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태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hines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사용자 3명의 중간 판 1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당 태종 [[이세민]]은 이연의 둘째 아들이다.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다. 이리하여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그 후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즉위 후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시기는 정관의 치세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 왕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위징이라는 자의 간언이 두드러졌다.
+
{{인물정보
 +
|이름 = 당 태종
 +
|그림 = 당태종.jpg|200픽셀
 +
|재위 = 626년 ~ 649년
 +
|출생 = 599년 1월 23일
 +
|사망 = 649년 7월 10일
 +
|부황 = [[고조]]
 +
}}
 +
 
 +
==당 태종의 생애==
 +
이세민은 599년 1월 23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북주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 명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두씨는 선비족의 귀족이었다. 16세에 장교가 되어 18세부터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br>
 +
617년, 아버지를 따라 태원 지방에 있던 이세민은 수양제의 실정으로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상황에서 거병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당이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크게 여섯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세민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하였다. <br>
 +
맏형 이건성도 앉아만 있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형제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적진에 뛰어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의 건국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이건성에게 돌아갔고, 이세민은 진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기 때문에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br>
 +
이러한 지위와 명성을 바탕으로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이연은 이세민에게 황태자 직위를 주고 2개월 뒤에 이세민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다. <br>
 +
즉위 후 연호를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와 전략가와 예술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대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런 그가 다스린 시기는 [[정관의 치]]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 왕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위징]]이라는 자의 간언이 두드러졌다.
 +
 
 +
==당 태종의 업적==
 +
당 태종의 업적은 [[정관의 치]]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당태종은 내치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외치에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br>
 +
한나라 말기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을 유린했으며, 특히 최근 백여년 간은 돌궐의 세력이 막강했다. 이러한 막강한 돌궐의 세력 때문에 부황인 당고조도 돌궐에 사실상 신하 노릇을 하며 몸을 낮춰야 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또한 서방의 토욕혼,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 구자까지 정복했다. 이로 인해,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드디어 공세로 돌아섰다. <br>
 +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 <br>
 +
또한, 당태종은 제도의 정비와 문화의 창달에도 힘썼다. 그가 10년의 노력을 들여 마련한 율령은 ‘당률’이라고 해서 이후 신라, 일본 등 ‘동양 문화권’의 정치제도의 근간이 된다. <br>
 +
또 도교와 불교가 지나치게 유행해서 귀족들의 방종을 낳았다고 보아, <오경정의>를 편찬하고 [[과거제]]를 강화하는 등 보다 금욕적인 유교를 장려했다. 당태종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직접 서법 서적을 짓기도 했으며, 따라서 전국적으로 서예가 크게 발전했다. 또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을 보여 한족과 북방민족의 예술을 종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시했다.
 +
[[분류:당나라]]
 +
[[분류:인물]]

2017년 6월 27일 (화) 10:10 기준 최신판

당 태종

당 태종의 생애

이세민은 599년 1월 23일 태어났다. 아버지 이연은 북주와 수나라에서 대대로 대장군을 지내고 당국공으로 봉해진 명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두씨는 선비족의 귀족이었다. 16세에 장교가 되어 18세부터 십 년이 넘게 전쟁터를 돌아다녔다.
617년, 아버지를 따라 태원 지방에 있던 이세민은 수양제의 실정으로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상황에서 거병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당이 천하를 차지하기까지 7년 동안 크게 여섯 차례의 전쟁을 치렀는데, 이세민이 그 중 네 차례를 이끌어 모두 승리하였다.
맏형 이건성도 앉아만 있지는 않았으며, 때로는 형제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적진에 뛰어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당의 건국 과정에서 일등공신은 누가 뭐래도 이세민이었다. 그러나 적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에 밀려 황태자 자리는 이건성에게 돌아갔고, 이세민은 진왕에 봉해졌다. 그러나 이연이 진양에서 거병하여 관중을 함락시키고 군웅을 제압하면서 전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이세민의 공적은 매우 두드러졌기 때문에 이세민의 명성과 지위가 상승하였다.
이러한 지위와 명성을 바탕으로 현무문의 변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이연은 이세민에게 황태자 직위를 주고 2개월 뒤에 이세민에게 왕위를 양위하게 된다.
즉위 후 연호를 정관이라고 개원하니 그가 당 태종이다. 그는 실제로 뛰어난 장군이자, 정치가와 전략가와 예술가이기까지 했으며, 중국 역대 대황제 중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어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뛰어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런 그가 다스린 시기는 정관의 치라고 일컬어지는 시기로 봉건사회로서는 보기 드물게 강력하고 안정되었다. 당 태종과 군신들은 수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였으므로 농민기의의 막강한 위력을 인식하고 통치에 주력하여 당 왕조의 지배를 공고하게 하였다. 또한 청정에도 노력하여 간언을 받아들이고 인재 등용에도 주의하였다. 전제군주로서 흔치않게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 중에서도 위징이라는 자의 간언이 두드러졌다.

당 태종의 업적

당 태종의 업적은 정관의 치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당태종은 내치에 충실했을 뿐 아니라 외치에도 빛나는 업적을 세웠다.
한나라 말기부터 북방민족은 중원을 유린했으며, 특히 최근 백여년 간은 돌궐의 세력이 막강했다. 이러한 막강한 돌궐의 세력 때문에 부황인 당고조도 돌궐에 사실상 신하 노릇을 하며 몸을 낮춰야 했다. 그러나 당태종은 돌궐의 분열을 최대한 유도한 끝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공격, 힐리가한을 포로로 잡아버렸다. 또한 서방의 토욕혼, 서남의 토번 역시 무찔렀고, 멀리 서역의 고창, 구자까지 정복했다. 이로 인해, 실로 수백 년 동안 이민족의 침략 앞에 수세를 면치 못한 한족 왕조가 드디어 공세로 돌아섰다.
당태종은 귀순한 북방민족에게서 ‘천가한’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한족의 황제인 동시에, 북방민족의 맹주로 군림한다는 의미였다.
또한, 당태종은 제도의 정비와 문화의 창달에도 힘썼다. 그가 10년의 노력을 들여 마련한 율령은 ‘당률’이라고 해서 이후 신라, 일본 등 ‘동양 문화권’의 정치제도의 근간이 된다.
또 도교와 불교가 지나치게 유행해서 귀족들의 방종을 낳았다고 보아, <오경정의>를 편찬하고 과거제를 강화하는 등 보다 금욕적인 유교를 장려했다. 당태종은 서예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직접 서법 서적을 짓기도 했으며, 따라서 전국적으로 서예가 크게 발전했다. 또 음악과 무용에도 관심을 보여 한족과 북방민족의 예술을 종합한 새로운 예술을 창시했다.