작한 논설문체의 일종으로 이들은 사리의 시비진위를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는데 자주 이용되었다.<br> | 변(辨)은 ‘판별한다’의 뜻으로, 시비를 가려서 참되고 거짓됨을 판별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변은 『[[맹자]](孟子)』,『[[장자]](莊子)』 등과 같은 글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유종원]], [[한유]]가 가장 먼저 창작한 논설문체의 일종으로 이들은 사리의 시비진위를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는데 자주 이용되었다.<br> | ||
같은 변이란 명제 하에 썼다 하여도 『[[초사]](楚辭)』의 [[구변]](九辨)은 후대의 변과는 성격이 다르며,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도 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로 본다면 [[당]](唐)나라 이전에는 변이란 문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변체가 지어진 것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휘변]](諱辨)」과 유종원(柳宗元)의 「동엽봉제변(桐葉封弟辨)」에서 비롯되어 [[송]](宋)나라 이후에 문체의 한 명목으로 정착된 것이다. | 같은 변이란 명제 하에 썼다 하여도 『[[초사]](楚辭)』의 [[구변]](九辨)은 후대의 변과는 성격이 다르며,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도 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로 본다면 [[당]](唐)나라 이전에는 변이란 문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변체가 지어진 것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휘변]](諱辨)」과 유종원(柳宗元)의 「동엽봉제변(桐葉封弟辨)」에서 비롯되어 [[송]](宋)나라 이후에 문체의 한 명목으로 정착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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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
+ | 유종원, 고역생, 남철진 역, 학고방, 2005 | ||
+ | 고문진보-후집(문편)-, 황견, 육문사, 2015 |
2016년 12월 27일 (화) 05:17 판
작품정보
작품명 | 동엽봉제변《桐葉封弟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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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유종원 |
창작시기 | 당대 |
작품형식 | 의론문 |
작품출처 | 유하동집《柳河東集》 |
작품원문
古之傳者有言: 成王以桐葉與小弱弟 戲, 曰:"以封汝." 周公入賀. 王曰: "戲也." 周公曰: "天子不可戲." 乃封小弱弟於唐.
吾意不然. 王之弟當封邪, 周公宜以時言於王, 不待其戲而賀以成之也. 不當封邪, 周公乃成其不中之戲, 以地以人與小弱者爲之主, 其得爲聖乎? 且周公以王之言不可苟焉而已, 必從而成之邪? 設有不幸, 王以桐葉戲婦寺, 亦將擧而從之乎? 凡王者之德, 在行之何若. 設未得其當, 雖十易之不爲病; 要於其當, 不可使易也, 而況以其戲乎! 若戲而必行之, 是周公敎王遂過也.
吾意周公輔成王, 宜以道, 從容優樂, 要歸之大中而已, 必不逢其失而爲之辭. 又不當束縛之馳驟之, 使若牛馬然, 急則敗矣. 且家人父子尙不能以此自克, 況號爲君臣者邪! 是直小丈夫缺缺者之事, 非周公所宜用, 故不可信.
或曰: 封唐叔,史佚成之.
작품독음
고지전자 유언 성왕이동엽여소약제 희왈 이봉여. 주공입하. 왕왈 희야. 주공왈, 천자불가희. 내봉소약제어당.
오의불연. 왕지제당봉야, 주공의이시언어왕, 부대기희이하이성지야. 부당봉야, 주공내성기부중지희, 이지이인여소약자위지주, 기득위성호? 차주공이왕지언불가구언이이, 필종이성지야? 설유불행, 왕이동엽희부시, 역장거이종지호? 범왕자지덕, 재행지하약, 설미기득당, 수십역지불위병. 요어기당, 불가사역야, 이황이기희호! 약희이필행지, 시주공교왕수과야.
오의주공보성왕, 의이도, 종용우락, 요귀지대중이이, 필불봉기실이위지사. 우부당속박지치취지, 사약우마연, 급즉패의. 차가인부자상부능이차자극, 황호위군신자야! 시직소장부결결자지사, 비주공소의용, 고불가신.
혹왈, 봉당숙, 사일성지.
작품해석
옛 일을 전하는 사람의 말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주나라 성왕이 오동잎을 어린 아우에게 주며 장난으로 말하였다. “이로써 너를 봉하노라.” 주공이 입궐해 축하하니, 왕이 말하였다. “장난이었다.” 이에 주공이 말하였다. “천자는 농담을 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우는 당나라에 봉해졌다.
나는 그 이야기가 그릇 전해진 것이라 생각한다. 성왕의 아우를 제후로 봉해야 하였다면, 주공은 적당한 때에 왕께 말씀드렸을 것이다. 그런 농담을 기다렸다가 축하하며 그 말을 이루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봉해서는 안 되는 경우였다면, 주공이 도리에 맞지 않는 장난의 말을 이루어 땅과 백성을 어린 사람에게 주어 주인이 되게 하였으니,
성인이라 불릴 수 있었겠는가? 또 주공은 왕의 말이 구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그 말을 따라서 이루어야만 하였겠는가? 가령 불행하게도 성왕께서 여자나 환관에게 오동잎으로 농담을 하였다면,
그래도 들추어내어 그것을 따르게 하였겠는가? 무릇 왕자의 덕은
일을 어떻게 행하느냐에 있으니,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열 번을 고치더라도 허물될 것이 없다. 도리에 맞는다면 고쳐서는 안 될 것이니, 하물며 장난삼아 한 이야기에 있어서랴? 장난이었는데도 그 말을 실행하도록 한다면, 주공이 왕에게 잘못을 하도록 가르친 것이다.
나는 주공이 성왕을 보필함에 오직 올바른 도로써 하며, 조용하고 침착하며 여유 있고 즐겁게 함으로써 지극한 중정으로 이끌려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반드시 왕의 과실을 만나 그것을 구실로 삼지 않았을 것이고, 또 왕을 속박하고 몰아붙여 소나 말처럼 했을 리 없으니, 급하면 실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로써는 극복해 나갈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군신 관계에 있어서랴? 이는 실로 소인들로서 잔재주를 부리는 자의 일이요, 주공이 썼을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믿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당나라에 숙우를 봉하게 된 것은, 태사 윤일(尹佚)이 한 일이다.”
작품배경
이 글은 유향(劉向)의 『설원(說苑)』군도편(君道篇)과 『사기史記』 진세가晋世家에 있는 설화를 논변(論辯)한 글이다. 진세가에 의하면, 성왕과 아우 숙우가 함께 놀던 중, 성왕이 오동잎을 규(珪:제후를 봉하는, 옥으로 만든 印)의 모양으로 깎아 아우에게 주며, '이것으로써 너를 봉한다.'고 말했다. 태사 윤일이 그 말을 듣고, 정식으로 숙우를 제후에 봉하도록 요구했고 성왕은 “나는 그와 농담한 것뿐이오.”라 했지만 태사 윤일이 “제왕에게 농담이란 없습니다. 무릇 제왕이 한 말은 역사가 그것을 기록하고 예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즐겁게 부르고 연주합니다.”고 하여 마침내 숙우를 당(唐)땅에 봉했고 이후에 진국(晉國)이 되었다.
그런데 전국시대 『여씨춘추•중언편(呂氏春秋•重言篇)』과 한대(漢代) 유향(劉向)의 『설원•군도편(說苑•君道篇)』등에는 이 일이 대정치가 주공(周公)이 서둘러 이루게 한 것이다고 말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크게 칭찬하며 제왕의 통치와 위신을 보호하는 모범으로 삼고 있다. 주공단(周公旦)은 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인물인데, 유종원은 이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일을 했을 리가 없다고 여기고 「동엽봉제변」을 썼다.
작품해설
“토지와 백성을 어리고 약한 자에게 주어 주군을 삼게 한 것이니, 어찌 그를 성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불행히도 왕이 오동나무잎으로 비빈이나 환관에게 장난을 쳤더라도 그 일을 성사시키겠는가?” 이런 글자와 행간에는 귀족 정치와 환관의 전횡 등 불합리한 현상에 대한 작가의 강렬한 불만이 나타나 있다. “무릇 왕의 덕은 행동여하에 달려 있다.”는 말은 전체 글의 핵심 문구로, 통치자의 언론과 행위는 그것이 어떻게 실행되는가를 봐야하며 또한 객관적 효과를 통해 점검을 해야 하는데, 만약 정당하지 못하다면 부단히 개혁을 해야 하고 정당한 것만 고수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예리하고도 소박한 유물주의 관점이다. 봉건 전제시대에 군주는 지고지상(至高至上)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 말을 하면 곧 법이 따라, 신하들에게는 오직 절대적 복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유종원은 이의(異議)를 견지했으니 그의 이 의론은 매우 대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말에는 합당함도 있고 부당함도 있으니 얽매여서 맹종해 서는 안되는 것이다.
작품 말미에서 “혹자는 이 일을 사일이 한 것이다라고 한다.”고 하며 인용은 했으나 단정 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의(含意)가 절로 드러나니, 그 여운의 효과가 매우 크다. 청(淸)의 임운명(林雲銘)은 『고문적의(古文析義)』에서 “필획이 칼날 같고 매우 강건하니 변체(辨體) 가운데 가장 훌륭한 글이다."고 높은 평가를 부여하였다.
작품특징
변(辨)은 ‘판별한다’의 뜻으로, 시비를 가려서 참되고 거짓됨을 판별하는 목적으로 쓰여진 글이다. 변은 『맹자(孟子)』,『장자(莊子)』 등과 같은 글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유종원, 한유가 가장 먼저 창작한 논설문체의 일종으로 이들은 사리의 시비진위를 분석하여 판단을 내리는데 자주 이용되었다.
같은 변이란 명제 하에 썼다 하여도 『초사(楚辭)』의 구변(九辨)은 후대의 변과는 성격이 다르며, 유협(劉勰)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서도 변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로 본다면 당(唐)나라 이전에는 변이란 문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변체가 지어진 것은 당나라 한유(韓愈)의 「휘변(諱辨)」과 유종원(柳宗元)의 「동엽봉제변(桐葉封弟辨)」에서 비롯되어 송(宋)나라 이후에 문체의 한 명목으로 정착된 것이다.
출처
유종원, 고역생, 남철진 역, 학고방, 2005 고문진보-후집(문편)-, 황견, 육문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